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러다임 전환8: “아프다”고 말할 수 있는 영적 공동체
김태길 목사
나는 한국에서 있을 때, 시골 부모님 댁에 갈 때면 늘 하는 일이 있는데, 어머니의 어깨를 주물러 드리는 일이었다.시골 아낙들의 어깨는 삶의 고단함을 보여주는 달갑지 않은 훈장과 같다. 내가 효자라서어깨를 20분씩 주물러 드리는 것이 아니었다. 평생 반려자인 당신의 남편에게서 그런 다정다감한 손길을 받아본적이 없어서, 대신 장성한 아들에게서라도 인생의 무게로 짓눌린 마음을 위로 받고 싶은 보상심리 때문인지,유독 내가 시골에 갈 때마다 어깨가 아프시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시작한 것이었다. 그런데 사실 돌이켜보면 나의 중학교 시절에도 어머니는 거의 매일 밤만 되면, “아이고 어깨야”라고 하셨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나는 그 당시 어머니의 어깨보다는 아버지의 다리를 주물러드렸던 기억 밖엔 없다. 아버지는 매일 밤 9시만 되면,뉴스를 틀어놓으시고, 눈만 TV에 고정 하신채 방바닥에 누우셔서, 형과 나에게 한 다리씩 내어주시고, 주무르라고하셨다. 집안의 “제왕”의 다리가“황후”의 어깨쯤은 거들떠도 안 보게 할 정도로 그 당시엔 중요했던걸까? 뒤늦게 깨닫고, 스스로 어머니의 어깨를 주물러 드리고 싶은 밤이와도 이제 태평양 너머 별들을 바라보며 그렇게 해 드리지 못하는 송구한 맘으로 눈물 흘릴 뿐이다.
나도 아버지처럼 별수 없는 “경상도 사나이”인지, 아내가 한번씩 아프다고 하면,늘 듣던 소리라 예사로 듣고 흘린다. 그러다가 정말 심하게 아파서 아무것도 하지못하는 지경에 이르면 그제서야 하는 말이 있다. “언제부터 그렇게 아팠소?” 그러면 당장 돌아오는 말은, “며칠 전부터 계속 아팠다고 말했는데 못 들었어요?”
나는 나 자신이 늘 다른 사람의 말에 제법 귀를 잘 기울이고,세심하게 기억해 주는 사람으로 스스로 생각해 오다가도, 아내의 그런 말을 들으면내가 정말 무심한 사람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사실 가족만큼 자신의 연약함을 그대로 내 놓고,그대로 받아 줄 수 있는 공동체가 이세상에 또 있을까? 그런데 등잔 밑이 어둡다는말처럼, 종종 가족의 아픔이 뉴스에 등장하는 생면부지의 사람의 사건사고보다 더 쉽게 들리고,또 쉽게 잊혀지기도 한다.
교회가 가족공동체라고 그러지 않나? 그렇다면 교회 안의 소그룹 공동체인 셀 안에서 일어나야 할 두 가지 관계의 법칙이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은 드러내고, 타인은 숨겨주자.
이 말은 자신을 자랑하라는 말이 아니다.자신의 속을 다 가감 없이 드러내어 나누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타인이 자신의 속을다 드러냈을 땐, 반드시 그 사람을 보호해주고 덮어주자는 의미이다.
래리 크랩은 조언한다. “우리의 공동체에게, 영적 친구에게, 영적 지도자에게 우리가얼마나 비참한 지경에 있는지를 인정해야 하며, 의식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숨김없이 누군가에게 말할 수 있어야한다.”
아플 때 아프다고 말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얼마나 복인가? 그런데 그 아픔을 정말 진심으로 듣고 같이 아파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게 작은 천국아닐까?
나는 이번 주간에 작은 딸아이가 열 감기가 좀 있었다.그런데 늘상 걸리는 감기 때 마다 나타나는 이 아이만의 특별한 사랑을 요구하는 방식이 있다. 평소에 잘 들어주지 않는 것을, 몸이 아플 때 요구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평소 잘 사주지 않는 햄버거 같은 것을 사달라고 하는 것이다. 이번 주에도 어김없이 사무실에 있는 나에게 전화를 걸어, 다짜고짜로 인앤아웃 햄버거가 먹고싶다고 했다. 나는 이렇게 회유했다. “아플 때는 된장국을 먹어야 빨리나아!” 그러고는 얼른 전화를 끊었다. 나중에 아이 엄마에게 얘기를들어보니, 딸아이가 나의 전화를 끊고 나서 방안에 들어가 침대에 얼굴을 파묻고서 울더라는 것이었다.5살도 아니고, 5학년짜리가 햄버거 안 사준다고 펑펑 운다는 게 이해가 되나?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내가 아빠로서 무심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아이가 정작 먹고 싶었던 것은, 햄버거라기 보다는 가족의 사랑이었던 거다. 이 아이의 울음은 가족이 어떤 아픔 속에 있을 때,정말 귀를 기울이고 뭐라고 “외치고” 있는지들어보라는 자기만의 메시지였던 것이다. 결국 그날은 인앤아웃보다 더 맛있는 브레아 수제 햄버거를 사 주는것으로 “사건”을 일단락 지었다. 그리고 문득 야고보 사도의 충고가 떠 올랐다.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 날 먹을 것조차 없는데, 여러분 가운데서 누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하게 하고, 배부르게 먹으십시오”하면서, 말만 하고 몸에 필요한 것들을 주지 않는다고 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믿음에 행함이 따르지 않으면, 그 자체만으로는 죽은 것입니다” (약2:15-17, 새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