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나눔
소교리7-5 : 하나님의 작정과 인간의 자유의지Ⅲ(엡1:5, 롬9:15-24, 10:8-15, 2017년8월27일)

소교리7-5 : 하나님의 작정과 인간의 자유의지Ⅲ(1:5, 9:15-24,10:8-15, 2017827)

    본문 엡1: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라고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에서 가장 중요한 한 단어를 꼽으라면, 단연코 예정입니다. 예정은 인간의 구원 문제와 관련한 하나님의작정을 가리킬 때 쓰는 성경의 단어입니다. 그런데 신자들이 예정에 대해서 오해하는 것 중에 하나가,예정은 구원에 이를 자를 선택하는 것정도로생각하는 것입니다. 맞긴 맞지만 반만 맞습니다. 사실 성경이 말씀하는예정은 구원에 이를 자만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에 이르지 못할 자들 또한 예정합니다. 이 구원에 이르지 못할 자들을 예정하는 것을 가리켜 유기라고 부릅니다. 이것의 뜻은 버려지다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말씀하는 예정은, 구원할 자와유기할 자, 두 부류를 예정합니다. 이를 두고 신학적으로 이중 예정이라고 부릅니다. 정리하면 이중 예정선택유기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중 예정이라는 측면에서 오늘 본문을 보면,“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라고 했기에, 이 본문은 구원받을 자에 대한 선택을 지칭하는 것입니다.또한 본문 롬9:21에서 이를 두고, “토기장이가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이라고 한 대목이 바로 구원받을 자에 대한 선택을 말합니다.반대로 유기는 롬9:21에서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라는표현에서 천히 쓸 그릇이 바로 유기의 대상을 지칭합니다.그리고 롬9:22,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이라고 또 한번 더 유기의 대상에 대해서 표현합니다. 이 표현을 새번역성경에서는 멸방받게 되어 있는 진노의 대상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우리는 선택이라는 말을 들을 때는 감사와 은혜가 나오지만, “유기라는 말에서는 약간의 불편한 마음이 듭니다. “왜 선하신 하나님께서 멸망 받게 되어 있는 진노의 대상을 작정하셨느냐?” 라는 질문이 들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운명론, 숙명론이라는사상이 깔려있습니다. 운명론과 숙명론은 기독교 용어가 아닙니다. 이것의일반적인 뜻은, “태어날 때부터 한 사람의 뒤바뀌지 않는 운명이 정해져 있어서,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이 없으니, 신의 뜻으로 알고 받아 들여야 한다.”입니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하나님의 작정과 엇비슷한 의미로 생각될 수 있습니다.그러나 운명론과 숙명론에 결정적으로 들어있는 비기독교적인 사상은, “마치 신에게그 책임을 돌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기독교 안팎에서 기독교 신앙의 구원에 많은 공격을할 때, 이런 사상을 이용합니다. “선하신 하나님이 한 인생에게 어찌그리 무자비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기독교 바깥에서야 그렇다치더라도, 심지어 기독교 내에서도 이와 같이 생각하는 부류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선하신 하나님이라면 한 인간에게 아무런 기회조차 주지 않고, 무작정 개인의 구원을 쉽사리 결정하지 않으신다라는 사상을 신봉합니다.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그들 나름대로 성경에서 뒷받침을 찾으려고 합니다. 예를 들면,디모데전서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원하시느니라.”그들은 이 구절을 구원에 관한 한 하나님의 진심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문자 그대로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 것이하나님의 본심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각 개인이 구원의 기회를 주었을 때, 그것을 받아들일지 말지는 각자가 결정할 문제이며, 그래서 그 기회를 거부하는 자는 그 책임이자신에게 있고, 결국 멸망으로 이른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주장은 성경 해석의 기본을 전혀 무시한 주장입니다.

