딤전3장 & 딛1장에 나타난 영적 리더의 자격 7-2
김태길 목사
“여자들도 이와 같이 …절제하며…”(딤전3:11).
“감독은…절제하며”(딛1:7-8).
교회 내 여성 리더는 대게 여성 그룹이나 개인을 돌보는 것이 주요 역할이다. 지체를 돌보는 데 어떤 ‘절제’가 필요할까? 첫째, 자기 사람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신과 연대할 수 있는 그룹을 만든다. 그리고 철옹성과 같은 자기들만의 세상을 구축하고 다른 무리가 쉽게 침범하지 못하도록 한다. 자신을 방어하기 시작한 것은 인류에 죄가 들어온 것과 때를 같이 한다. 죄가 들어오기 전의 에덴 동산에서는 맹수가 자신의 발톱으로 사람을 할퀴거나 공격하지 않았다. 그리고 사람이 사람을 멸시하거나 해하는 일은 상상 밖의 일이었다. 그러나 죄가 들어 온 이후의 에덴 동산은 달랐다. 사람이 화가 나면 사자의 야성 보다 훨씬 사납고 포악해 질 수 있었다. 인류 최초의 살인이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가인은 시기심을 절제하지 못하고,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여(창4:5) 혈육을 쳐 죽이는데 별로 고민하는 흔적이 없다. 그러고 나서 가인은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 에덴동쪽 놋 땅에 살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가인은 인류 역사상 최초의 토목 공사를 벌이고 성을 쌓는다. 그리고 그 성의 이름을 자신의 아들의 이름을 따서 에녹이라 붙인다 (창4:17). 사람이 죄를 짓고 가장 먼저 생각해 낸 아이디어가 자신의 성을 쌓는 것이었다는 것은 사람의 죄의 본성에는 자신의 세계를구축하려는 강한 욕망이 내재해 있다는 방증이다.
교회라고 해서 이런 욕망이 없지 않다. 고린도교회가 안고 있었던 큰 골치거리 중 하나가 “자기 편당”을 만드는 것이었다는 것이 이를 말해 준다 (고전1:12). 그런데 그 편당의 이름이 신약교회에서 가장 비중 있는 사람들의 이름을 따서 했다는 것이 그 심각성을 더해 준다. 심지어 그 속에는 “그리스도 파”라는 이름도 있었다 하니 웃지 못할 일이다. 유일한 구원자 되신 분의 이름을 한낱 편당을 짓는데 사용했다는 것은, 가인이 자신의 진지를 에녹이라고 붙이면서 그 이름의 뜻을 오용 한 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그리스도는 ‘기름 부은 자’라는 뜻으로 ‘메시야’와 동일한 뜻이다. 그리고 ‘에녹’은 ‘바치다’라는 뜻이다. 이 두 이름의 각각의 뜻 이면에는 ‘하나님께 기름 부은 받은 자’와 ‘하나님께 바쳐진 자’라는 뜻이 있다. 우습지 않은가? 주체인 동시에 궁극적 목적이 되어야 할 지고한 그 이름이 개인의 목적을 이루는 것으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이름을 특별한 가치로 두시고 경고하신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출20:7).
교회 내에서 편당을 짓는 것이 위험한 이유는 결국 그것이그리스도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이기에 그렇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고귀한 이름을 초대교회 사도들의 이름과동급으로 전락시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것의 논리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상이나, 삶이나, 죽음이나, 현재 것이나, 장래 것이나, 모든 것이 다 여러분의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입니다.”(새번역, 고전3:22-23).
①바울, 아볼로, 게바 〈 ②여러분(고린도교인 및 모든 성도) 〈 ③그리스도〈 ④하나님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나타났던 4개의 주요 편당의 이름을 다 나열한다. 바울, 아볼로,게바, 그리스도. 그런데 이 구절에서 어떤 수사학적 등식을 성립시키고 있는지 자세히 보자. ①번 그룹은 ②번 그룹에 종속된다. 그리고 ②번 그룹은 ③에게 종속되며, ③은 ④로 말미암는다. 사실 사도 바울이 이런 표현을 한 이유는, 그리스도를 소유한 신자는 이미 모든 것을 소유했으므로, 어떤 특정 사도들의 가르침을 특별한 것으로 여기는 것은 어리석은 것임을 보여 주고자 함이다. 그 사도들 또한 그리스도를 소유한 지식으로 가르치기 때문이다.
