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님에 대해 알기4: 성령 체험의 삼박자
박영돈 목사
성령운동이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성령 체험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절실하다. 성령을 체험하면 무엇을 체험하게 되는가? 성령 체험의 내용은 무엇인가? 방언이나 예언이나 신비한 현상인가? 그보다 훨씬 본질적인 것은 삼위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연합과 교제다. 성령을 체험하면 삼위 하나님과 함께 나와 너를 체험하게 된다. 곧 하나님과 너와 내가 연합하는 천국 공동체를 체험하는 것이다. 이것이 성령 체험의 삼박자다.
신약성경은 성령의 사역을 묘사할 때 주로 성령 ‘안에’(in)라는 전치사를 사용한다. 성령은 우리가 존재하는 영역과 같은 분이시다. 우리 육체가 공기 속에 존재하며 물고기가 물속에 존재하듯이 그리스도인들은 성령 안에 존재한다. 성령은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공기와도 같은 분이시다. 이것이 성령의 인격이 가지고 계신 독특성이다. 성령은 자신의 인격을 우리가 예수님과 인격적으로 만나 교제하는 만남의 장으로, 영적인 영역으로 제공하신다. 그분은 자신의 인격 안에 우리와 신랑 예수님이 연합하여 교제하는 신방을 차려 주신다.
성령은 우리를 신랑예수님과 교제하게 하는 중재자의 역할을 하시지, 자신이 신랑을 대신하는 역할을 하시지는 않는다. 이 점이 바로 자기를 비우시고 예수님을 드러내시는 성령의 “거룩한 수줍음”인 것이다. 성령은 우리와 예수님과의 사랑의 교제를 맺어 주시고 자신은 뒤로 물러나 그 사랑의 교제를 지켜보며 즐거워하는 신랑의 친구와 같은 역할을 담당하신다. 그러므로 성령을 깊이 체험할수록 우리는 예수님과 깊은 인격적 교제를 누리게 된다. 우리는 성부와 성자 하나님과의 깊은 사랑의 교제를 누리면서 이런 관계를 맺어 주시고 이 모든 사랑의 교제 속에 은밀히 임재해 계신 성령께 깊은 사랑과 감사를 올려드린다.
성령은 우리를 예수님이 누리셨던 아버지와의 깊은연합으로 이끄신다. 곧 성자가 성령 안에서 성부와 누리신 영원한 사랑의 코이노니아 속으로 우리를 끌어들이신다. 성령 안에서 우리는 삼위일체적 연합의 신비 속으로 들어간다. 그래서 성령이 임하시는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14:20)라는 주님의 말씀이 실현된다.
성령을 체험하면 성부와 성자를 체험하는 동시에 나를체험하게 된다. 곧 성령 안에서 새로운 나를 경험한다. 성령으로 충만할 때 자유로워지고 담대해진 나, 사랑과 기쁨과 평안으로 충만하여 행복해진 나, 주님의 형상으로 변화된 나를 체험한다. 우리 영혼은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자율성을 상실했다. 예수님을 잘 믿고 따르며 닮아가야 하지만 우리 안에는 그런 자유의 능력이 없다. 우리는 늘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받고 있지만 그렇게 사랑받는 자로서 하나님께 자유롭게 반응하지 못한다. 은혜에 감사하지도 못하고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지도 못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으로서 그 역할에 항상 신실하시지만 우리는 사랑받는 이로서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따라서 사랑의 관계가 늘 일방 통행이 될 수밖에 없다. 진정한 사랑의 교제가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이 내안에서 은밀하게 도와주시어 하나님께 대한 나의 책임을 다할 수 있게 하신다. 내 안에서 나의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시고 자유롭게 사셔서 예수님을 잘 믿고 닮아가게 하신다. 그런 면에서 성령은 신앙과 영성의 원천이시다. 그러므로 성령을 체험하면 이렇게 새로워진 나를 체험한다. 자유함 가운데 하나님을 섬기며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갈 수 있는 자유로운 주체자로 변화된 나를 체험한다. 성령은 아들의 영이시며 우리를 아들의 형상으로 변화시키신다. 성령은 아름다운 분이시기에 결국 우리를 아름다운 인격자가 되게 하신다. 성령 안에서 우리가 주의 영광을 보니 주의 형상으로 변하여 영광으로 이르게 된다(고후3:18).
성령을 체험함으로 우리는 옛자아의 실현이 아니라 죽음을 체험한다. 옛 자아의 야망이 성취되기보다 좌절되는 쓰라림을 맛본다. 십자가의 은혜는 단순히 우리의 죄를 사할 뿐 아니라 죄의 근원인 옛사람의 생명을 파괴한다. 그 욕심과 야망을 가차 없이 십자가에 못 박는다. 우리의 옛 자아를 죽이는 십자가의 능력을 매일 체험하지 않으면 부활의 능력을 결코 경험 할 수 없다. 성령의 열매를 맺는 새사람으로의 변화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다. 성령의 능력을 누리는 유일한 비결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과하는 것이다. 현대 성령 운동의 문제는 이 죽음의 관문을 거치지 않고 영광과 능력을 갈구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성령 운동은 옛사람의 종교적 야망을 성취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되며 인간의 헛된 영광을 위한 전위대로 전락한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죽음이 성령 운동의 심장부에 자리 잡고 성령체험의 핵심이 되지 않는 한 성령 운동은 심각하게 변질 될 수밖에 없다.
성령을 체험하면 나를체험하는 동시에 또한 너를 체험한다. 인간은 진정한 자아뿐 아니라 타자를 잃어버렸다. 세상에는 오직 내가 이용할 ‘것’으로서의 너만 널려 있을 뿐 진정한 ‘너’는 존재하지 않는다. 지옥이 뒤틀린 관계에서 온다면, 천국은 관계의 회복으로부터 온다. 구원과 하나님 나라의 핵심은 바로 관계의 회복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과 원수 된 것뿐 아니라 인간 서로 간에 원수 된 것을 소멸하였다(엡2:15-18). 성령은 “사이로 가시는 하나님”(Go-between God)이시라는 말이 있듯이 그분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 그리고 우리와 이웃 사이로 가신다. 그래서 우리를 하나님과 교제하게 하시고 또한 형제자매들과도 교제하게 하신다. 천국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이웃과의 관계가 회복된 곳이다. 교회는 천국의 모형이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 공동체다. 그러므로 성령 안에서의 교제는 성령 체험의 핵심 요소다. 성령 체험은 단순히 개인적인 체험이 아니라 공동체적인 체험이다. 성령의 충만한 임재와 역사는 온전한 예배와 교제가 하나로 어우러진 공동체 속에서 체험된다. 이 점을 간과할 때 성령체험은 개인주의와 영적 우월주의에 빠지기 쉽다.
성령은 하나님이 우리를 그분의 걸작품으로 만들어가시는 작업장시다.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빚어가시는 삼위 하나님의 새 창조의 장이시다. 그렇기에 성령 안에 있는 교회는 새 창조의 표징이다. 성령 안에서 인간뿐 아니라 죄로 인해 오염되고 파괴된 온 우주 만물을 원래 지으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던 상태로 회복하시는 삼위 하나님의 우주적 갱신 사역이 역동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성령은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통합하시고(엡1:10) 하나님의 사랑의 임재로 에워싸심으로 우주 만물에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게 되는 종말론적인 비전을 성취하신다(엡1:22-23).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 IVP] pp.79-83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