    성경을 해석할 때는 수많은 해석의 도구들이 있습니다.그 중에 가장 기본에 속하는 것은, 그 단어, 그 구절이 어떤 정황(콘텍스트)속에서 사용되고 있는지봐야 하며, 또한 전후 문맥에서 어떤 전제를 깔고 있는지 반드시 봐야 합니다. 딤전2:4도 마찬가지입니다. 딤전2:1-2에서 모든 사람이라는 단어를 해석할 수 있는 본래의의도가 두 번에 걸쳐서 전제됩니다.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딤전2:1-2). 이 두 구절에서 이미 모든 사람이 어떤 카테고리로 한정시켜 놓고 있는지를 지정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첫째,모든 사람이라는 카테고리는 기도에 관한 범위를 지정해 주고 있습니다. 둘째,이 범위를 정해주는 본래의 의미는 차별이 없어야 한다라는 의도가 있습니다. 이 차별이 없어야 한다는 의도는 2절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이라는 표현에서 분명해 집니다. 다시 말해, 지위고하빈부귀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이라는 카테고리입니다.이런 의도로 시작한 딤전2장은 그런 맥락이 계속 유지되면서 4절에서도 모든 사람이라는 단어를 이어서 사용하는 것입니다.결국 복음에는 그 사람의 지위나 신분 고하와 상관없이 차별이 없다라는 말을 하기 위해, 이 구절이 의도되었다라는 것이 분명해 집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하나님이 구원을 베푸실 때,개인의 의사를 존중한다거나, 개인이 예수를 구주로 영접할 것을 미리 내다 보시고(예지)” 예정하셨다는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또한 유기에 대해서 마음속으로 억울하다거나 기회조차 주지 않는 무자비한 하나님이라는 생각들이 든다고 해서, 기독교 신앙의 구원이 운명론이니 숙명론이니 하는 것으로 공격하는 것은 전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이 문제는 앞으로 계속 밝혀 나갈 것입니다.

    나는 어떤 잘 알려진 기독교매체에 어떤 사람의 글이 기억이납니다. “칼뱅식의 예정론은 그 내용에 있어서 숙명론, 운명론과 다르지않다.”라는 요지의 글이었습니다. 나는 설교 시간에 특정인의 신학사상과체계를 옹호하거나, 또는 반론할 맘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적이지 않는말을 마치 진리처럼 말한다면 교회진리 수호를 위해서라도 할말을 하겠습니다.

    “칼빈의 예정론이 숙명론, 운명론과 다르지 않다라고 말한 사람의 요지는 이러 했습니다. 이렇게 주장한 이의 표현을 그대로 옮겨 보겠습니다. “선택과 예정을 따라서 구원을 받은 사람들에게있었던 하나님의 섭리는 복음을 들을 때에 마음을 열어 복음을 청종하게 하신지라는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그 성령님의 역사는 기계적이지 않습니다. 인격적입니다. 그 역사의 열매는 당사자가 인격적으로 받아들임으로만 가능합니다.”이 주장에서는 치명적인 모순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두 가지를 말합니다.첫째, “선택과 예정을 따라 구원을 받을 사람들이 복음을 들을 때 그 마음을 열게하는 것은 성령님의 역사라는 것과, 또한 그와 동시에 둘째,“그 역사의 열매는 당사자가 인격적으로 받아들임으로만 가능하다.” 치명적인 모순입니다.“선택과 예정으로 구원받기로 되어 있는 사람에게 성령님이 역사하기는 하는데, 그역사의 열매는 당사자가 인격적으로 받아들여야 가능하다라는 말은 비성경적일 뿐만 아니라, 논리적으로도 모순입니다.

    먼저 성령론의 관점에서 보면, 이 말은 성령님의 구원사역을 축소시키는 주장일 뿐 아니라. 성령님을 한낱 구원받을 자에게 분위기 메이커역할 정도만 하는 수동적인 하나님으로 전락시키게 됩니다. 일전에 거듭남의 비밀에 대해서 설교를 통해서 말씀드린 바 대로, 성령의 역사는 주권적이고 임의적입니다. 3장에서 그것을 명시합니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없느니라”(3:5). 여기에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성령으로나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 성령의 사역의 특징을 다시 이렇게 묘사합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그러하니라.”(3:8). 성령님의 사역을 마치 바람의 현상에 빗대어 설명합니다. 바람이 임의로 부는 것처럼, 마치 성령님의 사역도 그러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성령님의 사역에 그 어떠한 인간의 노력이나 공의가 끼어들 자리가 없으며, 오직 성령님의주관적이고 절대적이며 임의적인 사역으로 구원의 결과까지도 이끄신다는 의미입니다.

