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나눔
소교리 31, 32 : 하나님의 부르심 Ⅱ(딤후1:9, 롬8:30, 눅14:16-24, 2017년10월1일)

소교리31,32 : 하나님의 부르심 Ⅱ(딤후1:9, 8:30, 14:16-24, 2017101)

     오늘 본문 눅 14장은 이 부르심에 대해서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마련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초청합니다. 이것을 16절에서 기록합니다. 그리고 이어17절에서 잔치 시간이 되어 종들을 보내어 초청대상자들에게 잔치 준비가 되었다고 2차 초청을 합니다. 근동지역 고대사회가 잔치 초청을 어떤 식으로 하는지 보여줍니다.미리 1차 초청을 하고, 실제 잔칫날이 되면1차 대상자들에게 2차로 다시 초청을 하는 방식입니다.잔치를 베푸는 주인은 할 수 있는 도리를 다했다는 의미라고 봐 집니다. 그런데1, 2차에 걸쳐서 초청한 대상자들이 하나같이 잔치에 못 가겠다고 합니다. 그 이유가아주 궁색합니다. 밭을 사고, 소를 사고, 장가를 가서 가정을 돌봐야 된다는 식의 이유였습니다. 보고를 받은 주인은 화가 났습니다.그래서 종들에게 다시 지시합니다.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지체 장애자들을 데려오라!”종들이 그렇게 합니다. 그런데 여전히 자리가다 차지 않고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주인은 세 번째 지시를 합니다. “길과 산울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한 때 한국교회가 이 본문을 가지고, “전도 대잔치총동원전도주일이니 하면서,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교회를 채우라는 것이 마치 주님의 명령인 것처럼 설교하고가르치는 데 사용했습니다심지어 어떤교회들은 23, “길과 산울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내 집을 채우라!”는 말씀을 그대로 옮겨다가 배너로 만들어서, 교회당에1년 내도록 붙여놓고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어떤 교회는 “…내 집을 채우라“…내 교회를 채우라는 것으로 바꾸어서 배너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매주 출석해서 그 배너를 보는 교인들이마음에 부담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전도하면 못하면 주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사람처럼 기가 죽고,교회에 사람들을 많이 데리고 와서 등록시키는 사람은 무슨 주님의 명령을 충성 되이 지키는 사람들처럼 떠 받들고,심지어 금반지를 교회가 시상하고, TV, 세탁기, 냉장고를 주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시상대에 오르는 사람들은 영적 자존감이 충만하고,자기 의에 빠져 영적으로 상대적 우월주의라는 자기만족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반대로그러지 못한 사람들은 상대적 열등감으로 마치 주님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 불손하고 열정 없는 사람들로 인식돼야만 했습니다. 이것이 우리 한국교회의 자화상이며, 시대상입니다.

    그러나 이 본문은 전도 방법론이나 교회 성장에 관한 어떤의도도 없습니다.

    이 본문은 부르심에 관한 것입니다. 본문 16, 17절에 청하였다라는 단어가 헬라어 원어로 칼레오(καλω)”입니다. 이것은 부르다라는 뜻이라고 저번 시간에 말씀 드린 바 있습니다. 이것을 개역, 개역개정성경에서는 청하다라고 번역했고,새번역 성경에서는 초대하다로 번역했습니다.이렇게 볼 때 예수님은 칼레오라는 단어를쓰심으로 이 비유에서 부르심을 말씀하려 했던 것입니다.

