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5: 신론 1
김태길 목사
2장1항: 오로지 유일하시고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이 계신다.하나님은 존재와 완전성에서 무한하시고 가장 순수한 영이시고, 볼 수 없고,몸이 없으시고…
기독교는 유일신을 믿는다. 이 말은 굉장히 이기적이고 배타적으로 들린다. “유일신”이라는 말 자체가 “다른 신은 없다”라고 고집스런 주장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분명히 밝힌다. “나 밖에 다른 신은 없다”(사45:5, 새번역), There is no God beside me(KJV)” 이런 표현은 구약 성경에 대략 8번 더 기록되어져 있다. 이토록 성경이 명확하게 가르치고 있는데도, 일부 기독교 교회라고 주장하는 단체들이 다른 신들을 인정하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는 것은 죄악이다.
기독교 신자는 하나님이 우주의 안과밖에 존재하시는 유일한 분이시라는 것을 믿는 것을 기본전제로 해야 한다. 자기를 기독교 신자라고 말하면서, 이 세상에는 많은 신들이 존재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거나 타 종교의 가르침도 존중해야 한다는 등의 태도는 불신앙에 가깝다. 물론 기독교 신자가 타 종교에 대해 예의 없이 행동하거나 무작정 비방하는 태도를 가져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나 한국 천주교 성당 외벽에 4월 초파일만 되면 내 걸리는 배너에 “부처님 오심을 함께 기뻐합니다”라는 문구는 전혀 성경적인 가르침이 아니다. 로마 카톨릭이 그렇게 하는 저변에는 “화해와 평화”라는 범인류적 목표를 이루고, 나아가 예수님의 평화정신을 그렇게 실천할 수 있다라고 하는 잘못된 신학적 아집이 깔려있다.
기독교 신자가 직장이나 사회생활을 하면서 동료들의 종교를 무작정 무시하며 살라고 하는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영적 신분에 대한 좀더 자신감을 가지라는 말을 하고 싶다. “나 밖에 다른 신은 없다”라는 말씀은 “내가 신들 중에 최고의 신이다”라는 말이 절대 아니다. “영원전부터 쭉 본래 하나님 한 분 만이 존재하고 계신다”라는 뜻이다. 그 외에는 모두 인간의 산물이다. 그래서 기독교는 다른 신들의 존재를 부인하지 않으면서 하나의 신을 예배하는 ‘단일신론’이 아니다. 성경은 “다른 신”들에 대해서 ‘이방신’ 또는 ‘우상’이라고 표현한다. 이방신이 우상이 되는 이유는, 인간의 관념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바울 사도는 로마서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롬1:25). 사람은 기본적으로 창조주보다 피조물을 더 섬기고 예배하려는 악한 성향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이 그렇게 행동하는 데는 사람이 육신을 입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세상의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요1서 2:16)이라고 정의하고 이것들은 다 세상으로부터 출발한다고 가르친다.
육신을 입고있다는 것은 육신의 한계 속에 갇힌다는 말이다. 눈으로 확인된 것만 진리라고 받아들이며, 육신으로 경험되어 질 수 있는 것을 가치로 삼는다. 그러니 절대가치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보이지도 않고 경험되어지지도 않는 신을 믿으라고 하니, 불신자의 귀에는 그것만큼 어리석게 들리는 것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신앙고백서 2장 1항은 분명히 밝힌다. “하나님은 존재와 완전성에서 무한하시고 가장 순수한 영이시고, 볼 수 없고, 몸이 없으시고…” 하나님이 존재와 완전성에서 무한하시다는 말은 도무지 측량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인간은 아직 태양계 바깥을 벗어나보지도 못했다. 대신 38년전에 발사한 보이저 1호만이 지금 태양계를 벗어나 머나먼 우주 여행을 하고 있는 중이다. 사람은 아직 우주 공간의 천 억 분의 1도 가보지 못했다. 장님이 코끼리의 꼬리털 한 올 조차도 아직 만져보지 못한 꼴이다. 이것이 육신을 입고 있는 인간존재의 실제적 위치이다. 그런데도 인간지식과 경험이 대단한 경지에 있는 것 처럼 우쭐대면, 그것은 자신의 무지를 대 놓고 자랑하는 우스운 꼴이 되고 마는 것이다. 하나님은 욥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거기에 있기라도 하였느냐? 네가 그처럼 많이 알면, 내 물음에 대답해 보아라. 누가 이 땅을 설계하였는지, 너는 아느냐? 누가 그 위에 측량 줄을 띄웠는지, 너는 아느냐? 무엇이 땅을 버티는 기둥을 잡고 있느냐? 누가 땅의 주춧돌을 놓았느냐?” (욥38:4-6, 새번역).
과학자들은 이토록 무거운 지구가 어떻게 아무것도 없는공간에 떠 있는지, 그리고 심지어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지, 그리고 한치의 오차도 없이 똑 같은 속도와 시간과 궤도를 유지하면서 그렇게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설명하지 못한다. 단지 그들은 뉴턴이 계산해낸 ‘만유인력 (universal force)’를 우려먹고 또 우려먹고 할 뿐이다. 그럼 도대체 그 만유인력은 어디서, 왜, 어떻게 발생하게 되었는가? 아무도 설명하지 못한다. 그리고 정말 그 눈에 보이지도 않는 ‘중력끌림’이라는 물리적 힘이 모든 행성과 별에게 어느 날 동시에 갑자기 생겨나게 되었을까? 또한 이토록 무거운 별들을 텅 빈 공간 안에 서로 부딪히지 않고, 일정한 간격을 두고 움직이거나 서 있도록 만든 힘의 원천이, 정말 어느 날 대폭발(Big Bang)로부터 나왔을까? 그토록 우연의 에너지는 도대체 어디서 왔으며, 그 우연의 에너지가 폭발해서 과연 이토록 아름답고 질서정연하며 광대한 우주의 그림이 수놓아질 수 있는 확률은 얼마나 될까? 그리고 앞서 말한 모든 것이 수천 억 번의 우연의 과정을 거쳤다고 백 번 양보하더라도, 과연 이 지구와 그 속에 사는 모든 생물과 사람이 정말, 먼지도 없던 텅빈 공간의 어떤 에너지로부터 출발했다고 하는 “무식한 과학의 거짓말”로 얼버무려 버리면 다 설명이 될 일인가?
차라리 가장완전성으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이 시간과 공간 바깥에서 보이지 아니하는 신성과 능력으로 만물을 만드셨다(롬1:20)고 하는 것이 훨씬 과학적이고 현실적인 믿음 아닌가? “하나님만이 참되고 유일하시다”라는 말은 기독교 지상주의를 주장하기 위해서 하는 인본주의적 고집 같은 것이 아니다. 그냥 ‘절대진리’이다. 당신은 꿀을 한 사발 퍼 먹고서도 그 맛이 짜다고 할텐가? 설혹 누군가 그 맛이 정말 짜다고 말한다면 두 가지 중 하나일 것이다. 그 꿀이 가짜 꿀이거나, 아니면 그 사람의 혀가 병이 들어서 일 것이다. 진리는 병든 육신의 눈과 귀로 보고 들어도, 여전히 진리인 것이다. 죄악으로 병든 영혼으로는 “가장 순수한 영이시고, 볼 수 없고, 몸이 없으신” 하나님을 절대 만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마저도 가능하게 하실 수 있는 유일한 신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