    이 사실을 고전12:3,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면서 다시 한번 확정적으로보여줍니다. 이 말씀이 뜻하는 바는, “성령님이 한 사람이 복음 앞에서마음만 열도록 도와주고는 팔짱 끼고기다리면서, 그 사람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지 말지를 결정하도록 기회를 준다라는 말이 절대 아닙니다.이전 칼빈의5대교리를 배울 때, 우리는 무조건적 선택””불가항력적 은혜에서 뭐라고 배웠습니까?6:65,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6: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이 두 구절은 구원의 확실성이 곧 신적 주권, 신적결정의 절대성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밝히는 것입니다.

     예정이라는 성경적 단어(1:5, 11)가 바로 하나님의 절대적이고, 주권적이며불변하는 신적 결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님이 마치 개인에게 복음에 대해서 마음을 열게 하는 것까지만역사하시고, “그 역사의 열매는 당사자가 인격적으로 받아들여야 가능하다라는 주장은 성령님의 역사를 훼손할 뿐 아니라, 기독교 구원론을 이교도 진리로 전락시키는 꼴입니다.

    기독교 신자는 구원에 관해 성경이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지,명확하게 정리해야 합니다. 성경이 성령으로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는 말씀의 핵심은,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그 어떤 자유의지도 개입할 수 없다!”입니다. 성경이 구원을 설명할 때 일관되게 계속 선포하는 것은, “구원의 확실성입니다. 이 구원의 확실성의 첫 출발은,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셨다는 것은 과정이 아니라, 결과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미 결정되어 있는 사항입니다. 번복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결정된 사항을 시행하시는 도구들을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1. 부르심, 2. 중생,3. 회심, 4. 연합, 5. 칭의,6. 양자, 7. 성화같은 것들입니다.