    이 본문에는 저번 시간에 말씀 드린 외적 부르심과 효력있는부르심 두 가지가 다 나타납니다. 주인이 초청 하려던 1차 대상자들은하나같이 다 그 초청을 거절합니다. 이것은 외적 부르심, 복음이라는외적 부르심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신약 성경은 굉장히 많은 곳에서 복음을 거부하거나 또는복음을 받았다가 배교하는 것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23:37). 여기에서 분명히 예수님은 자녀들을 불러 모아 품으려고하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너희가 원하지아니하였도다.”라고 하면서 사실상 예수님의 부르심이 거절 당했다고 표현합니다. 복음이 거부당한 것입니다. 6:4-6은 심지어 복음을받았다가도 배교한 이들에 대해서 표현합니다.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이 본문을 보면 거의 참 신자가 경험하는 경험들을 비슷하게 합니다. 적어도 5가지의 참 신자의 표지를 말합니다. 1. 한번 비췸을 얻고, 2.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3.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4.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5.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이것은 거듭난 신자들에게서 나타나는 전형적인 특징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타락하고 배교했다고성경은 기록합니다. 뭘 말할까요? 구원을 받았다가 다시 잃어버렸다는말일까요? 아닙니다. 이것은 외적 부르심을 스스로 취하고,또 나중에는 다시 버렸다는 말입니다. 말하자면 성령님은 이런 사람에게 효력 있는부르심의 사역을 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더 핑크(Arthur Pink)는 이를 두고 고상한 말로, “성령님의 이중 사역이라고말했습니다. 성령님은 택한 백성이 아니지만 외적인 부르심으로 만으로도 부르시고, 또한 택한 백성을 효력 있게도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외적으로만 부르시는 사람은 마치그가 거듭난 사람의 표지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는 여전히 껍데기 뿐인 신자일 뿐, 참 거듭난 신자는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타락해서 궁극적으로 배교합니다.

    이 두 본문이 뭘 말할까요? “하나님의 은혜는 언제든지 거부당할 수 있다또는 구원을받았지만 나중에라도 언제든지 그 은혜를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얻었던 구원도 잃어버릴 수 있다?”를 말씀하는 것일까요? 절대 아닙니다. 우리는 여기에서복음하나님의 은혜를 반드시 구분해야 합니다. 복음은 도구입니다. 그러나은혜는 본질입니다. 도구는 얼마든지 거부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질은거부당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외적 부르심인 복음은 도구 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거부당할 수 있습니다.그러나 성령님께서 효력있는 부르심으로 역사하는 것은 은혜의 역사이므로, 절대 거부당하지않습니다. 반드시 효력이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들(23:37, 6:4-6)이 말씀하는 것은,복음이라는 외적 부르심에 대한 반응입니다. 외적 부르심은 언제든지 거부 당할 수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만약 선택된 사람들을 효력있는 부르심으로부르시기로 역사하시면 절대 그들은 거부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칼빈의 후예들은, “Irresistible grace”—불가항력적인 은혜, 거부할 수 없는 은혜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사실 칼빈은 “Inward calling”—내적으로 부르심이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그래서 이후개혁 신학가들은, “불가항력적인 은혜라는 말보다는, “내적 부르심, 또는 효력있는 부르심이라고 부르는 것을더 선호했습니다.

    성령님께서 한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기 위해서 부르신다면,그것은 그야말로 거부 할 수 없는 강권적인 역사이기에 절대 거부될 수 없고, 반드시 거듭나며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오늘 본문의 2차와 3차에 부르심을 받은 대상자들은 주인이종들에게 데려오라” “강권하여 데려오라고 명령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저항할 수 없는 내적이고 효력있는 사역인지를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의 거듭나게 하시는 부르심은, 개인의상태나 의지와는 전혀 무관합니다. 심지어 개인의 확신같은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자신을 구원 받은사람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엄격히 말하면 구원은 인간의 확신이 있다고 받는 것이 아닙니다.오히려 확신은 거듭난 사람에게 따라 오는 부산물입니다. 그리고 그 확신의 정도는사람마다 각각 다르게,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납니다. 어떤 사람은 강한확신으로 믿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마치 바람 앞에 촛불처럼 위태롭고 흔들리는 약한 확신으로 믿습니다.성령님은 분명히 한 사람을 거듭나게 하실 때, 믿음의 확신도 더해 주십니다.그러나 강한 확신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참 거듭난 신자의 표지는 아닙니다. 또한 확신이 약하다고 해서 참 거듭난 신자가 아니라고도 말할 수 없습니다. 개인의 확신을 구원의근거나 표지의 필수 전제로 삼으면 안됩니다. 잘 못된 전제는 진리를 왜곡시킵니다.

