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나눔
2018년 9월 1일(로마서 1장 1-17절)

(질그릇 묵상) 로마서 1장 1-17절

부르심이라는 단어가 반복됩니다. 

“1절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6절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 7절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

바울도 부르심을 받았고 로마교회의 성도들도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서로가 만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마음을 나누고 생각을 나누고 믿음을 나눕니다. 축복을 나눕니다. 한 가지 이유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문화, 언어, 지식, 교육, 나이, 출신성분 어느 것도 동일한 것이 없는 다양함이 실재하였지만 그것을 뛰어 넘어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어 합니다. 그러한 바울의 마음은 이렇게 표현됩니다.

“ 7절 하반절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9절 ...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10 어떻게 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11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 12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13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수많은 다른 점들이 있었고, 서로 전혀 무관심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서로의 상황이었습니다만, 시간과 공간의 장벽을 뛰어넘을 열정을 바울이 품게 됩니다.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바울 자신만이 아니라 로마교회의 성도도 부르심 받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단 하나의 공통점이 이렇게 만듭니다.

우리를 부르는 사람들도 많고 조직도 많습니다. 어떤 부르심은 아주 영광스럽기도 하고, 어떤 부르심은 아주 위험하기도 하고.. 정말 다양한 부르심이 우리의 삶, 사회생활, 가정 생활 등등에 존재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조금 묘합니다. 바울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14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15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왜 자신을 빚진 자라고 하는 것일까요? 무관심해도 됩니다. 너무 멀리 있는 사람들이니까요.. 자신에게 익숙한 문화와 지역과 문화를 벗어나 사는 집단입니다. 기존의 1,2,3 차 전도여행에서 목숨을 걸고 최선을 다해 섬긴 가운데 구축한 관계들과는 조금 다른 또 다른 이질적 집단을 향합니다. 

복음이 그렇게 만듭니다. 바울은 복음을 이렇게 정리합니다.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한 미국 목사님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현재 미국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무관심’이라고 말했습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깨달음이 나를 이끄는 곳과 관계는 무엇입니까?

왜 내가 그러한 부르심이 초대하는 관계와 행동들에 이르지 못하게 되는 것일까요?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장애물들은 무엇입니까?

내가 묵상하고 고백할 수 있는 나의 복음은 어떤 복음인지 나의 말로 정리해 보았으면 합니다. 

9/1/2018 6:06:00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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