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질그릇생각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31: 타락, 죄 그리고 형벌2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31: 타락, 죄그리고 형벌2

김태길목사

62.이 죄로 말미암아 그들은 원의를 잃어버리게 되었고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끊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죄로 죽게 되었고 영과 육의 모든 지체들과 기능들이 전적으로 더럽혀지게 되었다.

 

   죄는 최초의 사람 가운데 있던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했다. 그리고 영적으로는 완전히 죽음의 상태에 이르렀고, 하나님이 부여해 주신 본래의 의는 잃어버렸다. 이런 결과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하나님은 창조사역 처음부터 인간에게 부여하신 의가 훼손될 수도 있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만드셨다는 점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 만드신 작품에 어떠한 타락의 가능성도 열어두시지 않으시고 원천봉쇄하셨다면, 결코 원의를 잃어버리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담은 처음부터 죄를 지을 가능성(able to sin)과 짓지 않을 가능성(able not to sin)을 동시에 가지고 태어난 것이다.

    어떤 가능성을 지닌 채 창조되었다 할 지라도, 적어도 타락 전 까지는 완전한 의와 완전한 선가운데 있었다. 그러나 그 완전함은 타락의 가능성까지 없어진 완전함은 아직 아니었다. 이를 두고 후크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타락 이전 아담과 하와가 존재했던 원상의 상태는 완전하거나 불변의 완성단계를 말하는것은 아니다. 분명히 인간은 최초에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그러나 아직 완성된 결정체는 아니었다.그는 여전히 성장과 연단의 필요성을 갖고 있는 존재였다. [개혁주의 인간론,pp. 146-147]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의로운 상태였지만, 신적 존재로 창조된 것이 아니기에 어떤면에서 타락의 가능성을 가진 의의 상태였다. 타락은 이 의의 상태에 전면적인 변질과 왜곡을 가져왔다타락은 영적, 육체적 모든 면에서 그 본래의 기능들을 더럽혔다. 생각은 늘 비뚤어지고, 감정은 서로를 헐뜯고 비방하는데 에너지를 소비하고, 판단은 항상 미숙하며, 지성은 하나님과 원수 되는 일에 촉각을 세우며, 영혼은 출구 없는 어두움 속에 갇혀버렸다. 하나님 뜻을 인지할 수 없는 상태즉 전적 부패(Total Depravity)의 지경이 되었다.

    전적 부패가 가리키는 인간의 첫 번째 상태는, 죽음이다. 에베소서 2장은 두 번 반복하여 인간이 허물과 죄로 죽은”(2:1, 5) 상태라고 명시한다. 인간의 가장 비참한 상태를 죽음이라는 단어만큼 잘 나타내는 것은 없다. 죽음의 상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의 상태이다. 또한 스스로 회복할 수 있는 어떤 기회도 만들 수 없는 회생불가능의 상태이기도 하다. 외부적인 도움 없이는 철저하게 버려질 뿐이며, 소망이 전혀 없는 상태다.

    둘째, 전적 부패에 놓인 인간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2:3)이다. “진노의 자녀는 하나님의 형벌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을 두고 부르는 관용구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지 않은 자연인의 상태이기도 하다. 이 상태는 영원한 형벌을 앞두고 있음에도 그 절망감을 인식조차 하지 못한다왜냐하면 자신이 절망 속에 처한 비참한 상태라는 것을 깨닫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의 역사가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셋째, 전적 부패에 놓인 인간은 지속적으로 하나님께 저항한다. 로마서 8장에는 육신에 속한 사람의 상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8:7). “하나님과 원수 됨이란 함께 할 수 없는적대적 관계를 말한다. 적대적 관계에서는 계속 부딪히고 충돌한다. 그리고 계속 저항한다. 자연인의 상태에 있는 사람이 계속 하나님께 저항하는 이유는, 그가 마귀의 권세 아래 있기 때문이다. 바울이 아그립바 왕에게 자신의 회심 사건을 이야기 할때, 구원의 과정을 이렇게 표현한다: “어둠에서 빛으로,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26:18). 어둠은 계속 빛에게 저항할 수 밖에 없다. 어둠과 빛이 공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어둠의 지배자 사탄은 자신의 권세 아래 있는 사람들을 절대로 하나님께 돌아가지 못하도록 필사적으로 저항한다이처럼 사탄의 권세 아래 있는 자연인이 하나님의 법을 따르지 않고 육신의 법을 따르는 것은 그들이 속한 나라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기 때문이다.

    인간 타락과 죄, 그로 인한 인류의 저주, 앞으로 다가올 영원한 형벌은 사람을 절망 가운데 놓이게 한다. 그런데 성경이 이런 인간 상태를 적나라하게 묘사하고그 받을 결과를 적시해 놓은 인격적 이유가 있다. 이에 대해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 자기를 아는 바른 지식이라는 소제목을 사용하면서,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첫째, “창조 시에 우리에게 주어진 바를 생각하고 또한 하나님께서 얼마나 자비롭게 우리를 계속해서 보살피시는가를 생각하는데 있다.그런 것들을 생각함으로써 우리는 우리가 본래 부여 받은 상태대로 흠 없이 남아 있었더라면 우리의 탁월함이 얼마나 위대했는가를 알고, 동시에 우리가 지니고 있는 것 가운데 우리 자신의 것은 하나도 없고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것이요, 우리는 그것을 누리는 것뿐이며, 따라서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께 의존하고 있는 것이라는 점을 명심하여야 할 것이다. 둘째, 아담의 타락이후의 우리의 비참한 처지를 생각하는 데 있다. 이것을 깨달으면, 우리의모든 자랑이나 자신감이 사라져서 우리가 정말로 낮아지고 수치로 가득하게 될 것이다이리하여 우리는 우리 자신들을 혐오하며 정말로 낮아지고, 또한 그런 상태에서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새로운 열심이 생겨나고,우리들 각자가 지금 철저하게 완전히 잃어버린 상태에 있는 그 선한 것들을 하나님 안에서 다시 회복할 소망을 갖게 되는것이다. [기독교강요 상, 크리스챤다이제스트, pp.295-296]

 

    기독교 진리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마다 느끼는 거부감 같은 것이 있다면, 아마도 죄에 대해서 많이 가르치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그 거부감은 앞서 말한 자연인에게 본성적으로 있는 저항감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런데 이 기독교 진리에 대한 거부감은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가 임할 때 그 거부감의 대상이 바뀌게 된다. 그 대상은 자연인 상태에있는 자기 자신이다. 그래서 칼빈의 말처럼 우리는 우리 자신들을 혐오하게 된다. 죄인이 자신의 비참함에 처음 직면하게 될 때 느끼는 가장 원색적인 표현이 바로자기 혐오일 것이다. 이것은 자아를 혐오한다 라기 보다 사실 자신 속에 있는 죄성에 대한 혐오다. 그러나 이 죄에 대한 혐오는 곧 겸손을 부르고, 결국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열망으로 나타난다. 이런 과정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수여자에게 나타나는 변화들이다.

2/25/2017 12:12:00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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