    이러한 구원의 역사에 성령님이 절대적으로 주권적으로 처음부터끝까지 간섭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개인에게 모든 구원의 결정권을 유보하는 것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이자신의 노력으로 부여잡은 구원을 어떻게 평생 유지할 수 있을까요? 불가능합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 만약 구원을 받는다면, 그 구원은 자신의 노력으로 된 것이므로,자신이 끝까지 그 구원을 유지하기 위해서 안간힘을 써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기독교신앙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일전에 어떤 책의 표현이 기억납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 천국에서 종일토록 하나님을 찬양과 경배를 올린다면 그것같이 끔찍한 것이 있을까요? 그 사람에게 그것은 천국이 아니라, 이미 지옥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거듭남은 절대적으로 성령께서 시작하여 성령께서 마무리를 짓는 것입니다. 그래야만그것이 천국이며, 기쁨이며,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예정은, 선택과 유기로 영원 전부터 확정되어 있습니다. 바뀌지 않습니다. 쉽게 말하면 구원의 명단과 유기의 명단이 변경되거나 수정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여기에는 인간의 어떤 행동이나 노력도 설 자리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전적부패속에서 완전한 무능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한 사람을 선택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하시고, 영화롭게 하시는(8:30) 일련의 모든 과정 또한 작정하셨고, 그 모든과정에 어떤 인간의 자유의지도 그 본래의 계획을 바꾸거나 무너뜨리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가 왜 운명론이나 숙명론이 아닐까요?그것은 유기되기로 작정된 사람들에게 있는 죄에 대한 책임이 본인들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신학적으로 타락 전 선택이냐 아니면 타락 후 선택이냐라는 논쟁은 차치하고서라도, 분명하는것은 유기되기로 작정된 사람들은 하나님의 작정 안에서 일어난 결과물이긴 하지만, 그들은 그들 속에 이미 존재하는악한 성향에 사로잡혀서 그렇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사람들을 그들의 악한 성향과 죄악에게넘겨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운명론이나 숙명론이 아닙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은그들이 받아야 할 대가들을 그대로 받도록 그들 자신의 죄악 된 욕망에 넘겨주시므로 해서 하나님 자신의 공의를 시행하십니다. 예를 들어서,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완악하게)하셨으므로…”(10:27)과 같은 표현이여러 번 나옵니다. 바로의 입장에서는 마치 운명론이나 숙명론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하나님 나에게 왜 이렇게 하십니까? 나를 왜 죄악을행하도록 몰아 부치십니까?”라고 따져 물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이것은 운명론이나 숙명론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바로를 유기하기로 하셔서 바로가 그렇게 된 것은 틀림 없습니다.그러나 분명한 것은 바로의 죄악 됨의 책임이 하나님께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본문롬9:17에서 이 바로에 대해서 언급을 하기를,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라고 한 대목이 바로 하나님의 작정이었음을 말씀해 줍니다.그러나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새로운 악을 부여해서라도 유기하시기 위해서 몰아붙이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다시 말해 바로가 악하게 사용된 것의 책임이 하나님께 있지 않으며, 또한 하나님은악의 창시자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이를 두고, R. C. Sproul은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은 선택된 자신의 백성을 구속하기 위해서 바로의 마음에새로운 악을 창조할 필요가 없었다. 바로의 마음에는 영원히 지속될 만큼의 충분한 악이 이미 존재했다.하나님은 바로의 악을 억제시키고 있는 은혜를 보류하고 바로가 원하는 길을 허락하는 것만 필요할 뿐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함으로써 바로의 마음을 걍팍케 하셨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죄악의 자연스런결과이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해설 중). 하나님은 유기의 작정을하실 때, 한 죄인의 마음속에 새로운 악을 창조하셔서 유기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본래 그 악한 성향의 마음에 그를 넘겨주시는 작정을 하실 뿐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이것을 신학적으로는 소극적 유기라고 부릅니다. “소극적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수동적이며,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하셨다는 의미가 아닙니다.하나님께서 구원에 이를 자들은 적극적으로 선택하시고, 그러나 멸망의 길로 갈 사람들은 소극적으로유기하시기로 예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소극적 유기는 하나님께서 적극적으로악인의 마음에 새로운 악을 창조해서라도 유기로 몰고 가신 것이 아니라는 측면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그들은자신의 악한 성향에 자신의 자유의지로 그것을 선택하고, 계속 그렇게 행하도록 하나님은 허용하시고,내버려 두십니다. 하나님께서 시행하시는 일이긴 하지만, 결국 그것은 자신의 죄악 때문에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것 또한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작정에있어서 이런 이중적 구조를 우리는 이해해야 합니다.이중적 구조라는 것은 넓은 의미에서는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이지만, 실질적으로 보면 죄악 된 개개인의 죄악 된 성향의 결과이며 동시에 자신들의 선택입니다.

    예를 들어, 13장에서 예수님께서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말씀하실 때 이런 표현을 하십니다. “그러므로 내가그들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13:13).이 말씀만 보면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을 듣고도 알아듣지 못하는 원인이 화자(narrator)’에게 있는지, 아니면 청자(listener)’에게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8장을 보면명확하게 나옵니다. “가라사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하나니 이는 저희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8:10). 이 말씀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는 자체가 청자들이 깨닫지 못하도록 하는 의도가 있음을 말씀합니다. 말하자면 처음부터 예수님은 작정하고,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그들에게는 깨달아지지 못하도록 비유로 말씀하셨다는 말씀입니다. 깨닫지 못하는 원인이 화자에게 있음을 드러냅니다.이렇게 만 보면, 천국 복음의 비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결국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는 원인이 하나님에게 있는 것입니다. “선택과 유기라는 측면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 천국 복음을 못 알아 들어서 멸망의 길로 가는 사람들에게는 책임이 없어져 버리고, 결국 그들에게는 운명론이나 숙명론이 됩니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보면,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합니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13:15). 무슨 말입니까? 실질적인 이유는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라고 기록합니다.그러므로 천국 복음을 듣기는 듣지만 깨달아 알지 못하여, 멸망의 길로 가는 사람들은하나님께서 그렇게 목적하셨지만, 또한 그들이 완악하여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이유가 그들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중적 구조를 안다면 운명론이나 숙명론 운운할 수 없습니다.그래서 이 본문을 두고 헤르만 바빙크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하나님이 사람들을 죄와거짓에 넘겨준 까닭은, 그들이 이것을 자초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예정과 유기는 확실성 안에서이루어집니다. 절대 인간의 자유의지나 선택에 의해서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결정하신 것이 그대로 시행됩니다. 성경이 너무도 명확하게 그것을 기록하기 때문입니다.“유기에 대해서는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몇이 있음이라 저희는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치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은혜를 도리어 색욕거리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1:4)라고 기록합니다. 또한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사단)에게 경배하리라”(13:8)라고 기록합니다.멸망으로 버려지기로 작정된 자는 이미 생명책에 그 이름을 빼고, 또한 심판 받기로미리 기록되어 있다라고 못박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이 있더라도, 구원에이르기로 작정된 자의 수와 명단, 또한 유기되기로 작정된 자의 수와 명단은 결코 변하지 않으며 항상 처음부터끝까지 동일하며 확정적입니다.

