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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6: 섭리4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6: 섭리4

김태길목사

4.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측량할 수 없는 지혜 그리고 무한한 선하심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매우 명백하게 나타난다. 섭리는 심지어 첫 번째 타락과 천사와 사람의 다른 모든 죄에까지 미친다. 죄는 단순한 허용에의한 것이 아니며 여러 세대에, 가장 지혜롭고 강력하게 억제하시고 또한 명령하시고 주관하시어 하나님 자신의 거룩한 목적을 이루도록 하신다. 그렇지만 죄악성은 오직 피조물에게서 나온 것이며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가장 거룩하고 의로우신 하나님은 죄의 조성자이거나 승인자가 아니며 그럴 수도 없다.

 

    당신은 흰색 물감 하나만으로 검정색 그림을 그릴 수 있는가? 아무도 그럴 능력이 없다그런데 전능하신 하나님도 하실 수 없는 것이 있다. 모순적으로 들릴 지 모르지만변증학적으로는 모순이 아니다. 하나님께도 엄연히 결핍이 존재한다. 하나님은 빛이시다 그래서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다 (요한1 1:5). 하나님은 검정색이 없으시므로 시커먼 악을그려 낼 수 없으시다는 말씀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전능하시지만 스스로 검어질 수 없다는 측면에서만큼은 전능하시지 않다고 말해야 맞다.


    하나님께서 죄의 조성자이신가? 이 질문의 답은 신학적으로는 매우 간단하다. 하나님께서는 죄의 조성자가 절대 되실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기 때문이다.” 배나무에서 사과가 열릴 수 없는 것처럼빛이신 하나님께 어두움이 절대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죄의 조성자까진 아니더라도 적어도 죄의 승인자는 되는 것 아닌가? 그렇지않고서야 어찌 세상이 이리도 죄악 된 일로 가득 할 수 있는가?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편에 서서이해하려다가 오히려 다음과 같은 잘 못된 결론에 이르기도 한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적극적으로 조성하시지는 않지만, 죄를 허용하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죄의 승인자가 되신다.” 과연 그럴까?


    이들의 논리를 짚어보자. ①하나님이 죄를 허용하시기로 작정하셨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의지로 결정을 내렸다는 의미다. ②하나님의 결정 없는 허용은 존재 할 수 없기 때문이다. ③하나님의 결정에 의해서 내려진 것은 하나님의 작정일 수 밖에 없고, 하나님의 작정은 어떤 일이 있어도 일어나야 하는 필연의 사건이다. ④죄의 허용은 곧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만 반드시 일어나는 필연의 결과물이 된다. ⑤그러므로 하나님은 죄의 승인자 일 수밖에 없다.


    이 논리에서 놓치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 창조의 선함이라는 부분이다. 창조사역에 관하여 성경에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한 것을 읽을 때 하나님의 어떤 성품이 보이는가? 하나님은 자기 자신의 작품에 불량품을 만드실 능력이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는 완전한 선만 존재하기 때문이다하나님의 일에 실수나 착오가 생길 확률은 0퍼센트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창조 사역을 흠이 없이 완벽하게 수행하셨다. 특히 하나님의 창조 사역 중 하이라이트는 사람을 지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여느 피조물과는 다르게 하나님의 형상을 사람 안에 두신다하나님께서 사람 안에 악의 형상을 두실 수는 없다. 하나님께는 조그만 악도 존재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태초에 지음을 받은 사람은 완전한 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불평을 늘어 놓는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만들지 않았으면 좋았을 걸, 괜히 그런 걸 만드셔서 인간을 죄의 구렁텅이로 빠지게 만드신 장본인이시지 않나?” 이런 불평을 늘어 놓는 사람들의 핵심은 아담에게 선택권을 준 것은 하나님의 치명적인 실수라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죄의 가능성”을 원천 봉쇄하셨다면 세상에 죄가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싶은 거다. 이런 불평을 가지는 사람들은 마치 엄마에게 왜 나를 낳으셔서 이런 고생을 시키느냐?”고 묻는 철부지아이와 다를 바 없다. 물론 이 아이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면 불행과 슬픔은 없을 것이다그러나 지금 자신의 형편이 불만족스럽다는 이유로,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면서까지 행복을 얻고 싶어 하는 것은 철부지를 넘어서 너무 이기적이다. 모든 사람이 불행한 순간을 만난다고 해서 원천 봉쇄의 방법을 생각하진 않는다.


