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나눔
소교리 29, 30 : 성령님과 구원사역Ⅲ(갈2:20, 빌3:12, 고전12:3, 2017년9월17일)

소교리 29,30: 성령님과 구원사역Ⅲ(2:20, 3:12,고전12:3, 2017917)

    기독교 신앙의 믿음은 자기확신이 아닙니다.세상에서 말하는 믿음이라는 단어는 자기가확신이 들어서 믿기로 작정하는 것입니다. 자기확신이죠. 그러나 기독교신앙의 믿음은 성령님께서 일으키시는 전인의 혁신 사건입니다. “믿음이라는 단어를 같이 쓴다고 해서, 기독교 신앙의 믿음이 단지 사전적 의미의 믿음으로 받아들이면안됩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믿음은 단어 자체가 단순히“I believe…” “I trust”같이 신뢰나 신용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이 사고를 깨셔야 합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믿음은 사건입니다. 그래서 자기확신이나 의지와는 무관합니다. 어느 날 일어나버린 혁신 사건입니다.

    기독교의 구원은 성령님의 절대적 사역에 의한 절대적 혁신의수동적 사건입니다. 본문 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 말씀에 의하면 사는 것이 내가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입니다. 구원의 과정이 어떠한지 그리고 구원 이후의 상태가 어떠한지를 정확하게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새번역성경에서 이 대목을 이렇게 번역합니다.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고 계십니다.” 이것은 내 안에 너 있다같은 알콩달콩한 은유법이 아닙니다. 실제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신자가 믿음을 가진 후에 어떤 전인의 혁신사건이 일어났는지 명확히 보여줍니다. 더 이상 내 안에는 내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나는 더 이상 육신을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사람이 아니다는 뜻입니다. 영적인 사람으로혁신되었다는 뜻입니다. 이 일이 어떻게 일어납니까? “내가 그리스도와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말 그대로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가능합니다. 그런데 우리 중 아무도 2,000년 전 골고다 언덕에 십자가 상에 있었던 사람은 없습니다.그러나 성경은 명백히 내가 십자가에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혔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은단순히 언어유희가 아닙니다. 실제로 우리 가운데 일어난 혁신 사건입니다. 어떻게 이 일이 가능합니까?

    성령님께서 이 일들을 우리 가운데 일으키심으로 가능하게하십니다. 성령님은 우리 가운데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실제적이고 효과적으로 적용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이 실제로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박힐 때 옆에 시간적, 공간적으로옆에 있지 않았지만, 마치 실제 그 자리에 같이 십자가에 매달린 것처럼 우리에게 적용시킨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본문 빌3:12,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새번역성경에서는,“…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사로잡으셨으므로,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좇아가고 있습니다.”이 구절은 구원이 누구로부터 시작되는가를 정확히 묘사합니다.“예수께서 나를 사로잡으셨으므로…” 구원은 예수님께서 죄인을 붙드시는 사건입니다.여기에서 우리는 연상되는 그림이 있습니다. 바다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에게,보트에서 손을 내미는 모습입니다. 이런 예는 일면 기독교 구원에 관하여 맞게 설명한것입니다. 그러나 핵심은 틀렸습니다기독교 구원의 대상자는물에 빠져서 죽어가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죽어 있는사람입니다. 2:1, “그는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기독교 신앙의 구원은 죽어가고 있는 사람을 건져내서, 인공호흡을 해서 살려내는 것이 아닙니다.“이미 완전히 죽은 영혼을 새롭게 살리시는 전인의 혁신 사건입니다.

