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러다임전환 12: 함께하는 영적 공동체의 친밀성
김태길 목사
불의를 당한이가 그 억울한 심정을 토로하기라도 하면 잠잠하라고 그의 입을 틀어막는다. 자기를 이해해달라고 하지말고 침묵하는 것이 크리스천의 미덕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상투적인 경건의 용어에 얼마나 타인의 고통에무감각한 매정함이 깃들여 있는지를 모른다. 십자가의 주님처럼 침묵하는 희생양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당신 하나 조용히 희생되면 우리 집단은 조용하고 평화로울 것이라는 뜻이다. 정말그렇게만 된다면 기꺼이 희생양이 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공동체는 모든 것을 감찰하시며공평과 정의를 요구하시는 하나님 앞에 건강한 신앙공동체로서 발전하기는 힘들 것이며, 불의에 예민하신 거룩한성령의 임재를 거스르고 상실하게 될 것이다. [박영돈 교수 페이스북 글 중 발췌]
이 글을 읽는 동안, 나의 맘속에는 롬12장15절의 말씀이 떠 올랐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이것이 함께하는 공동체의 진정한 모습 아닐까? 사람들은 뭔가 거창한 것 만 생각하다가 정작 자신이 속한 현실을 놓치는 경우가 많다. 주님이우리에게 “함께 즐거워하고, 함께 울라”고 명령하실 때에는 먼 나라 먼 민족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 아니다. 가장 일차적으로 자신의가정과 교회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나는 일전에 어떤 교회의 셀 모임 때, 어떤 교우의 자신의 삶을 나눈 얘기가 기억난다.그 교우는 우연히 어느 도시에 사는 한 유학하는 목사님이 겪고 있는 재정적인 어려움을 누군가로부터 듣게 되었다고 했다.그러고는 며칠을 기도하는 중, 마음속에 얼굴도 모르는 그 젊은 목사님을 도와야겠다는불붙는 마음이 생겼다고 했다. 그래서 자신도 넉넉하진 않지만 수 천불의 돈을 학비에 보태 쓰라고,보냈다는 아름다운 얘기였다. 그 교우가 삶을 나눌 때 그 음성에는 어떠한 교만도찾아 볼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그 얘기를 듣고 있으면서, 나의 마음 한 켠에는 왠지 모를 씁쓸함이 밀려왔었다. 이유는 “거창함”은 있는데, “현실성(Sitzim Leben)”이 결여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 교우가 그 삶을 나누는 셀의 현장에는 한 명의 유학목사와 한 명의 담임목사가 그 얘기를 듣고 있었다. 그런데, 그 한 명의 유학목사 역시 재정적인 어려움과 학기 등록금을 걱정하며 어렵게 살아가는형편이었고, 뿐만 아니라, 그 교우의 담임목회자는 몇 달 째,교회재정이 없어서 사례비를 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 교우는 자신이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타 주에 사는 얼굴도 모르는 그 유학목사를 돕도록 하는맘을 주셨다고 하면서 자신의 한주간 삶을 털어 놓는 그 교우의 음성에는 “거창한 하나님의 나라”는 있었지만, 셀 공동체 안의 “소박한 하나님의 나라”는 없었다. 차라리 그 얘기를 그 셀모임에서 꺼내 놓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을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가까이 있는 사람을 돌아보지 않고 멀리 있는 생면부지의 사람을 도왔기 때문에, 그 교우에게뭔가 문제가 있다라는 주장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나는 셀 공동체의 친밀성에 대해서 말하고 싶은 거다.셀 모임을 하면, 우리는 셀 멤버들의 어려운 형편과 힘든 속사정, 그리고 기도제목을 나누고 듣는다. 매주 그것을 한다. 그런데 “거짓된 친밀성”으로 가장한 셀은 셀 모임 시간에는굉장히 뜨겁고 진지하다가도, 그 시간만 지나버리면 다 잊어버리고, 한주간 내내 자신의 “사정”에만 몰두한다. 그것이 매주 반복된다. 그러면서 셀 가족이 겪고 있는 아픔을 한쪽귀로 듣고 한쪽귀로 흘려 버리는현상 또한 반복된다. 그러면서 셀은 점점 “모임을 위한 셀”로 전락한다. 셀은 모임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셀은 그냥 가족이다. 가족을 만나면서 무슨 “거창한 하나님의나라”와 “대사명” 같은 것 운운하면서만나는 사람이 어디 있나? 그냥 사랑하고 좋으니까 가족인 것이다. 거기에는그 어떤 체면 치레나 가식이나 숨김이 없다. 그냥 이유 없이 아낌없이 마음을 나누고, 가진 것을 베푼다. 그 어떤 부모형제가 서로 생일 축하 선물을 서로 주고 받으면서,“하나님께서 그런 열정을 주셨다”고 말하겠나? 그런데 오늘날 교회 안에는 그런 이상한 개념이 자연스럽게 존재한다. 셀이 무슨 하나님의 대단한일들을 해내기 위한 복음공동체이며, 대사명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셀은 그저 “함께하는 영적 공동체”가 되면 된다.그러면 굳이 “복음의 사명”같은 것 구호처럼외치지 않아도, 그 셀은 이미 새생명이 탄생하는 생명공동체로 자연스레 성장해 있을 것이다. 셀은 사명으로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함께 하며, 진심으로 사랑하는 가족애로 감당하는 것이다. 그렇게 만 된다면, 예수님이 삶의 정황(Sitz im Leben)을 통해 제자들에게 가르치셨던 모든 가르침이 우리의삶의 자리에서도 셀을 통하여 꽃피우고 열매 맺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