자기 사람을 만들어 편당을 짓는 사람들의 저변에는 자기 방어 심리가 숨어 있다. 자기방어에 민감한 사람들은 대게 자신이 소외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군중의 힘을 빌려서라도 자신의 내면의 두려움을 몰아내려고 한다. 어쩌면 끼리 끼리 몰려 다니는 사람들은 서로 비슷한 유형의 내면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동질감은 서로를 끈끈하게 묶는 밧줄이 되어 시간이 가도 여간 해서는 그 결속력이 약해지지 않도록 지탱하는 힘이 된다. 이것이 가장 치명적인 문제다. 그 결속력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더 깊은 고립에 빠져들고 결국 자신들의 성안에서만 살 뿐, “바깥 세상”에는 관심을 돌릴 만한 동기나 그 어떤 여유도 생기지 않게 된다. 그런데 이들은 서로 자기들만의 세상에 “쇄국 정책”을 펴기로 결의한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자신들도 모르게 그저 고립무원을 만들어 간다.
그런데 더 최악의 경우로 치닫게 하는 것은, 이 고립무원의 세계에도 아성(牙城)이 생기는것이다. 말하자면 고립된 세상 안에 그것을 지배하는 또 다른 핵심 세력이 생기는 것이다. 이 핵심의 리더는 군계일학이 되어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위치를 즐기고 탐닉하면서 점점 성령의 생각은 버리고, 악의 습관들을 나타낸다.
자신의 내면의 연약함을 타인의 인정이나 존경으로 보상받으려는 사람은 영적 리더로는 부적격하다. 나는 목사로서 가장 경계 하는 것 중 하나는, “교인이 나만 바라보는 것”이다. 나는 언젠가 목사로서의 평가를 받게 될 때가 오면 이것으로 판단 받게 될 것이다: 교인들이 나의 사람이 되어 있는지 아니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어 있는지. 나는 교인에게 인기와 사랑을 누리는 것에 염려하고 경계한다. 그러나 내 마음이 힘들고 혼자라고 느껴질 때마다, 나의 내면의 깊은 곳으로부터 “주목 받고 싶어하고, 나를 드러내고 싶은 욕망”이 꿈틀 꿈틀 올라오는 것을 본다. 그렇게 되면 어김없이 교만한 생각이 자리 잡게 되고, 그리스도를 나타내기 보다는 나의 의를 자랑할 때가 많아진다. 그리고 결국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않고, 나를 바라보게 된다. 이것은 죄악이다.
교회 리더들도 이와 똑 같은 위험에 빠질 수 있다. 특히 여성 리더들은 시기와 질투의 화신이 되어 자신의 영혼을 편견과 고정관념의 틀 속에 처박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시기와 질투는 교만한 영혼에게 나타나는 상징적인 열매다. 자신을 누군가 보다 더 우위에 두고 싶은 교만한 욕망이 시기와 질투다. 이런 사람이 리더가 되면 그리스도는 온데 간데 없고, 자신이 인정받아야 직성이 풀린다. 병든 내면과 생기 없는 영혼으로 연명하는 리더는 더 연약한 지체의 영혼을 망치며 병들게 한다. 상처 입은 영혼에게 그리스도를 전염시키지는 못할 지 언정, 자신의 흉측한 감정의 골과 영혼의 곪아 있는 종기를 리더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퍼뜨리는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자신의 내면을 잘 다스리지 못하고 절제하지 못하는 사람은 아직 리더가 되기에 이르다. 자기의 못난 내면의 상처를 지체들에게 여과 없이 쏟아내고서는 금방 돌아서서 손쉽게 ‘미안’이라는 한 마디로 무마하는 사람은 리더가 되기 힘들다. 리더는 전장에 피를 흘리며 쓰러진 전우를 밟고 가지 않는다. 오히려 그를 등에 업고 가면서 “미안! 내가 당신의 짐이 되어서…”라는 말을 전우로부터 듣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교회 영적 리더는 그 따르는 사람들이 미안하게 여길 정도로, 그리스도의 군사들을 너그럽게 그리고 담대하게 생명의 길로 인도해 가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