    거의 죽어가는 썩은 고목 나무에 이끼가 자라고 버섯이자라는 정도는 혁신이 아닙니다. 그저 회복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는전인의 혁신은 완전히 뿌리째 뽑혀서 오랫동안 말라비틀어진 지팡이에서 싹이 나는 것을 말씀합니다. 이것을 민17장에서 보여줍니다. 물론 민 17장 본문의 의도는 하나님께서직접 선택한 리더쉽을 세워서 더 이상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도록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조치입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생명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구원에 관한 유비(analogy)로 예를 들까 합니다.하나님은 열 두 지파에게 지팡이 하나씩 준비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각각의 지팡이에이름을 적으라고 합니다. 이때 레위 지파는 아론의 이름을 적습니다. 그런 후 다음날 보니, 아론의 지팡이에 싹이 납니다. 이를 성경이 이렇게 기록합니다: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어서 살구열매가 열렸더라.”(17:8). 성경이 단순히 싹이 돋았다고 말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 , , 열매라는 네 단계의 방식으로 상세 기록하는 이유가 뭘까요? 큰 두 가지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첫째, 이미 완전히죽고 생명력이 없는 지팡이에 혁신사건이 일어났고, 생명이 생겼다.”라는것과 둘째, 이 생명은 장구한 세월 동안 우연히 또는 누군가의 노력으로 된 것이 아닌, 일년 동안 일어나야 될, “, , , 열매라는 자연법칙의 순서를 하루 만에 일으킨 초자연적이고절대적인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구원의 즉각성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사실은 하나님께서 구원에 관하여 역사하실 때에는 전인에혁신적으로 사건을 일으키시는 분이심을 함께 보여줍니다.

    2001 911일 뉴욕의 월드 트레이드 센터는 테러에 의해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만약 이것이그 다음날 다시 그대로 복원 돼 있었다면, 이것을 두고 혁신 사건이라고 부를 것입니다. 그러나 이 건물은 12년이 흘러서야다시 복원됩니다. 그래서 이것을 혁신이라고 부르지 않고, 그냥 회복되었다고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라 비틀어진 생명 없는 지팡이에 생명이 돌아 온 것은 혁신 사건입니다.그리고 이 혁신 사건은 다시는 되돌려지지 않기 때문에 혁신 사건입니다. 그리고 이것을성경은 영생이라고 부릅니다. 한번 전인의 혁신사건으로 거듭난 사람의 생명은 영원히 꺼지지 않고, 영생을 이미 얻었습니다.“…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5:24). 영생이 시작된 인생은 심판에 이르지 아니한다고 약속합니다. 또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한번 거듭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잃어버려서사망으로 옮겨가지 않습니다. 이것을 성경은 은혜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은혜가 되기 위해서는,반드시 우리가 은혜 받기 전에 어떤 상태였는지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지난번 칼빈의 5대교리 중, “전적 타락또는 전적 부패라는 교리를 배웠습니다.성경이 말씀하는 이 진리의 핵심이 뭐였나요? 자연인은 전인이 죽어 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향해 어떤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의지나 권한이 전무하다는사실입니다. 가장 극단적인 예로, 사람이 살아 있을 때에는 어떤 선택도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내려 자신의 목숨을 끊는 일도 선택할 수 있습니다.그러나 일단 죽음을 선택한 뒤에는 그 어떤 것도 선택할 수 없습니다. 왜요?이미 죽어 있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고, 그 전인이 완전히 의로 가득 차 있을 때에는 그 어떤 것도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왜요?그의 영이 완전히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에게는 양 갈래의 선택권이 있었습니다.able to sin, able not to sin. 죄를 지을 수도 있고, 죄를 짓지 않을 수도 있는 것 중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자신의자유의지로 죄를 짓는 것을 선택합니다. 그런 후 즉시 그에게 죄가 들어오고, 그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히 망가뜨려 놓습니다.실제로 그는 육적으로는 살아 있을 진 몰라도 영은 완전히 죽어 버렸습니다. 그러고나서는 아파트에서 뛰어 내린 사람과 같은 처지가 됩니다.이미 죽었기 때문에, 그 어떤 선도 선택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전적 타락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구원은 이미 완전히 죄 가운데 죽어 있는상태의 사람을, 다시 살리는 혁신 사건입니다. 이것에 어떤 인간의 잡다한사색이나 공로가 끼어들 수 없습니다. 본문 빌3:12, “…오직 내가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은 말 그대로 입니다. 나는 이미아파트에서 뛰어 내려 더 이상 아무것도 자신을 위해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 전무한 상태입니다. 또한 주변의 어떤 능력 있는 사람도 그를 일으킬 수 없는 완전히 생명이멈춘 상태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누가 팔을 내민다고, 자신의 팔을 내밀수 있나요? 그럴 수 없습니다. 죽음의 상태, 즉 전적 무능의 상태입니다.

