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0월 18일(예레미야 26장 16-24절)
예레미야가 목숨을 연명하게 됩니다. 때로는 사명을 지키며 고난을 받는 것 보다 일찍 하나님 편에 가는 것이 더 나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바울도 그렇게 고백했습니다. “ 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22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23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24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빌립보서 1장)
이 세상에서 살고 죽는 것은 다 하나님의 손 아래 있습니다. 살아서 남은 사명이 있다면 사는 것입니다.
멸망을 선포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수종 들었던 예레미야의 목숨은 바람 앞에 등불과 같았습니다. “16 고관들과 모든 백성이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에게 이르되 이 사람이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말하였으니 죽일 만한 이유가 없느니라(렘 26장 16절)”
하나님의 말씀하심 앞에 진지했던 백성들과 몇몇 지도자들의 신중한 변론으로 예레미야는 살게 됩니다(24절).
예레미아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을 통해, 신앙 서적을 통해, 설교를 통해, 환경을 통해,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내적 증거를 통해, 공동체를 통해, 역사적 사건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듣는 귀가 열려 있어야 합니다. 간절히 사모하는 자는 깨닫게 됩니다.
[시119:81]나의 영혼이 주의 구원을 사모하기에 피곤하오나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나이다.
[시119:123]내 눈이 주의 구원과 주의 의로운 말씀을 사모하기에 피곤하니이다.
예레미야에게는 더욱 흘려야 할 눈물이 남아 있었습니다. 사명이 있었습니다. 예레미야의 목숨을 건 순종을 통해 회개하고 재앙에서 벗어난 자가 있었을 것입니다(19절). 한 영혼을 살린다면 우리가 순종을 통해 받는 멸시와 해로움은 영광스러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