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님에 대해 알기 5: 지금도 기적적인 치유가 일어나는가
박영돈 목사
우리 교회에 치유의 역사가 회복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편견에서 벗어나야 한다. 성경의 기적을 부인하는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을 받은 목사들은 원래부터 기적은 없었다고 보는 반면, 보수주의 신학을 추종하는 목사들은 대개 성경 시대에는 기적이 일어났으나 지금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다고 믿는다. 양측 모두 초자연적인 세계를 부인하는 세속주의 세계관에 직간접적으로 동조하는 셈이다. 이에대응하여 현대의 은사 운동이나 신사도 운동에서는 성경에 기록된 초자연적인 은사와 기적이 지금도 그대로 재현된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첨예하게 대립되는 양극단의 입장 사이에서 교인들은 갈피를 잡기가 어려운 지경이다. 서로다른 입장을 취하는 교회와 교인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갈등이 심화되고 있다. 한편에서는 신비주의나 이단이라고정죄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성령의 자유로운 역사를 훼방하는 자들이라고 맞대응하며 서로를 향해 적의를 표출하고 있다. 지금 우리 교회는 초자연적인 기사로 인해 양분되는 심각한 국면을 맞이 하였다. 어떻게 이 간극을조금이라도 좁혀 갈 수 있을지가 우리 앞에 놓인 중대한 과제다.
성경을 통해 화합해야 하는데 서로가 성경을 충실히 따르고있다고 주장하니 그 길이 요원하기만 하다. 그들의 성경 해석을 은밀히 주관하고 있는 신학적인 편견을 인정하고내려놓지 않는 한 그 일은 불가능하다. 보수 교회는 초자연적인 은사와 기적은 초대교회에만 한정되었다는 신학적인전통에 갇혀 오랫동안 옴짝달싹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고정된 신학의 틀에 맞추어 성경을 해석해 왔다.카이퍼나 워필드 같은 대신학자들의 권위가 실린 이런 견해는 마치 정통의 상징인 양 보수 교회를 지배해 왔다.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자의적이고 성경의 어디에서도 지지를 받지 못한다. 성경의 어느곳에서 초자연적인 은사와 기적이 사라졌다는 말씀이나 증거를 발견할 수 있는가? 초자연적인 은사가 계시나 사도적권위와 연관된 것이기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견해는 성경이 참으로 그렇게 말하는지를 냉철하게 살펴보기보다 오히려 워필드 같은 신학자의 견해를무분별하게 답습한 것이다. 신학적 편견이 우리를 세뇌하는 위력은 실로 엄청나다. 여기에 한번 사로잡히면 자신의 견해가 틀림없이 성경적이라는 확신 속에 성경의 분명한 증거를 보지 못한다. 성령의 분명한 뜻이라는 확고한 판단으로 그분의 선하신 뜻을 거스른다.
그동안 보수 교회는 신학적인 편견과 교만으로 성령의 역사하심과그 능력의 나타남을 심대하게 방해해 온 것이 아닌지를 깊이 자성해야 한다.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고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해 교회에 부여하신 여러가지 은사와 능력을 우리가 부정하여 가르치지 않고 사장시켜 온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한다.이런 은사와 능력의 역동적인 역사가 없이 어떻게 교회가 죄와 사탄의 세력을 제압하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 할 수 있겠는가?현대 은사 운동이 초자연적인 은사에 대한 과도한 집착으로 혼란을 야기한다면, 보수교회는 초자연적인 은사를 깡그리 무시해 버림으로 성령을 소멸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교회의 역사 속에 일어난 극단적인 운동은 항상 기존 교회가소홀했던 측면을 일깨워 주는 긍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우리 교회는 은사 운동에서 나타나는 부정적인 모습을보고 더욱 문을 굳게 닫아버리기보다 오히려 은사의 중요성에 대해 새롭게 눈을 떠야 한다. 초자연적인 은사에집착한 나머지 열매를 무시하는 경향은 배격해야 하지만 열매만을 강조한 채 은사를 평가 절하하는 것도 지양해야 한다. 열매 뿐 아니라 은사도 필요하다. 성령 충만한 교회는 열매와 은사가 모두 풍성한 교회다.