    이 전적 무능의 상태에서는 나의 구원을 위해서 아무것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정확하게 이 상태를 부연설명을 통해 다시 설명합니다. 3:12-13,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새번역성경에서 이렇게 번역합니다:“…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좇아가고 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아직 그것을 붙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의 말의 핵심은 뭡니까?“나는 예수 그리스도께 붙들려는 있지만, 나는 아직 그를 붙잡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고백하는 시점이 언제일까요?빌립보서는 옥중서신입니다. 이것은 로마 감옥에 1차 투옥 되었을 때입니다. 대략 AD 60-62년 정도로짐작됩니다. 그렇다면 그가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거듭난 지 대략 30년 전후가 흘렀을 것으로 보여집니다. 쉽게 말하자면 예수님 믿은 지 30년 됐다는 말입니다. 이 정도의 세월 동안 그의 고백이 뭡니까? “예수님은 자신을 붙들고 계시지만, 아직 바울은 아무것도 붙잡지 못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이 다음 중 어떤 뜻일까요? 퀴즈입니다. ①예수님이 나를 붙드셨지만, 내가 아직 예수님을 붙들지 않았기 때문에 구원 받지 못한 상태다.②예수님이 나를 붙드셔서 나는 이미 구원 받았지만, 나중에라도 내가 예수님을 붙들지않으면 이미 받은 구원이라도 잃어버린다. ③예수님이 나를 붙드셔서 이미 구원받았기 때문에, 내가 할 일은 없고 또한 이미 얻은 구원은 잃지 않는다. 답은 ③번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구원은, “한번 얻은 구원은 절대 잃어버리지 않는다.”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 성경의 진리의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한가지 조심해야 할 것은, 이 말씀을 자신의 죄악 됨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거나 남용하는수단으로 삼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바울은 빌립보서를 쓰고 그 후3년 정도의 세월이 흐른 후 그의 최후를 맞이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그3년 정도의 기간 동안 디모데전후서를 마지막으로 씁니다. 그의 마지막 서신에는 여전히자신이 붙잡았다라고 적지 않습니다. 그의 서신서 어디에도 그가 무엇을 붙잡았다거나 붙들었다라고 기록한 것을 볼 수 없습니다. 뭘 말할까요?그가 고전 9:27에서 고백한 것처럼,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라.”라고 한 것이 자신에게 현실이되었단 말입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을 붙잡았지만, 자신은 아무것도붙잡지 못했기에, 구원에서 최종적으로 탈락했다는 것을 말합니까? 아닙니다.이 말은 자신의 구원에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은혜임을 밝히는 것입니다.

