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16: 창조1
김태길 목사
4장1항: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 하나님은 영원한 능력, 지혜,선하심의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해서, 태초에, 무로부터,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 보이는 것이든지 혹은 보이지 않는 것이든지, 6일 동안에 창조하시기를 기뻐하셨다. 그리고 모든 것이 심히 좋았다.
“베레쉬트 바라 엘로힘 에트 하샤마임 뵈에트 하아레쯔”(창1:1). 필자가 신학교 다닐 때 외워야 했던 히브리어 성경구절 중 여전히 기억하고 있는 유일한 것이다. 성경을 원어로 읽고 외울때면, 영원 전부터 감추어진 하나님의 비밀을 시각적으로 또한 청각적으로 느끼게 해 주는 것 같은 신비로움이 있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므로(딤3:16), 인간 기록자의 단어선택과 배열, 문법과 문장의 배열, 문학장르의 선택이 결코 인간의 산물이 아닌 하나님의 의도가 담겨져 있는 신적 작품이기 때문이다.
성경이 신적 작품이 맞다면, 성경의 맨 첫 구절이 “베레쉬트”라는 단어로 된 것은 결코 우연일 수 없다. 사실 “태초에”라는 뜻의 이 단어는 해석하는이의 관점에 따라 의미가 크게 달라진다. 자유주의 해석가들은이 히브리어 단어에 정관사가 붙지 않았기 때문에, In the beginning이 아니라 In beginning of…라고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가 아니라 “천지를 창조했을 때, 땅은 혼돈하고 공허하였다”라고 해석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들이 주장하는 요점이 뭔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을 때, 이미 물질계가 존재했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고 있던 물질을 이용해 만들었다는 주장인 셈이다.
그러나 “베레쉬트”라는 단어는 정관사의 있고 없음에 그 의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뒤에 따라 나오는 동사 “바라”에 의해 그 의미가 분명해 진다. “만들다”라는 뜻을 가진 이 단어가 성경에서 사용 될 때 만큼은, 주어가 항상 “하나님”이었다. 이 단어는 적어도 특별한 신적 사역을 나타내기 위한 저자의 의도가 숨어 있는 것이다.
성경에는 “바라”와 같은 뜻을 가진 낱말이 적어도 5개 이상 등장한다. 그런데 “바라”외에 쓰여진 “만들다”라는 뜻의 단어의 주어는 하나님과 사람 양쪽 모두 사용되었다. 또한 “바라”가 사용된 문장은 어떤 기존 물질도 등장하지 않지만, 다른 비슷한 뜻의 동사들이 사용될 때에는 반드시 기존 물질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면,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창2:7)에서 “지으시고”는 “바라”가 아닌 “야찰”이라는 동사가 쓰였다. 하나님은 이미 자신이 “바라”하신(창1:1) 땅의 흙을 다시 사용하셔서 사람을 “야찰”하셨다는 뜻이다. 그런데 성경은 사람을 만든 과정을 방법론적으로 보여줄 때에는 “야찰”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지만, 결국 그 재료(흙)또한 하나님의 창조물이므로 창1:27은 “바라”라는 단어를 세 번이나 사용하면서 사람을 지으셨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창세기를기록할 때에, 동사 하나를 선택하는 것에도 이토록 세심하게 신경 쓰신 이유가 뭘까? 무에서의 창조를 강조하기 위함이다. 이에 대해 박종칠 교수는 그의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세가 하나님의 영감으로 이 “바라” 동사를 특별히 골랐다고 보는 것은 그 당시 고대 근동에는 이 동사를 쓴 경우가 없기 때문입니다. “바라”는 기존 물질에서 창조하는 의미가 아니고 무에서의 창조를 의미하는 동사입니다. (구원의 길이 시작되다, 생명의말씀사,p. 64).
히11:3은 하나님의 창조 사역이 어떠했음을 확증해 준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밑줄 친 부분의 좀 더 정확한 뜻을살펴보자. “…so that what is seen was not made out of things which are visible” (NASB). 이것을 직역하면 이렇다. “보여지는 것이 볼 수 있는 것들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이 문장을 다시 긍정문으로 바꿔 보자. “보여지는 것은 볼 수 없는 것들로 만들어졌다.” 이것은 철학적인 말이 아니다. 이 세상 창조의 재료가 그렇다는 말이다.
그럼 왜 이토록 무(無)에서의 창조가 중요할까? 하나님은 물질을 만드신 분이면서, 동시에 우주 역사를 시작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만약 하나님의 창조 이전에 이미 물질계가 존재했다면, 이미 “만물의 시작”도 있었음을 뜻한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만물의 창조주도 역사의 주인도 될 수 없게 된다.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만 존재하셨다고 증언한다(시90:2). 또한 창1:1의 세 번째 단어인 “엘로힘(하나님)”도 정관사 없이 고유명사처럼 사용한 것은 “베레쉬트 바라(태초에 창조하시다)”에 가장 적합한 단어로 조합한 신적 언어임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이 존재하기 전부터 이미 스스로 계셨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원하신 계획과 작정에 따라 우주 공간을 만드시고, 또한 우주가 정해진 규칙에 의해서 움직이도록 물리법칙을 부여하셨다. 그와 동시에 자연계의 시간이 생겨났고 역사는 흐르기 시작했다. 우주 공간 안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과 법칙들은 “처음 순간”이 있었다. 만약 우주의 “처음 순간”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우주가 영원 전부터 스스로 존재하는 신이라고 믿는 사람이된다. 만약 우주의 “처음 순간”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만든 주체는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여전히 우주가 스스로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이 되므로 자기 모순에 이르게 된다.
빅뱅(Big Bang)은 가장 보편적으로 알려진 우주 기원에 대한 이론이다. 그런데 빅뱅이론이 말하는 것이 뭔가? 어느 날 알 수 없는 대폭발이 있었고, 그것이 우주의 시작이라고 말한다. 빅뱅 이론을 믿고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은 우주의 “처음 순간”이 있었다고 인정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면 그 “처음순간”의 에너지는 도대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가? 물리학 및 화학에서, 어떤 에너지를 만들려고 할 때 어떻게 하는가? 우선 에너지원(energy resources)이 있어야 한다. 화석원료를 사용하든지 아니면 태양이나 바람, 물 같은 자연의 힘을 이용해야만 한다. 그러면 우주를 만들 만큼의 대폭발의 그 에너지원은 어떻게 만들 수 있는가? 설혹 빅뱅 이론이 사실이라고 치더라도, 그 빅뱅을 일으킬 수 있는 힘의 “처음 순간”은 언제인가? 만약 그 에너지원이 영원 전부터 본래 존재했다고 말하게 되면, 결국 우주 기원은 “알 수 없는 에너지신(an unknown god, Energy)”으로부터 출발한다고 주장하는 셈이다. 그러면 바울이 아테네에 전도하러 갔을 때, 그곳 사람들이 섬겼던 “알지 못하는 신(행17:23)”과 “우주 기원의 신(an unknown god, Energy)”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
사도 바울은 무지한 그 아테네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행17:24-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