현대 교회에 은상 대한 혼란이 극심하게 된 데는 하나님이그분의 교회를 위해 부여하신 선물들을 모두 사이비와 광신적인 집단에게 맡겨 버린 채 건전한 은사 사역을 등한시해 온 기존 교회에도 일정 부분 책임이있다. 잘못된 은사 운동에 대응하는 더 적극적이고 효과적인 방안은 초자연적인 은사를 모두 부정함으로써 은사추구를 위축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 성장을 위해 건전하게 은사를 활용할 수 있는 성경적인 지침을 제시해 주는 것이다. 치유 집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비판과 정죄로 일관하기보다 성경적인 치유 신학을 정립하고바람직한 치유 사역의 모델을 제시해 주는 것이 더 긍정적으로 문제를 대처하는 방안이다.
지금도 치유의 기적이 일어난다면 그 확실한 성경적인 근거는무엇인가? 신구약 성경에 걸쳐 하나님은 치유하시는 하나님으로 계시되셨다.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여호와 라파’, 즉 “치료하는 여호와”(출15:26)로 소개하셨다.창조주로서 하나님은 인간과 자연이 원래 의도하신 대로 온전한 상태에서 샬롬과 안식을 누리기 원하신다. 죄는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와해시키는 파괴적인 세력으로 나타나며 하나님의 구원은 죄로 훼손된 그분의 작품을 다시 원상태로 복귀하여평안과 안식을 누리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치유는 처음부터 창조의 갱신이며 범죄한 인간을 회복하는 구원사역의 중요한 단면이다. 선지서에는 거듭되는 불순종으로 인해 더 이상 재건의 희망이 없을 정도로 파멸된 이스라엘민족을 다시 회복하신다는 언약이 예언되었다. 이 새 언약의 핵심이 병든 몸과 마음의 치유이며 언약 공동체의회복이다. 그러므로 구약에 부분적으로 실현되었으며 미래에 온전히 성취될 치유는 전인적이며 공동체적인 치유다.
우리는 이런 구약적인 배경을 통해서 예수님의 치유 사역을이해해야 한다. 예수님은 바로 이 구약의 소망을 이루어 주실 분으로 오셨다. 종말에 임할 대대적인 치유와 회복과 구원을 예언한 구약의 언약을 성취하실 메시아로 오신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공적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이사야가 기록한 메시아에 대한 예언(사61:1-2)이 자신에게 성취되었다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자신이 복음을 전하며 병자들을 고치는 것은 바로구약의 선지자들이 대망했던 메시아의 사역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셨다.
공관복음 저자들이 예수님의 병 고침 사역에 많은 지면을할애한 것은 예수님이 바로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이심을 증거하기 위함이다. 유대인들의 빗발치는 비난의 표적이될 것을 뻔히 아시면서 왜 안식일에 병자들을 치유하기를 그토록 고집하셨을까? 여기에는 중대한 의미가 담겨있다. 안식일은 하나님의 온전한 창조를 즐기며 경축하는 날이다. 그러나인간과 피조물의 현재 모습은 하나님이 원래 지으신 온전한 상태가 아니다. 죄로 인해 심히 오염되고 파괴된상태다. 죄와 사망의 세력이 하나님이 지으신 아름다운 창조 세계를 더럽히고 훼손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안식하지 못하시고 그분의 망가진 작품을 고치는 일을 계속하고 계신다. 예수님이병자들을 고치신 것은 하나님이 바로 그 일을 하고 계심을 보여 주시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주님은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5:17)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이 안식일에 병자들을 고치신 것은 병들어 형편없이망가진 인생들을 치유하시어 원상태, 즉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은 모습으로 회복하여 참된 안식과 평안을누리게 한다는 복음의 메시지를 드라마틱하게 천명한 사건이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안식이 회복되는새 창조가 시작되었다는 표증이다. 우리 신자들은 이 새 창조의 첫 열매들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고후5:17)이라고 하였다.
[일그러진 성령의 일굴] pp.101-106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