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나눔
소교리7-4 : 하나님의 작정과 인간의 자유의지Ⅱ(엡1:5, 왕하20:1-7, 2017년8월20일)

소교리7-4 : 하나님의 작정과 인간의 자유의지Ⅱ(1:5, 왕하20:1-7,2017820)

    저번 시간의 내용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1. 하나님의 작정은 하나님의 뜻입니다.2. 하나님의 뜻은 성경으로만 알 수 있습니다 3. 성경에 대한 지식이 곧 하나님의뜻을 알 수 있는 길입니다. 4. 그러므로 성경에 대한 지식을 쌓는 일은 믿음과 직결되는 문제입니다.5. 사람의 자유의지로 어떤 것을 선택하더라도, 그것이 성경의 말씀에 위배되지 않는다면그 어떤 자유의지로 선택한 것이라도 결국 하나님의 뜻이 됩니다. 6. 그러나 성경의 말씀에 위배되는 모든자유의지로 선택한 길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7.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시되,성경이 정하신 길 안에서 자유로운 선택을 하도록 하셨고, 성경의 가르침을 벗어난모든 자유로운 선택은 죄입니다. 8. 그 죄의 책임은 인간에게 있습니다. 9. 하나님의 작정은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을 미리 정하시긴 하지만, 인간이 죄 짓는 것까지 정하시지는않습니다. 10. 그럼에도 인간이 죄를 짓는 일이 발생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허용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죄의 제 1원인이 아니시며 그 책임은 인간에게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마치 자신이 책임을 지시겠다는작정을 하시는데, 그것이 십자가의 작정입니다.

    오늘은 작정과 자유의지의 관계를 짚어보면서, 사람의 기도하는 자유와 하나님의 작정의 관계에초점을 맞춰서 살펴보겠습니다. 작정과 자유의지를 공부하다 보면, 이런질문을 하게 됩니다. “만약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셨다면, 나는 기도할 필요가 있는가?”이 질문의 이면에는 원인과결과라는 논리가 들어 있습니다. 만약 누군가 병이 나서 기도했는데,병이 나았습니다. 신자는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하셨다고 믿습니다. 이때 원인과 결과라는 관점에서 보면,기도는 원인이 되고, 응답은 결과라는 도식이 성립됩니다. 분명히 성경적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하나님의 작정과 관련하여 생각해 보면 좀 복잡해 집니다.하나님께서는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을 정하신다라는 작정의 명제가 맞다면, 그 사람의 병도 결국 하나님께서 낫도록작정하셨기 때문에 치유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특정한 개인의 발병과 치유에 대해서 작정하시지 않는다면,하나님은 인간의 생과 사를 주관하지 않고, 단지 인간의 운에 맡겨 버리는 이신론의하나님으로 전락합니다. 결과적으로 필연은 없고, 우연만 나타나는 어지러운인간역사가 반복되게 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세상의 모든 일을 주관하시고 일어날 모든 일을 작정하신다고 여러 군데에서 가르칩니다. 그렇다면 누군가 병이 나는 것도 하나님의 작정 안에서 일어나고, 병이 낫는 것 또한 하나님의정하신 시기와 방법대로 낫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시 반복되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그래도 우리가 기도해야 합니까?”왜 우리가 이 질문을 다시 하게 됩니까? “하나님께서 정하신 대로 모든 일이 발생한다면, 우리가 기도해도 소용이 없는 것이라는 논리에 도달하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기도해도 병으로 죽을 자는 죽고,살 자는 산다라는 명제죠. 또 한가지 궁금해지는것은, “하나님께서 일어날 모든 일을 정하신다면, 우리가 기도하는 것또한 어느 날 어느 장소에서하나님께서 작정하셨기 때문에 기도하는것 아닌가? 그러면 인간의 자유의지로 기도하는 것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라는 논리적 질문에 이르게 됩니다. 이에 대해 우리는 간단하게 두 가지 질문으로 요약하고 본문을살펴보면 좋겠습니다. 1. “하나님의 작정으로 우리의 삶의 모든 부분을 이미 결정해 놓으셨다면,우리는 항상 그리고 모든 문제에 대해 기도해야 하는가?” 2. “우리가 자유의지로기도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작정을 뒤 엎어서라도 응답해 주시는가? 아니면 우리에게 그 어떤 자유의지로 기도하는것도 허락된 적이 없고 결국 하나님의 뜻대로만 기계적으로 발생하는 기도와 응답인가?”