     누군가새는 날개가 있어서 날수 있다. 그래서 날개가있는 모든 새는 난다.”라고 말하면 틀린 말입니다. 타조는 날개가 있어도못나는 새입니다. 그리고 이런 명제도 있습니다. “새는 난다.그러므로 나는 생명체는 다 새다.” 전제가 잘 못 되었습니다. 박쥐는 조류가 아닙니다. 포유류입니다. 그런데 납니다.펭귄은 날지 못합니다. 그런데 펭귄은 조류입니다. 박쥐는 새끼를 낳아 젖을 먹이고, 펭귄은 알을 낳고 젖을 먹이지 않습니다. 전제가 잘 못되면 진리가 왜곡됩니다.

    만약 어미새가 새끼 새들에게 묻습니다. “너희들은 날 수 있다고 확신하니?” 첫째 새끼가 그럽니다. “엄마 나는 날 수 있다고 확신해요그러면 어미새가 그래 장하다 내 새끼야, 너가 날수 있다고 확신하는 걸 보면 확실 내 새끼고,정말 새구나.” 그런데 둘째 새끼가 그럽니다. “엄마 나는 날 수 없을 것 같아요. 확신이 없어요” “아니 이 녀석이 너 확신이 그렇게 없니? 그러면 너는 이제부터 내 새끼가 아니다.새도 아니고, 그냥 강아지다.” 이것은 전제가잘 못된 것입니다. “확신이 그 정체성을 규정하는잘 못된 전제입니다.잘못된 전제가 가짜를 진짜로 둔갑시키고, 진짜를 가짜로 전락시켜버린다면 그것은 큰일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 하늘을 날 수 있는 모든 생물은 새다.”라고 말한다면 전제 자체가 잘 못 되었습니다.이게 바른 전제가 되려면, 하나를 더 첨가해야 합니다. “하늘을 날 수 있고 또한 알을 낳는 모든 생물은 새다.”이것은 전제가 맞습니다.

    기독교 교회 내에 구원에 관하여 아주 잘 못된 전제가하나 있습니다. “구원의 확신이 있으면 다 거듭난 사람이다.”라고 하는전제입니다. 틀렸습니다. 여기에 하나의 전제가 더 붙어야 합니다.“구원의 확신을 가진 사람 중 성령님의 효력있는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다 거듭난 사람이다.”기독교 신앙은 구원의 확신이 있으면 무조건 거듭난사람이라고 확증 짓지 않습니다. 왜요? “구원의 확신이 굉장히 주관적이고, 자귀적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강한 확신이 거듭남의 표지일 수는없습니다.

    어떤 기독교 교회와 교단에서는 집요하게,개인의 구원의 확신을 반복해서 묻고, 확인해서 신자를 압박하기도 합니다.그래서 마치 한 개인이 구원의 확신이 없으면 구원 받지 못했고, 반대로 구원의 확신이 있으면 구원 받은 사람이다.”라는 것을 공식처럼 가르치고 요구합니다.그러나 성경은 구원의 확신문제에 대해서거의 언급하지 않습니다. 물론 바울 서신서 중에 확신이라는 단어가 여러 번 등장하기는 합니다. 그래서 개혁교회 전통은 구원 서정에 확신을 반드시 가르칩니다. 그러나 이 확신의 단계가어디에 놓여 있는지를 보세요. 부르심거듭남회심연합칭의양자성화그리고 확신이 있습니다. 무슨 말일까요? 확신이 우리의 거듭남에 정체성에 아무런 영향을 못 준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확신은 성화의 과정에서나타나는 길고 긴 과정입니다.