    누군가 배는 고픈데, 손에 물 묻히기는 싫고 그렇다고 가만히 있자니 배가 저절로 채워 질리는 만무하니, 차라리 이럴 거면 태어나지 않았다면 좋았을 걸…”이라고 말했다고 치자. 그러면 배가 고픈 것의 원인이 태어난 것에 있는가? 아니다. 배가 고픈 것의 원인은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라, 손에 물을 묻히기 싫어하기 때문이다. 책임 소재를 따져보면 결국 그 불행의 요소배가 고픈 것는 자신을 존재하게 해준 부모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있다. 만약 내가 이러려고 질그릇교회의 목사가되었나 자괴감마저 든다라고 고백하는 목사가 있다면, 과연 그 책임이 목사로 뽑아준 질그릇교회 교인들에게 있는가? 절대 아니다.


    누가복음 16장의 불의한 청지기비유 이야기에서, 주인으로부터 해고 통지를 받은 청지기의 독백을 보자.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꼬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럽구나.” 이 말은 오늘날 회삿돈을 마음대로 유용하다가 해고를 당한 어느 회사의 재무회계총괄팀장의 입에서 나올 법한 아주 현실적인 표현이다그런데 만약 이 약삭빠르고 씀씀이가 헤픈 재무담당자가 해고 통지를 받고서는 자기를 뽑아준 CEO에게 왜 나를 이 회사에 뽑아서 이런 고민을 하게 만드느냐?”라고 화를 버럭 낸다고 상상을 해 보자당신은 이 재무담당자에게 단 1 퍼센트의 합리적인 동정표라도 줄 의향이 있는가?만약 회삿돈을 횡령한 회사원이 자신의 부당한 해고에 반발하여 법정 싸움을 벌인다면, 법원은 과연 73 아니면 9 1정도로라도 책임을 나누어 가지라고 판결을 내릴까?


    어떤 것을 선택할 수 있는 명령을 받은 것 자체가 악이 될 수는 없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명령한 것 자체가 악이 아니라면, 이 명령을 주신 하나님에게도 악에 대한 책임이 없다는 말이다. 대신 선택권을 부여 받은 사람에게는 어떤 것을 선택하는순간 모든 결과가 자기의 책임이 된다. 부모가 아이에게 컴퓨터를 사주면서, “컴퓨터를 사용하되 스타크래프트는 절대 하지 마라, 네가 그것을 하는 날에는 학교성적이 곤두박질 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아이는 결국 부모의 말을 어기고 스타크래프트를 한다. 결국 밤새 스타크래프트에 빠져 있다가 학교성적이 나빠졌다. 이때 이 아이가 부모에게 왜 나에게 컴퓨터를 사줘서 학교 성적이 나빠지게 했느냐? 엄마 아빠가 책임 져요!”라고 한다. 그럼 정말 이 아이의 학교 성적이 떨어진 책임이 그 부모에게 있는가? 아니다. 그 책임은 부모의 말을 어긴 아이에게 있다. 어떤 사람은 부모도 도의적인 책임이 있지 않느냐고 교육학적인 책임론을 들먹거리기도한다. 그러나 일리가 없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모든 아이들이 부모로부터 컴퓨터를 받았다고 해서, 스타크래프트에 빠져서 시험을 망치지는 않기 때문이다. 결국 자기의 선택의 문제다.


    인간의 죄를 단순히 하나님의 허용때문이라고만 말하면,인간은 피해자, 하나님은 피의자가 되고 만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죄를 허용하셨다고 해서, 하나님께 그 책임을 돌릴 수 없다악의 존재가 하나님을 악으로 몰아갈 수 있는 이유가 될 수 없다. 하나님은 악의 창시자도 시행자도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완전히 선하셔서 어떠한 경우에도 악을 의도하시거나 계획할 수 없기 때문이다

1/14/2017 12:19:00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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