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14: 하나님의 작정7
김태길 목사
3장7항: 그 밖의 인류들에 관해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대로 자비를 베풀기도 하시고 거두기도 하시는 그 자신의 뜻의 헤아릴 수 없는 계획에 따라서,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 능력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은 그들을 간과하시고 그들의 죄로인한 치욕과 진노에로 작정하시기를 기뻐하셨다. 이는 하나님이 영광스런 공의를 찬미하기 위해서이다.
언젠가 인터넷에서 “세종대왕, 이순신 장군을 만나려면 지옥 가야 되는 거죠?”라는 질문을 본적이 있다. 쉬운 문제가 아니다. 사람들은김일성 부자와 이순신 장군이 같은 지옥방을 쓰고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상상하지 못한다. “이순신 장군 같은 훌륭한 삶을 살다간 사람들이 복음을 받을 기회가 없었다면, 그들은 지금 천국에 있는가? 아니면 지옥에 있는가?”에 대한 논쟁은 현재진행형이다.
김세윤 박사는 이순신 같은 사람들은 “일반계시와 일반은총의 범주 안에서 생각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이 어떻게 판정하실지는 모르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보수주의 진영의 많은 사람들은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4:12)는 말씀을 절대 잣대로 삼고, 신약시대의 하나님의 구원의 주권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나타난다라고 주장한다. 필자는 이 글에서 이순신 장군이 지금 천국과 지옥 중 어디에 있는지를 해설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신앙고백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대로 자비를 베풀기도 하시고 거두기도 하시는 그 자신의 뜻에 헤아릴 수 없는 계획에 따라서” 행하신다고 말한다. 이 말씀은 성경이 “이중 예정”을 가르치고 있다는 뜻이다. 구원에 이르도록 예정(엡1:4-5)하신 것과 멸망에 이르도록 예정(롬9:18)하신 것은 둘 다 하나님의 작정이라는 의미에서 “이중 예정”이 된다. 그러나 이 두 예정 사이에는 구원의 방법이라는 차원에서 서로 다르다.
구원에 이르도록 예정되었다는 의미는 3장6항에서도 명시한 것처럼, 구원에 이르는 모든 방법(구원의 서정)까지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주셨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구원의 시작과 과정과 끝은 하나님께서 주도적이고 적극적으로 개입하신다. 반면 멸망에 이르도록 예정하신다는 의미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하나님이 멸망에 이르는 방법, 이를테면 “멸망의 서정”같은 것을 주시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혹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유기자들—단어 자체가 의미를 품고 있듯이, 멸망에 이르도록 하나님께서 내버려 두신자들—의 마음에 새로운 악을 창조하시거나 그들의 마음을 불러일으켜서 죄악과 멸망의 길을 가도록 악령을 주도적으로 개입시키거나 부추기지 않는다. 만약 하나님이 구원의 서정에 성령의 역사를 주도적으로 개입하시듯이, 유기자들도 멸망의 길로 가도록 그들의 마음에 악령을 창조하신다면, 하나님은 죄의 창시자라 불려도뭐라 할말이 없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멸망에 이르는 사람들을 예정하시되 그들이 더욱 죄악에 머물도록주도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저 “간과”(롬1:24,26,28)하시며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보류”(출33:19)하신다.
예정은 구원과 멸망에 이를 자 양쪽 다를 하나님이 정하신다는의미이다. 이것은 판결의 문제이다. 우주의 재판관은 하나님 한 분이시다.검사나 변호사는 아무리 뛰어난 법률가적 지식과 능력이 있어도 판결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이 없는 것 처럼, 마귀는 제 아무리 공중권세를 호령하는 무시무시한 지배력을 가지고 있다 한들, “지옥의유죄”를 선언할 어떠한 권한도 가지고 있지 않다. 또한 죄인 자신도천국 또는 지옥에 가도록 자신 스스로를 판결할 수 없다. 만약 구원과 유기에 관하여 하나님 외에 다른 재판관이 또 있다고 하면 하루에도 몇 번씩 우리의 영혼 구원에 관한 판결이 뒤 바뀌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재판관으로서의 권위는 사라질 것이며, 구원의 은혜는 하나님이 베푸시는 것이 아닌 “개인의 선택과 마귀의 긍휼”이 항상 변수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만이 의로우신 재판장(딤후4:8)이 되신다.
