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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러다임 전환 9: 내 삶을 빚어 가는 섬김 공동체

패러다임 전환9: 내 삶을 빚어 가는 섬김 공동체

김태길 목사

 

    나의 고등학교 시절은 영적 공동체가 뭔지 맛볼 수 있었던나의 신앙여정의 중요한 한 단편이다. 나는 그 시절 부모님 곁을 떠나 유학을 했고, 그것이 자연스레교회를 더 의지하게 된 계기였던 것 같다. 그때 나에게가장 중요했던 것은, 외로움을 극복하는 것이었다. 그 외로움을 극복하게 해 주었던 것은, 교회의 예배도 프로그램도 아니었다. 그냥 교회에 우두커니 앉아 있을 때, 사람들이 나에게 말을 건네고 관심을 가져 주는 것이었다.

 

    16살 시골뜨기가 소도시에 혼자 공부하러 나온 것이, 어떤 면에서는 강한 생활력을 기를 수 있는의미 있는 시간이라고 생각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그 당시 나에겐, 많은 것들이 헝클어져 있던 혼돈의 시간이었다. 공부도, 시간관리도, 미래의 계획도, 신앙을 잃지 않기 위한 몸부림도모두 나 혼자 지고 가야 했다. 객지 생활 첫 주일을 맞이해서, 학교에등교를 하라고 하는 말도 안 되는 규정과 홀로 싸워야 했으며, 그 처절한 싸움에서 승리사실은 내놓은 자식처럼 여겨진 것이지만할 때쯤에는 혼자 신앙생활을 할 교회를 찾아야 하는또 다른 도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하숙 하던 집에서 담 하나를 두고 교회가 있었다. 마침 눈에 보이는 교회가 그곳 밖에는없어서, 어색하고 쑥스런 맘을 누르고서 대범한 척 하며, 주일 오전예배에첫 발을 디뎠던 그날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예배 후 사람들은 어디론가 줄줄이 예배당을 빠져나갔다.아마도 교회식당 쪽으로 이동하는 것 같았다. 그때 나의 맘에 들었던 간절한 생각은,누구 한 사람이라도 나에게 식사하러 가자고 말을 건넸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그 간절한 맘이 낙담으로 끝나버리려는 순간, 한 젊은 남자 집사님이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오늘 처음 오셨죠?” “…전 학생인데요….” “그래? 그럼 같이 식사하러 가자.” 나는 그때까지 자라면서 밥 먹자는 소리가 그렇게 아름답게 들리기는처음이었다. 나는 그날 먹었던 메뉴가 뭔지 전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국 하나 김치 하나였던 것 같다. 그런데 그날의 점심이 짧은 그 때까지의 인생 중 가장 소중한식사로 기억된다. 그 이유는 밥을 한 끼 해결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처음 보는 나에게 건넸던 그 집사님의 말이 너무 따뜻했었기 때문이었다. 그 음성에는 어떤 가식이나의무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맛있는 엘에이 갈비에 양념이 잘 베어져 있듯이, 그저 주의 사랑이 그 집사님의 행동과 말에 베어져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교회가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고 좋은 곳이라는 것을 느꼈다. 나는 고등학교 3년 동안 주말이면, 그 집사님의 집과 가게에 안방 드나들듯이 했다. 나에게 있어서 그 집사님 집은, 혼자 객지생활을 하는 어린 나에게 외로움을 잊게 해 주는 안식처였고,사막의 샘이었다. 그 분의 이름은 조상률 집사님이다. 그분은 아마도 지금 나이가 60세쯤 되셨을 거다. 고등학교졸업 후 20대때 몇 번씩 찾아 뵌 후로는 거의 20년 가까이 뵙질못했다. 그러나 나의 맘 한구석엔 그분의 얼굴이 늘 자상한 모습으로 새겨져 있다. 그분이 처음 나에게 친절을 베풀어서 만은 아니다. 그 집사님은 그 교회를 출석하던3년간 모든 사람에게 한결같았다. 그분은 그 조그만 교회에 천사와 같은 분이었다.

 

    내가 어른이 되어서야 든 생각은, 그 집사님은 그 당시 고작 30대 초반의 신혼이었고, 아이도 이제 걸음마를 떼고 있었으며, 하시던 가게는 이제 막 시작하여 자리도 잡지 못한 상태였다라는 것이다. 나는 사람들이 흔히들내 뱉는, “앞으로 기반이 좀 잡히면 좋은 일도 하고, 도우면서 살겠다는 식의 포부를 종종 듣곤 한다. 그러나 적어도 조상률 집사님은 책임도 지지 못할 말을 내뱉으면서자신을 포장하거나, 마치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소명인양 떠들어 대면서도 실천 한번 하지 못하는 사람들과는사뭇 다른 사람이었다. 다만 지금 현재의 형편이 어떠하든지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사람들을 섬겼다. 그 조그마한 섬김이 외롭고 힘든 10대 청소년 김태길을 빚어갔다. 김태길은 그때 결심했다. 나의 형편이 어떠하든지 고향을 떠나 이제 막 객지생활을 하는 모든 사람을 외면하지 않을 것이라고. 그리고 난 미국에 온지 석 달이 채 되지 않았을 때부터, 방 두 칸 중 하나를 내어주고 나그네들을 맞기 시작했고, 지금까지 거의8년이 지나도록 그것은 나의 삶의 일부가 되었다.

 

    나는 교회당에 처음 와서 앉아 있는 사람을 보노라면, 그가 얼마나 큰 용기를 내고 그랬는지짐작이 간다. 그리고 그가 맘속으로 계속 되뇌는 말은, “…제발 누가나를 따뜻한 말 한마디로 아는 척 좀 해주었으면…”일 것이다.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10: 42).

7/24/2015 5:12:00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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