딤전3장 & 딛1장에 나타난 영적 리더의 자격2
김태길 목사
딤전3:2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딛1:6 … 한 아내의 남편이며
사도바울이 교회 지도자의 자격 중 “한 아내의 남편”을 언급한 것에 대해 여러 가지 해석들이 있다. 첫째, 교회 지도자는 반드시 결혼 한 사람이어야 한다라는 주장이다. 사실 많은 개신교 교단들이 목사후보생에게 목사안수를 받기 전까지 결혼 할 것을 권유한다. 그러나 이것은 권유일 뿐이지 철칙은 아니다. 간혹 어른 목사님들 중에 딤전3:2을 인용하면서, 신학생들은 반드시 결혼을 해야 목사안수를 받을 수 있다고 “엄포”를 놓는 분도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다. 만약 바울이 디모데와 디도에게 편지를 쓰면서 그런 의미로 편지를 썼다면 이것은 아이러니다. 왜냐하면 바울 자신도 독신이며, 디모데와 디도 또한 독신으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들도 해당되지 않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하라고 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또한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썼다: “그러므로 결혼하는 자도 잘하거니와 결혼하지 아니하는자는 더 잘하는 것이니라.”(고전7:38). 결론적으로, 교회 지도자가 반드시 기혼자라야 한다는 주장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다.
둘째, 이혼한 자는 안된다는 주장이다. 진 게츠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불행하게도 이 해석은 이혼을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의 범주에 집어 넣는 반면, 살인한 사람은 여전히 영적인 리더가 될 수 있다고 허용하는 결과가 된다” (직분론, 국제제자훈련원, p. 214). 만약 “한 아내의 남편”의 의미가 이혼과 재혼에 관한 언급이면, 결혼과 상관없이 성적인 타락을 일삼는 사람에 대해서는 왜 언급하지 않는가?
물론교회 지도자가 가정에 충실하지 못하고, 이성관계가 복잡하거나, 이혼을 여러 번 고려하고있다면 그 자격에 대해서 재고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이미 이혼을 겪은 사람 중 “책망할 것이 없는” 신실한 지도자의 자격을 갖춘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어떤 사람의 과거가 그 사람의 지도자의 자격에 발목을 잡는 것이 된다면,기독교의 핵심 진리인 “용서”는 퇴색되어 버리게된다. 그렇게 되면 신약 성경의 반을 차지하는 바울의 가르침 조차 한낱 개과천선한 비도덕적이었던 사람의 궤변이라고 치부해 버린다 해도 할말이 없다. 왜냐하면 바울은 한 때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죽이는 살인마였기 때문이다.
셋째, 일부다처주의자는 안된다는 주장이다. 한 때 이 주장이 제법 지지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바울이 이 편지를 쓸 당시 이미 로마제국은 일부다처제를 금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날 대부분의 국가에서도 이것을 금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해석해서 적용하는 데는 무리가 있다. 물론 교회 지도자를 세울 때 일부다처주의자라도 허용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는, 일말의 여지도 없이 ‘No’이다.
넷째, “한 여자의 남자”여야 한다는 도덕적 기준을 말하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가장 성경의 의도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고대사회나 중세사회나 현대사회 할 것 없이, 남자들에게 있어서 해결되지 않는 죄는 성과 관련된 것이다. 인류 역사에서 남자들의 쾌락을 돋우는 가장 큰 매개체는 술과 여자였다. 남자들은 결혼 바깥에서 수많은 불륜을 저지르면서도 가정만 깨트리지 않으면 된다는 사고를 가지기도 한다. 요새 어떤 정신 나간 부부들은 부부 외 서로의 “은밀한 육체의 파트너”를 가지는 것을 공공연히 인정하면서 산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것이 인간이 누릴 진정한 자유함이라고 말한다. 인간이 도덕이라는 울타리를 넘어서면서 저지르는 모든 것은 자유가 아니라 방종이며 타락이다.
기독교 신앙의 가르침은 육체의 순결과 마음의 순결 두 가지를 동시에 말한다. 육신은 배우자에게만 허락된다고 말하면서, 마음은 딴 데 가 있어도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육신의 행동은 마음의 지배를 받는다. 마음은 순결한데 육신의 행위만 더러운 경우는 없다. 그러므로 육신적으로 깨끗함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의미는 동시에 자신의 마음 또한 정결하도록 애쓴다는 의미이다.
교회지도자는 이성에 대한 깨끗한 정신과 품행을 동시에 갖춘 사람이어야 한다. 교회 지도자는 이성에 대한 가치와 기준이 엄격한 사람이어야 한다. 본인만 죄짓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개인주의자는 교회 지도자의 자격이 없다. 예를 들면, 자신은 외도하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의 외도는 눈감아 주거나 한번쯤은 해도 괜찮다고 동조해 주는 사람은 지도자로서의 자격은 없다. 지도자는 자신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아니라, 타인을 위해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중요한 질문을 해보자. “만약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과거에 옳지 못한 이성편력이나 부정한 관계를 유지했던 경험이 있는 사람도 교회 지도자의 자격이 없는가?” 답부터 말하자면, “꼭 그렇지는 않다.” 본 교회가 속한 교단의 헌법에는 장로의 자격에는 “무흠히 7년을 경과한 자”라고 나온다. “무흠히”라는 단어가 갖는 1차적인 의미는, 교회로부터 권징(견책, 근신, 시무정지, 정직, 면직, 수찬정지, 출교)을 받지 않은 것을 말한다. 그리고 2차적인 의미는 성경이 가르치는 건덕과 품행에 결격되지 않는다라는 말이다. 이와 같이 1차, 2차적인 의미로 7년동안 책망할 것이 없다면 괜찮다는 말이 된다.
최근한국 교계는 이미 교회의 장로가 된(성경은 목사를 ‘가르치는 장로’로 말씀한다) 사람이 성적인 범죄를 저지르고도, 공적인 회개가 없었고, 또한 충분한 자숙의 기간이 없음에도 버젓이 목회를 하고 있는 어떤 목회자로 인해 시끄럽다. 왜 이것이 문제인가? 성경은 회개와 용서를 동시에 말씀한다. 회개가 수반되지 않는 용서는 기독교의 사랑이 아니다. 종종 기독교가 “무조건적인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비성경적인 용서를 남용하면서 교회의 순결성을 스스로 무너뜨리기도 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는 한도 내에서 무한한 사랑이 성립된다. 동시에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에 입각하여 공의가 발휘된다. 그러나 공의와 사랑은 서로 충돌하지 않으면서도 완벽하게 조화된다. 그러므로 어떤 신자가 범죄한 사실이 있음에도 진정한 회개의 표징과 충분한 자숙의 기간이 없이, 교회의 지도자가 되려고 한다면 그것은 교회를 한 신자의 탐욕에 가담시키는 꼴이 되고 말 것이다.
교회의 생명은 거룩성에 있다. 거룩하지 못한 교회가 세상단체와 다르다고 아무리 우겨봤자 하나님도 세상도 그것을 인정해주지 않을 것이다. 교회 지도자의 자질이 교회의 거룩성을 세우기도 하고, 한 순간에 무너뜨리게도 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매의 눈”을 가지고 이에 합당한 지도자의 자격을 심사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나 자신 또한 그런 사람이 되기를 기도하고, 두렵고 떨림으로 매일 매일 하나님 앞에 서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