묵상 나눔
소교리 31, 32 : 하나님의 부르심Ⅰ(딤후1:9, 롬8:30, 살후2:13-14, 2017년 9월 24일)

소교리31, 32 : 하나님의 부르심Ⅰ(딤후1:9, 8:30, 살후2:13-14,2017 924)

    하나님께서 한개인의 구원을 계획하시고, 그것이 개인의 삶에서 실행되는 가장 첫 번째 단계가부르심입니다. 기독교 신자들이 성경에 나오는 부르심이라는 단어를 대게 소명또는 “Calling”이라고 사용합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부르심을 자신의 삶의 목적과 연관 지어서 사용하는 단어로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직업적 소명,””선교적 소명,”또는 목회적 소명같은 쪽으로 연관 지어 생각합니다. 틀린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부르심이라는 단어, 칼레오(καλω)”를 훨씬 많은 경우에 구원에 관한 부르심으로 사용합니다.

    오늘 본문 또한 구원에 관한 부르심을 기록합니다.본문 딤후1:9에서는 부르심을 설명하면서,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여기서 나타나는 가장중요한 기록 의도는, 부르심은 절대적으로 영원 전부터 선택된 사람 즉, 구원의 은혜의 수혜자로 정하신 사람들만이 대상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본문 롬8:30,“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라고 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구원의 예정이 얼마나 치밀한 하나님의작정 안에서 실행되는지 보게 됩니다. 창세전부터 구원 받기로 예정된 개인이 어느 날 갑자기 예수님을 믿게됩니다. 이것은 우연의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다르게 표현하면,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주시기로 작정한 사람을 반드시 부르십니다.그리고 믿게 하십니다. 13:48, “…영생을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참 신자는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 되었기 때문에 믿는 것입니다.

    순서가 중요합니다. 믿음은 작정되었기 때문에 믿게 됩니다. 그리고 구원을 받습니다. “믿음이 있기 때문에 구원을 받는다는 명제는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구원 서정이라는 신학적 관점에서 보면 틀린 말입니다. “믿음이 있기 때문에 구원받는것이 아니라, 구원받았기 때문에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그래서 작정된사람에게, 어느 날 효력 있는 부르심이 있고 그러고 난 다음에 거듭남이 따라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믿음이 주어집니다.

    우리 주변에는 작정은 되었지만, 아직 하나님께서 부르시지 않았기 때문에, 믿지 않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습니다.심지어 지상 교회 안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교회는 다니지만 아직성경에 대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그리스도에 대해서 못 믿겠다는 사람들이있습니다. 심지어 세례까지 받았는데, 못 믿겠다는 사람도 있습니다.이런 사람들 중에는 하나님께서 작정은 하셨지만, 아직 부르시지 않았기 때문에 못믿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때 우리는 외적 부르심과 내적 부르심을 구분하게 됩니다.누군가 교회를 잘 다니고는 있는데, 스스로 못 믿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외적 부르심은있지만, 내적 부르심은 없다고 봐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홍해가 갈라진 사건은 믿겠는데,동정녀를 통해 그리스도가 낳다는 것은 못 믿겠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에이르는 믿음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홍해 사건보다는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이 훨씬 중요합니다.왜 중요할까요? 그리스도는 반드시 동정녀의 몸에서 나야만 했습니다.왜냐하면 아담의 생물학적 후손으로 오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아담의 원죄가그리스도에게도 전가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아담의 족보상의 후손으로는 왔을지 몰라도 생물학적 후손으로오지 않아야만 했습니다. 그래야 그는 완전히 거룩하시고 죄가 없으신 분으로서 십자가를 질 수 있고,우리의 죄를 대신 지실 수 있는 완전히 의로우신 분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누군가 이 사실을 못 믿겠다고 한다면,그 사람은 자신의 논리로 인정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더 궁극적으로 보면 그사람은 하나님께서 유효한 부르심으로 부르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난 사람은 반드시 성령님의 효력있는부르심의 사역이 있었던 사람이고, 또한 구원 받은 사람입니다. 다시말해 구원의 서정이라는 개혁전통의 가르침에 따라, 미리 정하신 사람들은 반드시 부르시고, 그 다음에 반드시 따라오는 사건이 바로 거듭남입니다.