하늘의 의로우신 재판장은 사랑과 공의를 동시에 세운다.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는 둘 다 선하다. 공의에 대한 사람들이 갖는 오해는 종종 하나님의 판결에 대한 불만에서부터 비롯된다. “하나님이 선하시다면 어떻게 지옥 같은 곳을 만들고, 사람을 그곳에 보낼 수 있나?”라는 질문을 한다. 그런데 만약 당신은 일급 살인을 저지른 사람을 무죄라고 판결하는 판사가 있다면, 어떻게 말한텐가? “그 판사 양반 정말 선하구먼”이라고 말한텐가? 그 판사가 정말 “선한 판결”을 내렸다는 말을 듣기 위해서는, 일급 살인죄에 해당되는 유죄 판결과 형량을 선고해야만 한다. 판사는 마땅히 내려야 할 판결을 내릴 때 비로소 “선한 판사”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죄악에 대해서 유죄 판결을 내리고, 철저히 응징하심으로 의로우신 재판장의 권위를 스스로 세우시며, 또한 자신이 선한 하나님 되심을 보여준다.
하나님이 선하신 이유의 극치가 무엇인가? 온 인류가 받아야 마땅한 유죄판결을 자신의 독생자에게 돌린 사실이다. 인류는 멸망의 길로 달려가다가 가까스로 건짐을 받은 하나님 사랑의 수혜자가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를 대신하여 형벌을 받으심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공의를 빛나게 하셨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은 자신의 사랑도 잃지 않으시고, 공의도 지키셨다.
하나님의 예정은 사랑과 공의를 동시에 세우시는 신적 신비가 담겨진 구원의 밑그림이다. 사랑으로 구원받을 자를 창세전에 선택을 하신 분이, 동시에 공의로 멸망에 이를 자를 선택하셔야 하는 것은 옳은 이치다. 다만 구원받을 자를 구원에이르게 하시는 것은 구원의 서정을 통한 하나님의 “적극적인 개입”으로되는 것이며, 멸망에 이를 유기자들은 하나님의 “내 버려 두심”으로 인한 “소극적 개입”으로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기자들은 하나님을 향하여 불의하다고 말할 수 없다.
마치 농부가 병든 사과를 살리려고 할 때 사과들이 농부에게 불평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병든 나무의 모든 사과는 내버려두면 다 썩은 사과만 낼 것이다. 그리고 그 사과들의 결국은 불구덩이에서 태움을 받는 것 뿐이다. 그러나 농부가 병든 사과나무의 사과 중 열 개만 살리기로 작정하여, “적극적으로 개입”한다.병든 사과에게 직접 치료 주사를 놓기로 한 것이다. 그러고는 벌레가 들지 못하도록특수 방충옷을 그 열 개의 사과에만 씌운다. 그리고 수시로 그 열 개의 사과에게 영양제를 주입한다.그 선택받은 열 개의 사과는 하루에도 몇 번씩 주인의 관심과 사랑을 받는다. 그러나“그 밖의 사과들”은 주인의 관심에서 내버려 둠을 당하게 된다. 왜냐하면 병들어서 썩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주인은 썩어가는 사과를 살릴 수도,그대로 내버려 둘 수도 있는 권한이 있다. 그러나 주인은 썩어가는 사과가 더 잘 썩도록 특수 주사를 놓지는 않는다. 그냥 유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죽어가는 사과들은 주인을 향하여 왜 우리를 썩게 하느냐?고 따져 물을 수 없다. 주인은 자신들을 썩게 한 적이 없다. 그러나 건짐을 받은 열 개의 사과들은 주인의 은혜의 수혜자가 되어 의의 옷을 입게 되었으므로, 영광과 감사를 그 주인에게 돌려야 하는 것은 지당하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빌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