딤전3장 & 딛1장에 나타난 영적 리더의 자격 7-1
김태길 목사
“여자들도 이와 같이 …절제하며…”(딤전3:11).
“감독은…절제하며”(딛1:7-8).
디모데전서 3장과 디도서 1장은 각각 교회 지도자들의 자격 중 ‘절제’에 대해서 말한다. 그러나 사실 한글 번역에서 ‘절제’라는 단어로 사용된 두 구절의 성경 원어는 같은 단어가 아니다. 그렇다고 의미상 완전히 다르지는 않다. 디모데전서 3장 11절의 ‘절제’는 품행이나 생활 방식에서의 절제를 의미한다면, 디도서 1장 8절의 ‘절제’는 좀더 원초적이면서 영적인 절제를 의미한다. 의미가 비슷하긴 하지만, 디도서 1장에서 요구하는 감독의 자격으로서의 ‘절제’가 좀더 영적이면서도 폭넓다고 보여진다. 오늘 글에서는 디모데전서 3장의 ‘절제’에 대해 집중할 것이다.
교회 여성리더의 자격에 ‘절제’라는 항목이 들어 있다는 것은, 성경이 여자들에게 특정적으로 나타나는 품행이나 생활 방식의 무절제가 개인과 공동체에 끼칠 부정적인 영향력에 주목한다는 뜻이다.
NIV와 NASB에서는 temperate이라는 단어로 번역했다. 이것의 사전적 의미는, ①삼가는 ②온건한 ③(음주) 도를 넘지 않는 ④(기후) 온화한, 정도로 요약된다. 한글 성경에서 ‘절제’라는 단어 하나가 가지고 있는 한계성을 영어 성경에서는 좀 더 포괄적으로 나타내 주었다. 그럼에도 디모데전서 3:11이 정확히 어떤 종류의 ‘절제’를 말하려고 하는 지 가려내는 것은 해석상 한계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여성 지도자에게 필요한 ‘절제’의 영역이 몇 가지 존재한다.
첫째, 말의 절제가 필요하다.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하기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잠10:19). 하루 평균 남자보다 여자가 훨씬 많은 말을 한다는 것은 연구문헌들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상식이다. 이를 연구하는 학자들에 의하면, 하루에 여자가 남자보다 두 배 또는 그 이상의 단어를 사용한다고 하니 여자가 하루 종일 얼마나 쉴새 없이 떠드는지 알만하다. 왜 그럴까? 뇌구조의 차이라고도 하고, 호르몬의 차이라고도 하고, 딱히 합의된 연구 결과물이 아직은 없는 것 같다.
여자에게 있어서 말은 상냥함을 나타내기도 하고, 반대로 표독스러움을 나타내기도 한다. 성경은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마15:11)고 말씀하신다. 말에 가시가 있는 사람의 마음의 상태는 그가 어떤 마음의 소유자인지 여실히 보여주는 거울이다. 물론 심리학과 상담학적으로 접근해 보면, 그런 사람마저도 자기방어기재가 깔려 있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사람 내면의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상처가 더 이상 상처 받지 않기 위해서 몸부림 치듯 자신을 방어하면서 나타나는 인간 내면의 자율신경계에 의한 방패 역할 같은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입으로 나오는 말은 자신의 책임이지, 자신 내면 속에 존재하는 다른 존재에 의한 것이 아님을 명심하라.
혀를 길들이는 것은 야생마를 길들이는 것 보다 힘든 일이다. 오죽하면 성경이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가득한 것이라”(약 3:8)고 했겠나?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입에 대해 책임성 있는 절제가 없다면 그 사람은 한 입으로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약3:9)하기도 하는 죄에 빠지게 된다. 말과 관련하여 교회 여성 리더는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 있다.
① 배우자에게 잘 못된 판단을 내릴 만한 정보를 흘리지 말라. 특히 어떤 특정인의 흠이될 만한 일을 알았을 때 그것을 부정적으로 흘리지 말라. 정보의 특징은 A에게서 B로 넘어가는 순간, 반쯤은 왜곡되어서 새로운 정보로 자리 잡는다. 그리고 B에게서 C로 넘어가는 순간, 다시 그것의 반 이상이 왜곡된다. 이 사이클이 몇 번 반복되다 보면, 처음 정보는 이미 사라지고, 완전히 새로운 정보가 되어버린다. 말이 가진 부정적인 힘은 긍정적인 힘보다 그 가속력이 비교할수 없이 빠르고 세다. 그래서 부부는 서로 잘 못된 정보를 가진 채, 그 특정인을 근거 없는 “판단의 칼로 난도질” 하게 되며, 시간이 지나면 상상이 현실이 되어 어느 순간 그 특정인은 “공공의 적”이 되어 버린다. 불행하게도 친밀한 부부일수록 훨씬 더 깊이 그리고 더 부정적으로 동질감을 형성해 버린다. 그러고는 그들의 뇌 속에는 어떤 사람이나 사안에 대해 일종의 “불쾌한 공통된 지식”이 각인된다. 이것을 두고 편견이라고 부른다.