     그러나 효력있는 부르심을 받은 참 거듭난 신자에게 반드시 나타나는 표지가 있습니다. 자신의죄인됨에 관한 인식입니다.“자신의 비참함을 보는 표지입니다.자신이 이루 말할 수 없는 죄인 임을 자각합니다. 이전에 느끼지 못했던 자신의 완악하고쓸모 없는 존재임을 봅니다. 그것은 일시적 감정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효력있는 부르심이 시작된 순간부터 평생토록 지속됩니다. 그래서 죄에 대한 지각이 더 예민해지고더 깊어집니다. 그래서 더욱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아니면 안 된다는 강한 확신에 사로 잡힙니다.청교도 신학자, John Flavel [죄에대한 직관적 지식]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그러고는 이렇게 설명합니다.“살아서 으르렁 거리는 사자와 벽에 그림으로 그려져 있는 사자처럼 두 종류의 지식이완전히 다르듯이, 효력있는 부르심을 받은 참 신자는 자신의 죄에 대한 지식이 직관적이며 구체적이라서 마치살아 있는 사자가 으르렁 거리는 것처럼 분명하게 인식할 수 밖에 없습니다.

    선택 받은 사람에게 성령님의 효력 있는 부르심이 시작된사람은, 마치 사자가 으르렁 거리면서 자신의 죄악상을 보게 하고 그 자신의 죄악 앞에서 벌벌 떨게 합니다.그러고는 이대로 있다가는 지옥 불에 떨어져 영원히 멸망할 것 같은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그러고는 자신의 상태로는 도무지 용서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리스도의십자가의 용서의 은혜가 물밀듯이 밀려옵니다. 대속의 은혜, 대속의 사랑이전인격적으로 부어집니다. 성령님은 이미 죄인 가운데 들어오셔서 이런 마음을 주심과 동시에 즉시 거듭나게 하십니다.그리고 회심하고 그리스도와 연합합니다. 그리고 그는 거듭남과 회심 중간쯤 어느 논리적시점에서 참된 믿음을 선물로 받게 됩니다. 이런 성령님의 강권적이고 유효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반드시 거듭나고,구원에 이릅니다.

    오늘 본문 주인의 잔치에 2, 3차로 부름을 받은 사람들을 보세요. 2차 대상자들에게는주인이 그들을 데려오라(21) 명령합니다. 그리고 3차 대상자들에게는 강도가 더 세집니다. “강권하여 데려다가”(23)라고 명령합니다. 이것은 1차 대상자들과 완전한 대조를 이룹니다. 1차 대상자들은 그저 청함을 받은대규모 대상자들입니다. 그러나2차와 3차 대상자들은 택함을 받은소규모 대상자들입니다. 이것을 두고 마22장본문에서는, “청함을 받는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22:14)라고 표현했습니다.

    우리는 강권하여라는 단어를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마치 성령님께서 강압적으로우리를 다루시고, 기계적으로 거듭나게 하시는 분으로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성령님은 인격적이십니다. 여기서 강권하여라는 것은 확실성을 대변하는 단어입니다.성령님이 효력 있게 부르시면 절대 실패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칼빈의 5대 교리 중에 불가항력적 은혜라는 단어에서 약간의 위압감이 느껴져서인지, 개혁신학가들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교리 문답에서, 대신 효력있는 부르심이라는 단어로 표현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로 구원받습니다.그 구속의 은혜는 선택된 사람들에게 주십니다. 그리고 시간이 되면 그들을 반드시거듭나도록 성령님께서 부르십니다. 그 부르심은 이름을 부르는 음성이 아닙니다. 어떤 실제적인 사건도 아닙니다. 성령님의 부르심은 선택된 사람들에게 실제 구원이 실행되는 첫출발지점입니다. 우리는 우리 내면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눈치채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마치 바람처럼 임하시기 때문입니다(3:8). 그러나 우리 가운데는 어느 새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3:5)으로 혁신이 일어났습니다. 이 혁신은 멈추지 않습니다. 그리고 실패하지 않습니다. 또한 우리가 지킬 수 있다거나 우리가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왜냐하면 구원의 시작이 하나님으로부터 왔고, 그 결말까지도 주안에서 부활의 몸을입을 때까지 안전하게 인도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10/1/2017 6:30:00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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