    “한번 얻은 구원은 절대 잃어버리지 않는다라는 것은 절대진리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오직 택함받고, 부르심을 입은 거듭난 신자에게만 해당되는 진리입니다.다시 말하면, “한번 얻은 구원은 절대 잃어버리지 않는다라는 진리는, “교회 다니는 사람, “church goer에게 무조건적으로 모두 적용되는 말은 아닙니다.“교회 다니는 사람중에 누군가는 이 말씀이 해당되는 사람도 있고,또한 반대로 전혀 해당되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비유하자면,누군가에게 아이스크림을 주었다면, 그 사람은 아이스크림을 이미 얻은 것입니다.그리고 다시는 그것을 빼앗아 가지 않겠다고 준 사람이 약속했습니다. 그 약속이 유효하다면한번 얻은 아이스크림은 절대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이때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한번 얻은 아이스크림은 절대 잃어버리지 않는다.”그런데 만약 그 아이스크림을 아직한번도 받은 적이 없다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이 사람은 아이스크림을 얻은 적이 없으므로,“한번 얻은 아이스크림은 절대 잃어버리지 않는다.”라는 명제가 처음부터 적용할 수 있는 대상자가아닙니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사람에게 당신은 절대 죽지 않을 것이요라는 말이 성립되지 않듯이, 아직 거듭나지 않은 사람에게 당신은 그리스도 안에서 절대 죽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었소!”라고 말하는 것은 처음부터 말이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local church, 즉 지상 교회 내에는 다양한 상태의 멤버들이 존재합니다.성경은 크게 두 가지로 말씀합니다. 25장에보면, 양과 염소라는 은유로 분류합니다. 양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고,염소는 유기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상 교회를 이런 관점으로만 보면 실수하게 됩니다. 사실은 여기에 한 부류를 더 넣어야 합니다. “선택은받았지만, 아직 부르심을 받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을 딱히 부를 말이 없습니다. “잠정적 신자,” 또는 예비신자라고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그러나 이에 해당되는 사람들이 교회 내에 누구인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심지어자기 자신도 자신에 대해서 판단하기 힘이 듭니다. 왜일까요? 구원은오직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함부로 자기 자신이나 또는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금물입니다.

    설교자가 지상교회내에 적어도 세 부류의 멤버들이 존재한다라는 말을 하는 이유는 이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부르심을 아직 받지 못한, 그러나 택한 백성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또한 부르시고…”라고 했습니다. 구원받기로 작정된 사람들은 반드시 믿습니다.13:48,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그렇다면 믿음은 언제 주어질까요? 정답은 하나님께서 부르시기로 작정한 시간과 장소와 사건을 통해서 주십니다. 그러므로 지상 교회 내에는 구원백성으로 선택은 되었지만, 아직 부르심의 시간이 되지 않은 사람들이분명히 존재합니다. 그 말은 아직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이 교회 내에 존재하며, 그러나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 중에는 처음부터 유기되기로 작정된 사람이 있어서 결국 멸망에 이르게 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아직 거듭나지는 못했지만 택한 백성이기에, 특정한 시간대에 부르시고,거듭나게 하셔서 결국 영생에 이르게 되는 사람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 사실이 왜 우리에게 중요할까요? 우리의 구원에 관한 시간표는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계획하시며, 또한 하나님께서 임의적으로 시행하시며,적용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구원사역의 적용에 관한 일들을 성령님께서 임의적으로행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이 행하시는 구원의 결과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합니다. 왜 한번 얻는 구원이 영원한 구원이 됩니까? 그것은 성령님께서 내주하시고, 기름 부으시고, 인치시고, 보증하시는 일들을 우리 가운데서행하시기 때문입니다. 본문 고전12:3,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이 말씀은 기독교 구원론에 핵심을 보여줍니다. 구원은 하나님 편에서는 절대 주권의 영역이며, 또한 인간 편에서는 절대 수동의 영역이다라는사실입니다. 그렇다면 한번 얻은 구원을 위해서, 내가 열심히 달려가서주님의 손을 붙들 수 있을까요? 사도 바울이 쓴 서신서를 다 읽어봐도 자신이 구원의 종착역을 위해서 열심히달려가지만, 결국엔 자신의 손으로 그것을 붙잡았다는 말이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무슨 말일까요? 구원의 실패입니까? 아닙니다.기독교 신앙의 구원은, 처음부터 실패할 수 없는 확실한 구원입니다.그러므로, 내가 얻어 놓고 잃어버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는 위태위태한 구원이 아닙니다.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얻는 구원은 확실한 구원이며, 영원한 생명의 구원입니다.반대로 유기자 들에게는 처음부터 잃어버릴 것도 없는, 아무것도 얻은 적이 없는 본래멸망을 향해 계속 달려 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일하시기 시작한 믿음의 사람들은 절대 실패 없이그가 끝까지 구원의 종착역에 이르도록 인도해 가십니다.

9/18/2017 7:39:00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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