    그런데 옛날 개혁신학가들은 이렇게 효력있는 부르심과 거듭남을분리해서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효력있는 부르심의 사건과 거듭남이 동일한 사건으로 받아들이고 가르쳤습니다.그러나 어느 날 알미니안주의자들과 대화를 하다보니, 부르심의 사건과 거듭남의 사건을논리적으로 구분해서 가르쳐야 되겠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왜냐하면 알미니안주의자들은 복음을 받을 때 누구든지받아들일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다고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외형적으로는맞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라는 측면으로 보면 틀린 말입니다. 구원의사역은 오직 성령님의 사역입니다. 그래서 효력있는 부르심으로 부르고자 은혜를 베푸시면, 그것은 복음의 현장에서 반드시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래서 개혁신학가들은 효력있는 부르심도 하나님의은혜요, 거듭남도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같이 강조하기 위해서 분리해서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그러나 효력있는 부르심과 거듭남은 논리적으로 는 부르심이 앞서고, 이어 거듭남이따라오지만, 시간상으로 보면 동시에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그럼 외적 부르심이 뭘까요? 가장 쉬운 표현은, “복음을 들을 기회를 얻는 것입니다.본문 살후 2:13-14,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구원을 받게 하심이니, 이를 위하여 우리의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 이 말씀에 의하면,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라고 합니다. NIV성경에서는 He called you to this through our gospel…”이라고 번역합니다. 이것을 현대인의성경에서는, “…기쁜 소식을 통해 여러분을 부르신 것…”이라고 번역합니다. “복음을 통해” “기쁜 소식을 통해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성경은 분명히 복음이 부르심을 위한 도구로 표현합니다.이것을 외적 부르심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는 모든 현장이 외적 부르심의자리입니다. 설교든, 성경공부든, 전도의 현장이든 다 복음의 현장이므로, 그것은 다 외적 부르심의 자리입니다.

    외적 부르심의 특징이 뭘까요? 외적 부르심이 있다고 해서, 모두가 다 내적 부르심, 즉 거듭나는 것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외적 부르심의 현장에서,효력있는 부르심으로 이어져서 거듭날 수도 있고, 반대로 그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도있습니다. 예를 들어, 7장에보면 스데반이 설교를 전합니다. 이 설교를 들은 청중의 반응을 성경이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7:54). 설교라는 외적 부르심 앞에 많은 사람들이 서 있었고, 그들의 마음에 찔림까지 받았지만 그것이회개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이 구절을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이렇게 해석합니다: “복음이라는 외적 부르심에 현장에 있었지만, 그 부르심을 거부하였다.” 그러나 개혁주의자들은 이렇게 해석합니다: “복음이라는 외적 부르심에 현장에 있었지만,성령하나님께서 유효한 부르심으로 부르시지 않았다.” 시각의 차이가 납니다.물론 스데반의 설교의 외적 부르심의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은, 자신의 죄악과 무지로거부한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외적 부르심을 거부한 것이지, 성령님의 효력있는 부르심을 거부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절대로 성령님의 내적 부르심,즉 효력있는 부르심의 사역을 거부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그 복음을 거부한 사람들은오히려 스데반을 돌로 치고 그는 그 자리에서 순교하게 합니다. 그 자리에는 그 일을 주도하는 리더 격으로청년 사울이 있었습니다(7:58).이 후에 이 청년은 주님의 사도가 됩니다. 사울이 예수님을 온전히 만나서 거듭나는것은 스데반의 설교의 현장이 아니었고, 나중에 다메섹으로 가던 중에 일어납니다. 외적 부르심의 현장에 있었지만, 사울과 더불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외적 부르심의 현장이 곧 바로 내적 부르심으로직결되는 경우도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2장과 4장에서 베드로가 사람들에게 설교를 합니다. 이때 성경은 삼 천명이 믿고 세례 받았다고 기록합니다(2:41). 또한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오천이나 되었더라”(4:4)라고 기록합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단시간에 약 8,000명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효력있는 부르심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죠. 이것은 성령님께서 효력 있게는 부르시지만어떤 특별한 체험이나 큰 사건이 벌어지지 않고도, 그냥 말씀의 선포 현장에서 자연스럽고 부드럽게 일어난 사건입니다.그러나 사도 바울과 같은 효력있는 부르심의 체험은 일반적이지도 않고, 자연스럽지도않습니다. 초자연적이고 특별한 체험을 동반합니다. 그야 말로 특별한경우입니다. 이처럼 성경은 성령님께서 택한 사람을 효력 있게 부르실 때, 일반적으로 큰 체험이 없는 8,000의 경우와 큰 체험을 동반한 특별한 1의 경우를 동시에 보여줍니다. 그야 말로 8,000:1의 비율을 수치적으로 보여줍니다. 무슨 말일까요? 오늘날도마찬가지로 성령님께서 대부분의 경우에 한 사람을 효력 있게 부르실 때, 큰 체험이나 초자연적인 현상을 동반하지않고도 행하신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님은 얼마든지 한 영혼을 효력있게부르시고 거듭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창세전부터 작정한 사람을 다양한 장소,다양한 시간, 다양한 방법으로 부르십니다. 천편일률적이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몇 번의 복음 제시를 통해서도 전혀 반응이 없는가 하면,어떤 사람은 단 한번의 복음 제시에도 깊이 반응하고, 자신의 비참함을 보고 회개하며돌아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이 도대체 언제 예수님을 믿고 거듭나게 되었는지 조차 가늠하지못할 정도로 은연중에 믿고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각자에게 다양한 방법을 통하여 구원으로부르십니다. 이 모든 과정은 성령하나님께서 주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이 일이 어떻게 개인에게 일어나는지 감 잡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 3장은 성령님을 바람에 비유하여,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3:8)라고말씀하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이 구원으로 인도함을 받을 때, 주체는 성령님이십니다. 그분께서 효과적으로 부르시면 그 사람은 반드시 거듭납니다.그러나 성령님이 그렇게 하시지 않으면 절대 거듭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부르심은성령님의 주권적인 사역이지, 인간 개인의 반응이 아닙니다. 그래서 누군가아무리 거부하려고 몸부림쳐도, 그가 영생으로 작정된 사람이라면 효과적인 내적 부르심으로 부르시는 성령님의일하심에 거역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가 작정 밖에 있는 사람이라면, 성령님은 효과적인 부르심으로 그를 부르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결국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가질수도 없습니다.