    본문 롬9:21 토기장이가 귀히 쓸 그릇천히 쓸 그릇을 만들 때, “진흙 한 덩이로 만들었다고 표현합니다. NIV성경에서는, “…to make out of the same lump of clay…”라고 번역하면서, “the same lump of clay”, “같은 흙 덩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을 새번역성경에서는 흙 한 덩이를 둘로 나누어서…”라고 번역했습니다. 뭘 말할까요? “진흙의 좋고 나쁨이토기장이의 마음을 결정하는 이유가 못 된다라는 말입니다. 달리 말해,진 흙 한덩이의 상태가 토기장이의 목적과 계획에 어떤 영향도 주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럼 이 성경의 기록에서 이런 낱말과 표현을 한 궁극적인 의도가 뭘까요? 토기장이의 권한과권위를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롬9:21, “토기장이가권한이 없느냐라고 기록하면서,“권한이라는 단어를 씁니다. 여기서의 권한은신적 결정” “신적 주권” “신적 절대성” “타협불가라는 의미를 나타냅니다.그래서 토기장이라는 주권자가 절대권한으로 똑 같은 진흙을 두 덩이로 나누어서, 하나는질적으로 높은 목적을 부여하고, 또 하나는 질적으로 낮은 목적을 부여하는 것은, 그 진흙이 어떤 형태를 갖추기도 전에 이미 결정된 사항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타락 전 선택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이 애용하기도 합니다.그러나 나는 오늘 타락 전 선택타락 후 선택에 대한 신학적 해설을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구원으로 선택하시고, 또는 멸망으로 유기하시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결정이며,영원하신 작정 안에서 일어나는 필연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한 개인에게운명론이나 숙명론으로 받아들여질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소극적 유기, 사람이 죄악으로 인해 자신의 멸망의길을 가는 것을 자초했기 때문이고, 그것을 스스로 선택한 것을 하나님은 그저 내버려두시기로 허용하심으로 작정하셨기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로마서 10장이 이어지는데, 그 내용을 보면 마치 앞장 롬9장의내용과는 대치되는 듯한 표현들이 나옵니다. 이것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 우리는 구원론에 있어서 계속 헷갈릴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세요.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시인하며…”(9a). 이 표현의 주체는 입니다.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또한 네 입으로라고 하면서 다시 한번 사람 편에서어떤 의지가 있어야 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이렇게보면,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는 것은 사람의 자유의지와 입술의 고백으로 되는 것으로 기록합니다.계속해서 보세요.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9b). 여기서 다시 한번 네 마음에 믿으면이라고 하면서 개인의 자유의지를 돋보이게 하는 듯 합니다. 그리고 이 구절의 마지막은 구원을 얻으리니라고 결과를보여줍니다. 말하자면 한 사람이 의지를 가지고,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고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라는 결론을 내리는 것처럼 보입니다.그래서 이어서10절은,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라고 하면서 한번 더 개인의 의지에 힘을 실어 주는 듯이 보입니다.그리고 13절에 가서는 마치 쐐기를 박는 듯한 인상을 주면서 이렇게 표현합니다:“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먼저 13절 말씀을분석해 봅시다. 설교 초반에 말씀드린 딤전2:4의 형태와 똑같습니다.여기서 말하는 누구든지라는 말이 어떤 전제에서나왔느냐를 분석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바로 앞 구절에서 뭐라고 말씀하는지 봅시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10:12). 이 구절에서 유심이 봐야하는 단어는 차별이 없음이라입니다. 왜 이런 단어를 쓰고 있을까요?바로 앞 단어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가 이단어의 카테고리입니다. 핵심이 뭘까요? “인종입니다. 달리 말해 민족입니다. 복음은,또는 주님은 인종과 민족에 국한되시는 분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복음에는 그런 인종에차별을 두지 않는다라는 차별성에 대한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 중간에,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라고 하면서 모든 사람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모든 사람의 전제는 딤전2:4모든 사람의 전제와 동일합니다. 인류 전체를 의미하는 모든 사람이 아니라, 차별성이 없다라는 의미로 모든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등장하는 구절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13)고 나오는 것이므로, “누구든지라는 단어는 앞의 모든 사람차별이 없음의 카테고리에 제한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는 인류 전체가 아니라, “차별이 없다는 측면의 누구든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단 1%도 이 구절에서하나님의 마음이 누구든지가 인류전체 모두가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구주를 영접하기로 결정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의도가 없습니다.구원의 절대 주권성, 임의성, 오직 하나님의예정 안에서만 구원이 일어난다라는 사실은 이 구절에서도 여전히 변함없는 법칙입니다.

