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러다임 전환 3: 지식적 제자도 vs 삶의 제자도
김태길 목사
나는 오래 전부터 예수님의 12제자를 선택하신 것에 대해서 많은 의문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중에 가장 이해 하기 힘든 부분은, 왜 하필 12명이었는지?에 대한 의문이다. 혹자들은 12명이 12지파를 뜻한다고도 하고, 12라는 숫자가 하나님이 가장 즐겨 사용하는 완전숫자라고도 하면서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신학적으로 근거없는 주장은 아니다. 그러나 나의 의문은 신학적인 답을 듣고 싶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교육학적, 경제학적 논리로 묻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스승으로서의 능력이 단지 12명을 감당할 정도밖에 안되었을까? 하버드 대학교의 교수 1인당 학생수가 9명이란다. 숫자 논리로 보면, 예수님의 능력은 하버드대의 교수 1인과 비슷한 능력을 가진 것 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생산성이라는 잣대로 예수님을 보면, 오늘날 대학교수의 능력에 훨씬 못미치는 스승이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고작 3년 밖에 가르치지 않았고 그것도 단 한번 제자를 배출한 것이 다다. 학교로 따지면 1회 졸업생만 배출하고 문을 닫은 셈이다. 그러나 오늘날 대학교수를 보라. 적어도 4년을 가르치며, 그들은 평생 수백, 수천명의 제자를 배출한다. 혹 자신의 학문성을 인정받거나, 책을 한권 집필해서 베스트 셀러라도 되면, 강의실에서 가르치지 않았을 뿐이지, 그의 제자들이 수천이 아니라, 수백만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예수님을 보라. 그는 책 한권이 아니라, 편지 한장 남기지 않았다. 일반적인 잣대로 보면, 예수님은 스승이라고 명함을 내밀기 민망할 정도다. 예수님이 오늘날 대학에서 그런식으로 교편을 잡았더라면, 연구논문 미달은 말할 것도 없고 학생들의 교수평가지에 낙제점을 받아 재임용에서 탈락했을 것이 뻔하다. 빌 클린턴 같이 도덕적으로 치명적인 결함을 가진 사람도, 퇴임후 12년간 책을 집필하고, 대학과 기업, 사회 단체에서 강연을 통해 1억불 이상을 벌었단다. 한때 세상 왕도 저렇게 베스트 작가가 되어 영향력을 주는데, 성경이 "만왕의 왕, 만주의 주"(계 19:16; 17:14, 딤전 6:15)라고 소개하는 예수님은 자신이 집필한 베스트 셀러 하나도 없다것이 납득이 되는가?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지금 22억의 사람들이 세계 곳곳에서 그의 "제자"라고 하면서, 매주 예배를 드린단다. 세상에 이런 아이러니가 또 있겠는가? 도대체 예수님의 제자삼는 사역에는 무슨 비결이 있었던 걸까? 그 비결을 연구한 학위 논문만 해도 수천편은 족히 넘을 것이며, 책도 셀 수 없을 정도다. 그런데, 나는 단지 그 비결을 "삶의 제자도"라는 말로 표현하고 싶다.
부처가 죽어갈 때, 제자들이 물었다고 한다. "스승님, 어떻게 하면 스승님을 잘 기억할 수 있을까요?" 부처는,
"나를 기억할 게 아니라, 나의 가르침만 기억하면 된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전의 가르침을 기억하는가?
"이를(성찬)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눅 22:19).
불교의 제자도와 기독교의 제자도가 완전히 다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예수님의 제자삼는 사역의 핵심 커리큘럼은, 잘 정리된 자신의 연구논문이나 책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 자신"이라고 강조한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요한 사도는 그의 책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라고 표현한다. 예수님의 가르침의 본질은, "또 하나의 진리(a truth)"가 아니라, "단 하나뿐인 진리 그 자체 (the truthHimself)"시다. 말하자면 "예수님=말씀=진리"이다.
이제 조금 분명해지는 것 같다. 예수님은 자신이 진리자체시기에 이것을 "교실 수업"으로만 전수 할 수 없다는 것을 아셨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여러분이 지금 같이 살고 있는 배우자를 처음 만났을 때, 여러분은 상대방에게 세상에서 하나뿐인 자신을 어떻게 알렸는가? 그리고 상대방을 어떻게 깊이 알게 되었나? 설마 커피숖에 마주보고 앉아서, "나는 김치찌개를 좋아하며, CS 루이스의 책을 즐겨 읽으며,비오는 날 카페에 앉아 에스프레소를 즐기며, 한달에 한번씩 꼭 등산을 하며.... 좋아하는 영화는..bla bla.."라는 설명을 듣고, 이 사람은 "나의 반쪽"이라고 확신했는가? 김치찌개 않좋아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런식의 설명이 배우자가 될 사람의 마음을 쥐어 흔들게 할 수 있을까? 절대 그럴 순 없다. 아마도 여러분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순 없지만,"겪어 보니" 내 남자, 내 여자라는 것을 가슴으로 느꼈을 것이다. 나는 지금 혼전 동거라도 해봐야 상대를 제대로 알 수 있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제자도는 "겪어 보게 하는 제자도"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은 꿀을 한번도 먹어보지 못한 사람에게, 꿀맛을 정확하게 소개할 자신이 있는가? 백마디 말보다 손가락에 그냥 꿀을 찍어서 입속에 넣어주면 그만이다. 만약 예수님이 그 꿀이라고 대입시켜보라. 예수님이 자신은 얼마나 달콤한 분인가를 책으로 쓴들, 천마디 말로 명강의를 한들 어찌 그 달콤함의 깊이와 넓이를 알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을 알리는 방법을 "교실 수업"으로 하시지 않고, 단지 "겪어" 보게 하셨다. 예수님의 제자도는 이런 의미에서 "삶의 제자도"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결코 대량생산의 방식으로 배출될 수 없음을 아셨다. 대신 예수님은 또 다른 "작은 예수"를 만들기 위해서는 예수님 자신을 "겪어"보게 하는 것이 최고의 교수방법인 것을 아셨다. 그렉 옥던은 말한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 속에서 자신의 삶을 연장하심으로써, 더 많은 예수께서 이 땅 위을 돌아다닐 수 있도록 만드셨다."
여러분은 지금 이미 제자인가? 그러면 여러분은 예수님을 "겪은" 사람일게다.
여러분은 지금 제자가 될려고 하는가? 그러면 여러분은 예수님을 반드시 "겪어"야만 한다.
여러분은 지금 제자에 관심이 없는가? 그러면 여러분은 예수님을 "겪어"볼 관심이 없는 것이다.
여러분은 지금 제자가 되길 거부하는가? 그러면 여러분은 예수님 만나기를 거부하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