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선(僞善)에 대하여
김현회목사
마태복음 23장에는 주님이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질타 하시는 내용이 담겨있다.주님은 인간의 연약함을 아셨고 죄인들을 긍휼히 여기셨지만(물론 그렇다고 죄를 허용하신적은 없다), 위선에 대해서는 가혹하다 싶으리만치 준엄하게 책망하셨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했던 자들로서 백성들로부터 존경받는 자들이었는데 주님으로부터는 “화 있을진저”라는 거의 저주에 가까운책망을 들어야 했다. 주님은 위선을 가장 미워하셨다. 그렇다면 제자의길을 가고자 하는 우리로서는 무엇보다도 위선의 문제를 심각하게 다루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주님은우리에게도 “외식하는 자들이여”라고 분노하실 것이다. 위선의 문제를 좀 더 분명히 이해하기 위해서 바리새인들과는다른 모습의 위선자를 한번 생각해보자.
서양에서 위선자로 알려진 대표적인 인물은 프랑스의 희곡작가 몰리에르의 <타르튀프(Tartuffe)>라는 작품에 나오는 주인공이다. 타르튀프는 경건을 가장하여 한 부자에게 접근해서 자신의 욕망을채우려 했던 자다. 그는 가장 종교적으로 헌신되어 있으며 믿음이좋은 사람인양 행세했지만 실상은 전혀 믿음이 없었던 사람이었다. 이 희곡의 영향으로 프랑스에서는“타르튀프”가 위선자와 동의어로 쓰이게 되었다. 하지만 타르튀프는 주님이 책망하신 바리새인들과는 많이 다르다. 타르튀프는 자신이 가짜라는 것을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지만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실제로 경건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들이라고 생각했다. 타르튀프의 위선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 거짓을 꾸미고 가장 했던 것이라면 바리새인들의 위선은 자신들이 겉으로 드러낸 모습과 또 실제그러리라고 생각했던 자화상이 그들의 실상과 달랐던 것이다. 이 둘은 엄연히 다르다. 타르튀프의 경우는 위선보다는 사기에 더 가깝다. 우리는 그와 같이 남을 의도적으로 속이려 하지않기 때문에 자신은 위선자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쉽다. 바리새인들의 위선이 더 심각하고 교묘한 것은 바로 이러한자기기만의 현상 때문이다.
이 둘을 좀 더 비교해보자. 먼저 그들은 목적이 달랐다. 둘 다 선하고 종교적인 것처럼 보이기 원했지만 타르튀프에게는 명예가아니라 돈과 출세가 목적이었던 반면 바리새인들에게는 그러한 명예(남들의 칭찬) 자체가 목적이었다. 둘째, 타르튀프는 꿈에도 자신이 선한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없었고, 또 그러기를바라지도 않았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선하다고 믿었고 선을 추구한다고 생각했다. 이 두 가지 면을 비교해보면 타르튀프와 바리새인들의 차이가 잘 드러난다. 목적에 있어서 한쪽은선과 명예를 추구했다면 다른 쪽은 선과 명예는 수단일 뿐 그를 통해 돈과 성공을 추구했다. 고의성에 있어서한 쪽은 의도적으로 남을 속였고 그 자신이 남을 속이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았던 반면, 다른 쪽은 자신들이그렇다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타르튀프가 남을 속이는 사기성 위선자였다면 바리새인들은 남을 속이기 전에스스로 속았던 자기기만성 위선자들이었다.
위선이란 무엇인가? 겉과 속이 다른 것이다. 겉으로 드러난선한 모습과 그 내면적 실상이 다른 것이다. 단지 다를 뿐 아니라 속이는 것이다. 타르튀프는 남을 속였지만 바리새인들은 남을 속이기에 앞서 자신들부터 속였다는 것이 차이다. 타르튀프와 바리새인들 중 어느 쪽이 더 나쁜가는 지금 우리의 관심이 아니다. 어느 쪽이 더우리가 빠지기 쉬운 함정이고 벗어나기 힘든 문제인가를 따진다면 당연히 바리새인들 쪽이다. 자기기만의 문제는그 만큼 힘들고 교묘하기 때문이다.
왜 우리가 자기기만성 위선에 빠지게 되는가?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바르게 살고 싶어 한다. 거듭난 자라면 이런 소원이 있는것은 당연하다. 우리는 이렇듯 선한 소원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 자신이 선하다고 생각한다.하지만 이와 동시에 우리는 우리 안의 육신(죄성)으로 인해 끊임없이 자기사랑의 유혹을 받고 있다. 이 유혹에 넘어가면 하나님과 선을 추구하려던목적이 슬며시 자기추구로 변질된다. 바로 이때 자기기 만의 현상이 발생한다. 우리는 실제로는 우리 자신의 이기적이고 자기 중 심적인 성향을 좇아 행하면서도 그러한 자신의 실상을 직면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을위한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자기합리화를 통해 그 뒤에 숨는다. 이 합리화야말로 자기기만이요 위선이다.속으로는 자기 욕심을 좇아 살면서도 겉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척 하는 것이다. 때로 그 차이를 느끼지만 그 의식을 억눌러버리고 자신에게조차 정직하지 못한 것이 우리의 실상이다. 하지만 거듭난 사람들, 성령님을 그 안에 모신 사람들은 이런 상태에 오래 머물 수 없다.성령님께서 끊임없이 그 점을 지적 해 주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은 속일수 있지만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은 속일 수 없다. 성령님은 아프게 우리의 마음을 찌르시고 우리의 실상을드러내신다. 거듭난 사람은 그 마음이 죄와 거짓에서 벗어 난 사람이다. 그렇기에 죄를 회개하고 위선을 자각하게 되는 것이다. 성령님이 우리 마음에 오시면 우리는 비로소진실을 알게 된다. 그 첫 걸음은 자신의 위선을 깨닫는 것이다. 위선에서벗어나는 길은 성령님으로만 가능하다. 구원은 참으로 진실해 지는 것이다. 주님은 위선을 책망하실 뿐 아니라 위선에서 벗어나게 해 주시는 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