편견은 멀쩡한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고 손쉽게 만인의 적으로 둔갑 시킨다. 그런데 더 위험한 것은 그 편견이 소수에 머무르지 않고, 다수에게 전염병처럼 퍼지게될 때이다. 그리고 그 대상은 점점 원치 않는 고립의 늪에 빠지게 된다. 이 모든 일들은 누군가가 자신의 비뚤어진 생각을 다른 누군가에게 말을 통해 잘 못 전달 했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영혼이 병들어 있는 사람의 말에는 썩은 생선에서 흘러 나오는 찌르는 듯한 진액이 스며 있다. 그 진액은 다른 사람의 귀에 닿는 순간 그 사람의 판단력을 마비시키고, 편견과 고정관념의 세계로 그를 끌어 들인다. 왜 이와도 같은 무서운 일들이 벌어질까? 신자의 입술은 사단의 공격 전술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타겟이기 때문이다. 성경이 괜히 사단을 “참소하던 자”(계 12:10, 새번역 성경은 “헐뜯는 자”로 번역)라고 알려 주겠는가? 당신이 만약 일주일에 한번 이상 누군가를 대상으로 동일한 내용의 말을 곱씹으면서, 배우자에게 또는 지인에게 편견으로 말하고 있다면 당신은 이미 “참소하는 자”편에 넘어 가 있음을 알라.
② 자신의 기분을 쉽게 표현하지 말라. 이 말은 위로 받고 싶은 마음을 꾹 참으라는 말은 아니다. 영적 공동체인 교회는 서로 사랑 안에서 기도제목을 나누고, 아픔도 기쁨도 함께 해야 한다. 그러나 자신의 감정 상태가 나빠진 이유가 혹 교회 내 다른 지체와 관련돼 있어서라면 자신의 감정 표현에 신중해야 한다. 사람의 기분은 많은 부분에서 객관적이지 못하다는것은 이미 여러 분야의 연구를 통해 밝혀지고 있다. 당신의 상한 기분은 주관적인 말을 하게 하는 원인이 된다. 상한 감정의 상태는 이성적인 판단을 잠재운다. 평소 아무리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부류의 사람일지라도 자신의 감정의 방어선이 무너지면 논리와 객관성은 현저히 떨어진다. 그러므로 감정이 여전히 격한 상태에 있다고 판단되면, 자신의 기분을 타인에게 가능한 지혜로운 방법으로 노출해야 한다.
말의 지혜는 자신의 감정을 더 빨리 회복시키는 지름길이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 많은 관계의 부작용을 감수해야 한다. 누군가로부터 상한 감정이 생겼을 때 가장 하지 말아야 할 태도는, 당사자에게 자신의 감정을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버리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되면 그 한 순간은 마음이 후련해 질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두 당사자 간에는 해결의 길이 묘연해 진다. 교회의 지체는 길에서 어쩌다 마주치고, 그 다음엔 평생 만나지 않을 사람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야 말로 가족이다. 가족이 화평 할 수 있는 길은 배려다. 배려는 타인을 위해 자신이 조금 더 불편을 감수했을때에만 나타나는 인간미의 결정체다. 가족 중 누군가 추위를 잘 탄다면, 내가 당장 찬 바람을 쌔고 싶어도 창문을 닿아 주는 것이 배려다. 그리고 자신은 잠시 바깥에나가서 찬 바람을 맞다가 들어오는 정도의 불편만 감수하면 된다. 얼마나 멋진 배려인가!
감정은 영원하지 않다. 남자는 하룻밤 자고 나면 힘든 감정도 정리되기 일쑤이고, 좀더 섬세하게 창조 된 여자는 길어야 일주일 안에 혼란한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는다. 당신은 종종 “내가 그때왜 그 말을 했지?”라고 하면서 후회한 경험이 있지 않은가? 사람이 후회하는 이유는 자신의 판단이 틀렸기 때문이 아니다. 그저 감정이 수그러들었을 뿐이다. 사람은 평온심을 찾게 되면 상당히 이해심도 넓어지고,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능력이 탁월해진다. 그러므로 지금 당장 자신의 기분을 표출하지 않으면 분이 나서 견디지 못할 것 같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그때 왜 그 말을 했지?”라고 하면서 “이불 킥”을 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 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