    그러면 9절과10절의 표현이 마치 나 자신,인간 개개인이 자신의 입과 마음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고 믿기로 마음 먹기만 하면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말이 문자적으로그대로 옳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 구절 또한 바로 앞구절에서 어떤전제를 깔고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8,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이것을 현대인의성경은 이렇게 번역합니다:“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여러분 곁에 있으며 여러분의 입술과 마음에 있습니다…”성경은개인이 입술과 마음으로 고백하고 마음으로 믿는 그 결정의 순간이, 결국 이미 그 입술과 마음에 존재 하고 있는말씀으로부터 기인한다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자신이 얻어낸 말씀이 아니라, 이미 사람이입술로 그리고 마음으로 고백하고 믿기로 작정하기 전에, 이미 그 자신 속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부여되어지고 존재하고 있으며, “그것으로인해구원에 이르는 믿음의 고백을 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마치 개인의 자유의지로 입술과 마음으로 주를 시인하고믿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것은 하나님의 예정가운데 이미 주시기로 된 믿음의 말씀이 그 입술과 마음에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에 이르는 과정에는 그 어떤 개인의 자유의지도 낄 자리가 없고,오직 그 일을 처음부터 계획하시고 시행하시는 하나님의 작정 안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런 확고한 하나님의 신적 결정 앞에서 여전히 가시지않는 불편함이 존재합니다. “어쩌면 나도어쩌면 내 가족 중에 누군가도유기 되기로 작정되어 있다면 어떻게 하나?”라는 두려움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런 마음이 드는 모든 신자들에게 헤르만 바빙크의 표현으로 위로하고자 합니다: “모든개혁파 신학자들은 예정의 교리를 가장 조심스럽고도 부드럽게 다룰 것을 충고했으며, 헛되이 꼬치꼬치 캐려고하는 태도를 경고했다비록 하나님이 자기에게 속한 자들을 알고, 택자들의수효가 소수라고 일컬어질지라도, “모든 사람에 대해 좋은 희망을 가져야만 하며, 그 누구도 경솔하게 유기된 자로 여겨져서는 안 된다.”함부로 판단하지 마라는 얘기이며,오히려 모든 사람들을 향하여 희망을 가지라고 권면합니다.

    믿음의 출처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에 근거한다면,그 어떤 인간의 외형적인 고상함이나 도덕적인 순결함으로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혹 도무지 안 될 것 같은 무지몽매하고, 영적으로 철부지처럼 보이는 사람도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선택된 사람이라면, 하나님께서 충분히 그리고 확실히 그를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으로 인도해 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8/29/2017 3:56:00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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