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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님에 대해 알기8: 지금도 방언은 존재하는가

성령님에 대해 알기8:지금도 방언은 존재하는가

박영돈 목사

 

    성경적인 방언관을 정립하는 데 가장 큰 거침돌로 작용하는것이 신학적인 전통과 방언에 대한 체험이다. 한편에서는 은사중지론이라는 잣대로 성경을 재단해 버리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경험의 틀에 꿰맞추기 위해 성경을조작해 버린다. 어떤 전제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성경 해석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자신의 해석을 은밀히 주관하는 전제가 무엇인지를 냉철하게 직시해야 하며 그것을 성경을 통해 끊임없이 점검해 보려는 부단한노력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대개 우리가 자라온 신앙적인 배경과 전통 그리고 배워온 신학적인 입장에 따라방언에 대해서 서로 다른 선입견을 갖게 된다. 오순절 교회의 배경을 가진 이들은 거의 예외 없이 방언에 대해긍정적인 반면, 보수적인 신학 교육을 받은 이들은 은사중지론을 따르는 경우가 많다.

 

    필자는 아주 보수적인 교회에서 자랐고 오랫동안 보수 신학을공부하고 가르치고 있다. 필자의 박사 학위 논문을 지도한 교수는 바로 워필드를 뒤이어 은사중지론을 철통같이고수했던 개핀 교수였다. 이런 배경에도 불구하고 은사중지론이 필자를 설득하지는 못했다. 성경에 비춰 볼 때 신빙성이 없다는 사실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다행스럽게도 말씀의 능력이 신학적인전통을 세뇌하는 마력에서부터 필자를 자유하게 한 것이다.

 

    우리는 신학적인 전통이나 경험이라는 전제에 의해 휘둘리기를거부하고 성경 자체가 무엇이라고 말하는지를 들으려는 진진한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 김동수 교수는 방언을 체험하지못한 사람은 영적인 은사인 방언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영적인 일은 자신이꼭 체험해야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영적인 세계, 즉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고 있다. 만약 자신이 체험한 것만 바로 해석할 수 있다면 우리는 성경 말씀을 거의 이해할수 없을 것이다. 성경에 기록된 방언에 대한 말씀을 바로 해석하는 데 꼭 그에 대한 체험이 요구되는 것은아니다. 방언을 체험하는 것이 그 실체를 파악하는 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될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주관에 치우치게 하여 냉철한 판단을 흐리게 할 수도 있다. 반면에 방언을 경험하지못한 이들이 오히려 성경 말씀을 객관적으로 해석하는 균형 감각을 가질 수 도 있다. 하지만 실제적으로 방언체험이 없는 이들은 대부분 방언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에 사로잡히게 된다. 많은 경우 경험뿐 아니라 무경험도 성경 해석에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방언 체험의 유무가 방언데 대한 평가와 일치한다는 말까지나오게 된 것이다. 이제는 이 불행한 연결고리를 끊을 때가 되었다. 그래야만 양극화를 극복하고 방언데 대한 원만한 일치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방언을 하는 이나못하는 이나 자신들의 경험또는 무경험이 성경 해석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성경의 어디에도 방언이 사라졌다는확실한 증거를 발견할 수 없다. 방언은 계시의 방편으로서 성경적인 계시가 종결됨과 더불어 사라졌다는 주장은성경적인 지지 기반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방언은 사람이 하나님께 신비한 언어로 기도하는 것이지,예언처럼 하나님이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 특성상 방언은 계시의통로가 될 수 없다. 방언이 통역된다고 해도 그것은 단순한 기도의 내용일 뿐이지 결코 하나님이 직접 계시하신말씀이 될 수는 없다. 또한 방언이 그쳤다는 말씀을 성경에서 전혀 발견할 수 없다. 온전한 것이 올 때는 방언과 예언도 그친다는 바울의 말(고전13:8-12)을 성경이 완성되면 방언도 그친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은 바울이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신학적인 의미를 주입하는 것이다.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바울이 말한 온전한 것이 올 때는 그 말씀의 문맥과 성경 전체의 맥락에서 볼 때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 너무나도 명백하다.

 

    그러므로 방언이 존재하느냐에 대해서는 더 이상 논란의 여지가 없다. 다만 오늘날 나타나는 방언이라는 현상이 초대교회의방언과 질적으로 동일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다. 먼저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방언은 오늘날 교인들이 하는 방언과는 사뭇 다른 특성을 띠었다. 사도행전2장의 내용을 살펴보면 오순절에 제자들이 했던 방언은 외국어였던 것으로 보인다. 제자들은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각기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고거기 모인 사람들이 각자 자기가 난 지방의 언어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했다. 이로 보건대 오순절에제자들이 체험한 방언은 배우지 않은 언어를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말하는 현상이었다.

 

    이런 유의 방언을 지금도 하는 경우가 있다는 보도를 종종 접한다. 대천덕 신부의 글에 의하면한 청년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몇 개 국어로 유창하게 외국인과 대화를 했다고 한다. 어떤 목사의 부인은 집회에서자신이 전혀 배우지 않은 헬라어로 말할 수 있게 되어 거기에 참석했던 그리스 여성 두 명을 주님께로 인도했다고 증언하였다. 또 선교사들이 선교 현장에서 습득하지 않은 토착어가 갑자기 입에서 터져 나와 설교했다는 말을 간혹 듣게 된다. 하지만 이렇게 배우지 않은 외국어로 전도하거나 설교하는 것이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제자들의방언과 꼭 같은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제자들의 방언이 찬양과 함께 선포의 성격도 띠었다는 점을 부인할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사람들을 향한 설교였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기 때문이다. 여하튼 습득하지 않은 언어를 통해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초자연적인 기사는 오늘날에도 일어날 수 있다고 보아야 한다.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와 비상한 섭리를 우리의 신학적인 편견으로 제한하기보다는 그 가능성을 항상 열어두어야 한다.

 

    그럼에도 그런 외국어 방언은 오순절에 성령을 받은 모든 제자들에게 주어진 것처럼 모든 신자에게 나타나는 보편적인 현상은 아니다.그 방언은 성령이 이 땅에 강림하시는 특별한 이벤트를 장식하는 표적의 성격을 띠었을 뿐 아니라 구원의 복된 소식이 만방에전파될 새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리는 섭리적 표증이라고 볼 수 있다. 동시에 교회가 이 세상을 향하여 선교사역을 출범했다는 것을 알리는 특별한 표증이기도 하다. 그러하기에 오순절 후에도 그런 방언이 보편적인 현상으로반복되었다는 확실한 증거가 성경에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경험하고 있는 방언은 고린도전서에 기록된 방언의 유형에 가깝다. 고린도전서12-14장의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는 이 방언의 특성은 특정한 지방의 언어나 외국어가 아니라 우리의 영이 하나님과 교통하는일종의 신비한 언어라는 점이다. 통역이 없으면 다른 사람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말이다. 방언을 하는 자신도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지 못한다. 그래서 바울은 방언으로만 기도하면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고전14:14)라고하였다. 여기서 마음이라는단어는 심령이 아니라 생각또는 이성을 뜻한다. , 이해하는 마음의 기능을 의미한다. 그래서 방언으로 기도하면 그 기도하는 내용을 자신의 마음이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런 성경적인 증거를 통해 볼 때 이 방언은 우리의 이해와 인식을 초월하여 우리의영이 하나님과 교통하는 신비한 기도의 언어 또는 영의 언어라고 말할 수 있다.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 pp. 172-176발췌

7/24/2015 5:25:00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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