    이 성령님은 개인에게 가장 적절한 방법으로 그 심령의문을 두드리십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슬며시 부드럽게 마음을 움직여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시고,또 어떤 이에게는 인생의 격변과 소용돌이를 만나게 해서 우여곡절 끝에 주님을 만나게 하십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사도행전 16장에 나타납니다. 한 명은루디아라는 여인이고, 또 다른 한 명은 빌립보 감옥의 간수입니다. 성경은같은 장에 이 두 사람이 효과적인 부르심을 받는 스토리의 극과 극을 보여주도록 기록합니다.

    16:14-15,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그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루디아는 어느 날 시장 통에서 장사하다가 우연히 바울을 만나얘기하다 보니 마음이 열리고 복음을 받아들이고 또한 그 온 집이 복음을 받고 세례를 받게 됩니다. 그러나이것은 우연처럼 보이는 필연의 사건이죠. 창세전부터 택한 백성인 루디아를 시장에서 장사하다가 바울을 통해부르신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 부르심의 현장이 너무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일어납니다. 그 이유는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라고 기록한 것처럼, 외형적으로 복음에 대한 아무런 거부반응이나 적대감 없이 너무도 순적하게이루어집니다. 루디아를 성령님께서 만지실 때 어떤 큰 체험이나 초자연적인 현상을 동반시키지 않습니다.그저 어느 순간에 이루어져 버립니다.

