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3: 성경3
김태길 목사
1장6항: 하나님 자신의 영광,인간의 구원, 신앙 그리고 삶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들에 대한 하나님의 전체 경륜이성경 안에 명백히 기록되어 있든지 혹은 선하고 필연적인 귀결에 의해 성경으로부터 추론될 수 있다. 성령의새로운 계시에 의해서든 사람들의 전통에 의해서든 언제라도 어떤 것도 성경에 첨가되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불구하고 그 말씀에 계시 된 대로 그러한 것들을 구원론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영의 내적 조명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우리는 인정한다. 그리고 항상 준수되어야하는 말씀의 일반적인 규칙을 따라서, 본성의 빛과 기독교인의 사려분별에 의해 규정되어야 하는 인간적 활동이나공동체들에 공통적인,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교회의 정치에 대한 몇몇 상황들이 존재한다는 것도 인정한다.
많은 기독교 신자들이 ‘계시’와 ‘조명’을 헷갈려 한다. 계시는 하나님이 직접 개인에게 말씀하시거나 이상과 꿈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뜻을 말한다. 반면 조명은 고전 2:10절에서 밝히는 바와 같이,“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The Spirit searches allthings, even the deep things of God). 영어 성경은 ‘탐색’(searching)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R. C. Sproul이라는 신학자는이에 대해,“바울이 성령의 탐색(searching)이라는 은유를 사용함으로 의미하는바는 성령 스스로 하나님의 진리를 찾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 하나님 말씀에 탐조등을 비추시는 것을 의미한다.”라고 말한다.
조명은 신자 개인의 눈을 열어 마치 “탐조등을 비추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 알게 하시되, 어떤 새로운 것을 첨가하거나 새로운 계시를 주는 것이 아니라, 이미 계시된 성경 말씀을 분명히 밝히고 그것을 개인의 삶에 적용시키도록 하시는 성령님의 활동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믿어지는 것은100퍼센트 성령님의 내적 조명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도이 영의 내적 조명이 없이는 성경의 계시가 깨달아지지 않는다. 예를 들어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을 성령님의 내적 조명이 없이 누가 깨달을 수 있겠는가? 영의 내적 조명이 없이 개인의 지식으로만 이것을 이해하려는 한 사람이 있다고 치자. 그 사람은 가장 먼저, “하나님”의 존재부터 밝혀서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고 나서는 그 하나님에게 독생자가 있다는 사실이 인식되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고는 그 독생자가 도대체 누구이기에 믿음의 대상이 되어야 하며, 그 믿음이 도대체 어떤 것이길래 멸망을 피하고 영생을 얻게 하는 능력이 되는지에 대한 지식을 얻기까지는 굉장한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한 지식을 얻기 위해서 끝없이 노력하다가 결국 얻지못하고 포기하거나 “신은 없다”라는 결론을 내리게 될 것이다.
기독교 신자는 자신의 지혜와 능으로 성경을 다 이해한사람에게 주어지는 신분이 아니다. 이 신분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셨기”(엡1:17)때문이다. 결국 신자가 구원에 이르는 지식을 얻게 된 것은 자신의 머리로 모든 진리가 이해되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믿음”을 신자의 마음가운데 심으셔서 구원에 이르는 지식을 가지게 하신 것이다. 이것을 조나단 에드워즈는 “마음의 새로운 감각” 또는 “영적 감각”이라고 말한다. 불신자에게는 이 영적 감각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이고 올바른 지식이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불신자는 “영적 감각”이 없으므로 인해 성령님의 조명도 없고 결과적으로 믿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 신자들이 영적 감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령님의 ‘조명’과 ‘계시’를 구별하지 못하면서 많은 문제가 발생한다. 알다시피 오늘날 더 이상 ‘계시’는 없다. 요한계시록을 마지막으로 성경이 완성되었고, ‘계시’는 종료 되었다. 이제 신자들에게는 그 어떤 새로운 진리의 말씀이나 직접적인 계시가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어떤 신자들은 종종 마치 “직접 계시”를 받은 것 처럼 말하고 행동한다. 예를 들면, 어떤 신자가 하나님께 새로 시작할 사업을 놓고 기도하면서 묻길, “하나님 슈퍼마켓을 할까요? 아니면 순두부 식당을 할까요?” 그런데 그날 밤 꿈을 꾸는데, 본인이 순두부를 맛있게 먹는 게 나오고, 그 다음날 아침을 먹는데 마침 아내가 순두부 찌개를맛있게 차려 놓는다. 이때 그 신자는 순두부 집을 차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한다. 이것을 두고 어떤 교파에서는 이것이 하나님의 “조명하심”이라고 가르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발상은 위험하기 짝이 없다. 왜냐하면 이것에 “맛을 들인” 신자는 사업에 관한 것뿐만 아니라, 모든 생활 속에서 그런 식으로 기도하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기도만 하면 하나님이 자신의 뜻을 어떤 식으로든 보여주신다고 믿어버리는 비성경적 신앙에 빠지게 된다. 내가 아는 어떤 목사는, 점심 메뉴로 무엇을 먹어야 할지 까지도 기도해보고 결정한다고 한다. 그런데 자신의 마음속에 “성령님의 조명”이 틀릴 수 있기에, 함께 있는 동료 신자들에게 같이 기도해보고 마음에 똑 같은 메뉴가 떠오르면 그것이 정말 “성령의 조명하심”이라고 확정 짓는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은 성령님의 조명하심이 아니라, 성령님의 거룩하신 활동을 폄하하는 자신들의 유치하고 무지한 영적 상태를 보여 줄 뿐이다. 나는 묻고 싶다. 그러면 신자가 “성령님 지금 화장실에 가고 싶은데, 지금 갈까요?아니면 나중에 갈까요?”라고 시시 때마다 기도해 봐야 되는 것 아닌지?
만약 신자가 매 순간순간 A와 B를 놓고 선택해야 할 때마다, 하나님께 기도해서 확답을 받아서 삶을 살아야 한다면, 그 신자의 삶은 인간의 삶이 아니라, 로봇의 삶이 되고 말 것이다. 성경은 분명히 가르친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 신자가 해야 할 일은, 성령님의 조명하심 따라, 성경이 뭐라고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지를 알고, 그 가르침에 따라 “분별”하는 것이다. 물론 성경은 개인이 어떤 사업을 해야하는지, 어떤 배우자를 만나야 하는지, 어떤 대학에 원서를 넣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믿음의 사람들이, 하나님께 물어보고 직업을 선택하거나, 배우자를 만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을 위해 신실하게 그들의 삶을 살았다. 그들이 살던 시대에는하나님의 직접 계시가 아직 종료되지 않은 시대에 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계시가 종료된 시대를 살아가는 신자에게 하나님을 뜻을 아는 유일한 수단은 성경밖에 없다. 성경이 나의 삶의 지표가 되고,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인생의 가장 중요한 음식이 될 때, 하나님의 영은 우리 마음 가운데, 탐조등을 켜서 밝혀 보여주듯이, 내가 어디로 향해 가야하며, 무엇을 해야 할 지를 보여 주실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오늘날 개인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기 때문이다(신5:22). 성경보다 더 명확하고 변함없는 하나님의 음성은 이 세상에 없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사람은,성경 외의 것으로 자꾸만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한다. 그러나 오늘날 하나님의 유일한 음성은 성경이다. 성경에 눈을 집중하고 하나님의 세밀한 음성에 귀 기울여 보라. 성경은 눈으로 보지만, 마음의 귀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될 것이다. 이것이 성령님의 조명하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