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19:창조4
김태길 목사
4장1항: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 하나님은 영원한 능력, 지혜, 선하심의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해서, 태초에, 무로부터,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 보이는 것이든지 혹은 보이지 않는 것이든지, 6일 동안에 창조하시기를 기뻐하셨다. 그리고 모든 것이 심히 좋았다.
선하심의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해서
헤르만 바빙크는 말하길, “왜 사물들이 존재하며 그와 같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는 하나님이 그렇게 원했다는 것 말고 다른 더 깊은 답변은 없다.”(개혁교의학2, 부흥과개혁사,p. 540)라고 했다. ““왜 하나님이 그렇게 원했는가?”라고 묻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보다 더 큰 어떤 것을 묻는 것이다. 하지만 더 큰 것을 찾을 수는 없다.””(어거스틴, DeGenesi contra Manichaeos libri duo). 창조의 이유가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지 않으면 안될 정도의 필요나 요구가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하나님은 자신이 머무실 어떤 장소가 필요해서 이 세상을 지으신 것이 아니다. 솔로몬은 “저 하늘, 저 하늘 위의 하늘이라도 주님을 모시기에 부족하다” (왕상8:27,새번역)라고 했다. 하나님은 뭔가 부족하여 어떤 도움이나 놀 거리가 필요해서 이 세상을 만드신 것 또한 아니다. 그는 오히려 모든 것에 풍성하셔서 피조세계에 자신의 풍성함으로 채워주신다 (빌4:19).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대해서 질문을 받을 때, 가장 현명한 대답은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광이 뭐냐고 묻는다면 대답하기 쉽지 않다. 구약성경은 카보드( כָּ֫ב֥וֹד )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표현했다. 카보드는 성경에서 무거움, 위대함, 풍부함, 빽빽함이라는 의미로 쓰였다. 이 단어가 신약성경에서는독사(δόξα)라는 단어로 사용되었는데 구약의 카보드와 동일한 뜻을지닌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영광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의미를 크게 두 가지 양상으로 설명한다: 1)내적인 것—탁월함(excellency), 귀중함(greatvaluableness),고결함(dignity), 가치 있음(worthiness), 경의(regard), 2)내적인 영광의 외적 발산—빛의 광선의 발산으로 말미암는 광채(effulgence), 밝게 빛남(shiningbrightness). (The Works of President Edwards, Jonathan Edwards, pp. 247-248). 에드워즈는 이것을 한마디로 이렇게 표현한다: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내적 영광과 충만의 참된 외적 표현이요 발산이다 (The glory of God is the emanation and true external expression of God’s internal glory and fulness).
앞서 에드워즈가 밝힌 영광을 설명하는 단어들—탁월함, 귀중함, 고결함, 가치 있음, 경의, 광채, 밝게 빛남—은 하나님의 참 선(good)을 말한다. 영광은 선의 풍성함이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다. 그 선의 밝음이 세상 어느 것과 비길수 없을 정도로 빛날 뿐 아니라(요일1:5) 그 광채가 절대 멈추지않는다 (유1:25). 이런 하나님의 내적, 외적 선의 상태가 완전하게 그리고 무한히 지속되는 것을 영광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창조의 이유는 하나님의 선하심이다.
하나님은 창조를 통하여 자신의 선하심과 영광을 무한히 드러내신다 (사43:7). 창조는 하나님의 선하신 영광을 위하여 된것이다 (골1:16). 하나님이 선하시다면 그 목적 또한 선할 수 밖에 없다. 그 선하심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 자신의 영광 외에는 없다. 그 외는 다 부수적인 것들이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하셔서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말한다. 틀린말은 아니나 그것이 궁극적인 목적이 될 순 없다. 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사람을 복 주시기 위해서 창조하셨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 또한 창조의 궁극적 목적이 아니다. 단지 이차적 목적일 뿐이다.
어떤 사람이 행복해지기를 원한다고 하자. 그 사람은 행복의 길이 결혼이라고 생각하여 신부감을 구한다. 그런데 신부감을 구하려니 돈이 필요하다. 또한 돈을 마련하려니 직업이 필요하다. 그리고 직장에들어가려니 기술이 필요하다. 기술을 배우려면 직업학교를 가야 한다. 이때 이 사람의 궁극적인 목적은 행복이지, 결혼이 아니다. 그리고 2차적인 목적인 결혼을 위해서 돈을 버는 것 또한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라 3차 목적이 된다. 이 돈을 벌기 위해서 4차 목적인 직업학교를 선택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가장 궁극적이고 1차적인 목적은 “행복”이며 나머지 모든 목적은 부수적인 것이 된다. 달리 말하면, 직업학교, 돈, 결혼은 그 사람에게 행복을 최종적으로 가져다 줄 “중간목적”들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 중에는 하나님의 사랑,거룩, 지식을 사람들에게 나타내시기 위함도 있다. 또한 하나님의 구속의 사역들을 나타내시기 위함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선하신 영광보다 결코 앞서지 못한다. 하나님의 선하신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창조의 궁극적 목적이며, 그 외의 것들은 다 부수적인 목적일 뿐이다.
이처럼 창조의 목적이 하나님의 선하신 영광 때문이라면, 인생은 매 순간순간이 그 선하신 목적을 위해 달려가기 위해 존재한다고 하면 틀림이 없다. 그러므로 소교리문답의 제1문, “사람의 제일된 목적은 무엇인가?”에 대해, 모든 개인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라고 서슴없이 답해야 하며, 또한 그렇게 살아야한다. 당신의 숨쉬는 소리조차 하나님께 영광이 될 수 있다면 그러길 위해서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