    반대로 또 다른 한 사람 빌립보 감옥의 간수를 보세요.이 사람은 특별한 체험과 초자연적인 경험을 통하여 효력있는 부르심을 받게 됩니다. 어느 날 바울과 실라가 전도를 하다가 붙들려서 감옥에 갇힙니다. 그런데 그날 밤 해필 당직근무를 서게 됩니다. 그런데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나서 옥문이 자동으로 열리고, 게다가 죄수들의 쇠고랑이 다 풀려 버립니다. 그래서 모든 죄수들이 다 도망쳐 버렸습니다.그런데 그 당직 근무 중이던 간수는 깜빡 졸고 있었습니다. 깨어나서 보니 이미 다도망간 후였습니다. 이에 이 간수는 책임감과 벌에 대한 압박감에 못 이겨 자신의 칼을 뽑아 자살하려 합니다.이때 바울이 소리를 지르면서 간수를 저지시킵니다. 간수는 무서워서 벌벌 떨면서 바울과실라 앞에 엎드립니다. 그러면서 선생님들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받겠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이때 바울은 복음을 제시합니다.“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어쩌면 이 막막한지경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육신의 구원을 물은 간수에게, 바울은 그것보다 훨씬 고차원적인 영혼의 구원을 제시합니다.그래서 결국 루디아의 경우처럼 그 가족까지도 다 세례를 받고 구원을 받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이 두 이야기는 똑 같은 부르심의 현장을 기록한 것입니다.그러나 그 과정은 완전히 다릅니다. 루디아는 아주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부르심이 이루어졌고,빌립보 간수는 큰일을 당하고 자살 결심까지 갔다가 극적으로 부르심을 받게 됩니다. 이 두 사람의 경우는 서로 사건과 체험이 다르지만, 그 원리는 똑같습니다. 두 사람 다 창세전부터 영생으로 주시기로 작정된 사람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어느 날 때가되어서, 성령님께서는 주권적인 역사로 각기 다르게 그들을 주님께로 이끄시고, 변화되는 역사를 일으키십니다. 이것이 성령님의 효과적인 부르심입니다.

    빌립보 간수의 경우를 한번 유심히 봅시다.이 간수가 당직을 서는 날 왜 큰 지진이 일어나고, 죄수들의 쇠고랑이 다 풀렸을까요?혹자들은 하나님께서 바울과 실라가 도망치도록 하게 하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고 믿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핵심은 바울과 실라를 도망치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역사가 아닙니다. 왜냐하면이 이야기를 잘 살펴보면 바울과 실라는 간수와 그 가정에 세례를 주고, 도망치지 않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그 다음날에 간수의 상관들이 의논을 하고, 사람을 보내서 바울과 실라를 풀어주라고공식 명령을 내립니다. 그 이유는 바울과 실라가 로마 시민권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그러면 분명해 집니다. 그날 밤 바울과 실라가 붙잡혀 빌립보 감옥에 갇힌 것,그리고 그날 마침 그 간수가 당직 근무를 서게 된 것, 또한 그날 밤 큰 지진과함께 옥문이 열리고, 모든 죄수들의 쇠고랑이 풀려 도망치게 된 모든 이 일련의 사건은 우연이 아니라,오직 그 간수를 그날 효과적인 부르심으로 구원시키시려는 하나님의 필연적인 사건이라고 봐야 합니다.

    혹자들은 빌립보 감옥에 일어난 사건을 두고,하나님께서 바울과 실라를 도망치게 하려고 기적을 일으키신 사건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이 사건의 초점은 바울과 실라에게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뒷이야기를 본문에서 기록하기를,바울과 실라는 옥문이 열리고 쇠고랑이 풀어져도 도망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뿐만아니라 그 다음 날 아침까지도 바울과 실라는 도망가지 않습니다. 오히려 간수의 상관들이 회의를 해서,공식적으로 풀어주라고 지시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공식적으로 석방되는 절차를 거칩니다.이렇게 볼 때 이 본문의 의도는 기적을 통해 바울과 실라를 도망치게 하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이 사건의 핵심은 빌립보 간수의 변화 있습니다. 성령님은 완악한 한 영혼을 변화시키기 위해서이런 외적인 초자연적인 방법도 동원하십니다. 그래서 결국 그 내면을 변화시키는 요소로 활용하십니다.결국 그 빌립보 간수는 이 사건으로 인해 그의 마음이 열리고, 복음을 받아들이고그 온 가족까지 세례를 받게 됩니다.

    성령님께서는 부르실 자를 반드시 부르시고,실패가 없으십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는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사람 자신도 느끼지 못하는가운데 이루어지기도 하고, 반대로 혹독한 시련의 일들을 만나게 해서라도 주님을 만나게 하십니다.이를 두고 존 플라벨(John Flavel)하나님의 영은 자신이 역사하시는 영혼의 기질에 따라 자신의 방법을 다양하게 변화시킨다.”라고말했습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다루실 때, 그 기질과 성향에 따라 가장 적절한 방법을 취하시고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사람이 흉내 낼 수없는 완전하고도 임의적인 방법으로 구원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전적으로 성령님의 역사이며,은혜입니다.

10/1/2017 6:07:00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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