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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러다임 전환 15: 더디더라도 자라가야 한다

패러다임 전환 15: 더디더라도 자라가야 한다

김태길 목사

 

    내가 아는 사람의 아들은 골프 선수가 되기 위해 홈스쿨링을 하면서 하루 종일 골프를 친다. 미국인과 신체적으로 뒤지지 않기 위해서 매일 줄넘기를 개씩을 한다. 그것도 모자라 매일 우유를 하프 갤런짜리 통씩 거뜬히 마시고, 온갖 크는 좋은 음식을 먹는다. 그러면서 목표를 정하길 185센티미터까지 키를 키울 거란다. 이제 고작 세살인데 덩치가 그야말로 어른 같다. 그리고 최근 1년만에 10센티미터가 넘게 자랐다고 했다. 그래서 벌써 175센티미터이다. 부모의 키가 그리 편이 아니기 때문에, “우월한 유전자 물려받아서 그리 것은 분명 아니다. 앞으로 10센티미터가 자랄 있을지, 성장판 검사를 보니 아직 자랄 있다는 얘기를 듣고서는, 부모가 아이의 키를 목표치 까지 키우기 위해서, 밤마다 키우는 마사지도 시작했다고 했다. 이런 부모의 노력에 보답이라도 하듯 아이는 지금 캘리포니아에서 또래 아이들 최고 수준의 골프 실력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사람의 키도 목표로 정해놓고 노력하면 수가 있다는 데에 놀라울 따름이다. 그러면서 마음 속으로 이런 질문을 보게 된다. “영적 성장도 목표를 정하고 노력하면 있을까?” 나는 가능하다고 믿는다. 다만 혼자서가 아니라 함께하면 된다고 확신한다. 아이가 키가 크는 데는 삼박자가 맞아야 한다. 아빠의 꾸준한 트레이닝과 엄마의 지혜로운 음식조절과 본인의 순종이 있어야 가능하다.

 

    신자가 영적으로 자라는 것도 이와 흡사하다. 영적 아비인 목사의 지속적인 말씀 훈육과 성령님의 도우심과 본인의 순종이 있을 때에야 비로소 성장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영적 자람은 육신의 자람과 다른 면이 있다. 몸은 스무 후까지 쑥쑥 자라다가 성장이 갑자기 어느 멈춘다. 그러나 영적 자람은 성장판이라는 것이 없다. 영적 자람은 나이의 제한을 받지 않는다. 그리고 자람의 끝이 정해져 있지 않다. 이렇게만 생각하면 정말 기분 좋은 얘기다. 그러나 영적 자람에 성장판이 없다 말은 먹는다고 저절로 자라는 것도 아님을 함께 내포한다. 어떤 사람은 10년을 신앙생활을 해도 전혀 자라지 않을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은 1년을 신앙생활을 해도 많이 자랄 있다.

 

    그러면 영적으로 자란다는 것은 어떤 것을 두고 하는 말일까? 그것은 성화를 두고 하는 말이다. 성화의 끝은 육신의 호흡이 멈추는 순간까지 계속 된다. 그런데 성화가 신자의 삶에 나타나지 않을 ,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까? 가지 하나라고 생각한다.

 

     첫째, 성화가 나타나지 않는 신자는, 말씀에 순종할 마음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성화를 무슨 성령께서 독단적으로 이루시는 신비스런 묘약 같은 것으로 여기는 신자가 있을 모르겠다. 그런 순진한 생각을 버려라. 성화는 신자의 인격과 의지를 무시 , 프로그래밍 로봇을 조종하는 기계화의 과정이 아니다. 성화는 인격적인 하나님인 성령님께서 신자의 내면에서 신자의 의지와 결단을 사용하시어 이루시는 오묘한 협동작업의 산물이다. 그러므로 신자는 성령의 말씀에 끊임없이 기울이고 순종해야 한다. 성령님의 작업을 지속적이고 의지적으로 거스르면서 성화가 일어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아이스크림과 (hot tea) 그릇에 넣고, 녹지 않는 차가운 아이스크림과 식지 않는 뜨거운 티를 동시에 먹겠다는 것보다 어리석은 짓이다.

 

내가먹어본 커피 위에 아이스크림을 띄워 것은 하나같이 미지근한 맛이었다. 성경은 분명히 차든지 뜨겁든지 하라고 명령하신다 (3:15). 성령님의 사역과 육신의 거스르는 행위는 윈윈(win-win) 없다. 바울 사도도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귈 있느냐고 반문한다 (고후6:14). 뜨거운 커피는 차가운 아이스크림을 녹이고, 반대로 아이스크림의 기운은 커피의 뜨거움을 삼켜버리듯,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름으로 서로 대적함으로신자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된다(5:17). 신자에게 성화가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과 육체를 동시에 맛보려고 하는 욕망을 내려놓지 못하기 때문이다. 뜨거운 커피를 택하든지, 차가운 아이스크림을 택하든지 하나만 하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든지, 아예 불신자로 살든지 하나만 택하라! 너무 매정한 소리인가? 그런데, 말씀대로 마음이 없으면 그게 신자인가? “아직 믿음이 약하고, 삶이 고달파서 그러하다 언제까지 볼멘소리만 하다가 허송세월을 보낼 것인가

 

   당신의 삶이 이유 없이 불만스럽고 고달픈가? 이유가 어떤 다른 사람이나 환경 때문에 그렇다고 불평하고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당신은 아직 삶이 너무 견딜 없을 정도의 무거운 짐과 치열함을 만나보지 못해서 그런 일거다. 폭풍 앞에 촛불을 들고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등불이 꺼지는지 쳐다 겨를이 없다. 당신의 현재의 문제는 당신 있지 않고, 오히려 당신 있다. 자신의 내면의 비참함을 들여다보고, 여전히 십자가 앞에 내려놓지 못하는 자신의 자아를 발견 하고도, 말씀의 칼날을 자신의 자아에 사정없이 휘두르지 못한다면 나아짐이란 기대할 없다.

 

     둘째, 성화가 나타나지 않는 신자는, 말씀에 순종하려고 애를 쓰긴 하나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더디게 자라기 때문일 있다. 말은 신자에게 희망적인 말이다. 갓난 아기가 아무 말도 못하다가 어느 갑자기 엄마라고 얼마나 경이로운가? 아기가 그렇게 말을 밖으로 뱉어내기까지는 수천 귀로 듣고, 생각하고 입으로 옹알거리다가 나온 결과물이다. 세상에서 가장 영리한 동물이 인간인 치고는 실망스러울 정도 아닌가? 어떻게 단어를 말하는데 그렇게도 많이 듣고도, 그렇게도 더디게, 그것도 정확하지도 않게 발음할 있단 말인가? 성화가 바로 그러하다. 매일 매일 영적 싸움을 하고 이겼다 생각했는데, 다음날엔 여전히 그대로이다. 도무지 영적으로 자라지 않는 같다. 터질 정도로 더디다. 그러나 이것이 성화의 본질에 속하는 것이라고 받아들이자. 성화는 달팽이보다 느린 속도로 계속된다. 그러나 성화의 속도는 조종할 있는 것이 아니다. 성화의 페이스를 유지하고, 계속적으로 자라가게 하시는 주체는 성령하나님이시다. 그래서 말씀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모른다. “바람의 길이 어떠함과 아이 자의 태에서 뼈가 어떻게 자라는 것을 네가 알지 못함 같이 만사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네가 알지 못하느니라” (11:5). 

7/24/2015 5:16:00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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