    오늘 본문 왕하20:1, “그 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매…”여기서 그 때에라고 하는 것은, 앗수르가 유다를 침공하여 예루살렘 성을 포위하고 있었던, 국가 위기상황의 때를 말합니다.역사 연대로 보면, BC 701년경, 왕위에오른 지 14년이 되었을 때를 말합니다. 그 시기에 히스기야 왕이 죽을병이 들었습니다. 그의 병의 종류는 7절에 보면, “상처라고 개역개정에서 번역했는데, 영어성경에는boil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이것을 현대인의성경에서는 종기라고 번역했습니다. 종합해 보면 아마도 히스기야는살을 썩게 하는 심한 피부병에 걸린 것 같습니다. 어쩌면 피부암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지난 설교 중에 하나님의 작정은 인간의 질병의 종류와 시기, 그 정도와 치료의 방법까지도 관여한다.”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렇다면 히스기야가 인간의 관점에서 하필이면, “그 때에”—나라가 외적의 침입으로 망할 수도 있는 시기에죽을 병에 걸렸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당연히 하나님의 작정 안에서 일어나는 필연의 사건입니다. 그것을 이어진1절의 말씀에서 뒷받침해 줍니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이 히스기야에게 이렇게말씀하십니다: “너는 집을 정리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죽을 병을 걸리도록 허락하신 것은 하나님의 작정임을 명백히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히스기야의목숨의 마지막에 관한 하나님의 계획이 마치, “예루살렘이 앗수르에게 침공당한 때에 맞춰져 있는 듯합니다.

    그런데 히스기야는 비장한 각오로 기도합니다. 히스기야의 기도에 대해 두 가지 외형적인 모습을성경이 이렇게 기록합니다. 1. 얼굴을 벽 쪽으로 돌리고 기도했고, 2. 심히 통곡했다. 그런데 이어서 하나님이 이사야 선지자에게 가서 히스기야에게 전하라고 하면서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너를 낫게 하리니…”(5).

    성경에 대해서 초보적인 눈을 가지고 읽는 사람들은, 대게 이 구절을 단순히 기도의 간절함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라는 도식으로 이해해 버립니다. “얼굴을 벽 쪽을 향해서 통곡하며 기도했다면 얼마나 처절하게 기도했을까? 그랬으니 하나님이 감동하시고불쌍히 여기셔서 응답하시지…”라는 생각입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읽을 때 성경의 문학 장르를 약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구약성경의75%는 내러티브라는 문학 장르로 기록되었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서사 문학입니다.스토리텔링을 하듯이 화자가 어떤 것을 쭉 이야기해 나가는 방식입니다. 이것이 청자에게들려질 때에는 어떤 인물과 사건이 어우러져서, 핵심적인 주제를 드러내려는 기록의도가 있습니다.이때 가장 조심해서 성경을 읽어야 하는 부분은, 그 이야기 이야기들 마다 드러내고자하는 하나님의 의도는 인간 주인공을 부각시키는데 있지 않습니다.오히려 인간 주인공으로 내 세운 그 뒤편의실제 주인공이신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시고 그 스토리를 진두지휘 하시는 지를 보여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결국 그 진두지휘 하시는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보여주시려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 인 경우가 많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오늘 본문의 이야기 또한 히스기야가 인간 주인공으로 기록되어져 있지만, 실제 주인공은 아니며,그러므로 당연히 히스기야 기도의 위대함을 보여주려는 의도가 전혀 없습니다. 그렇다면당연히 성경은 인간 개인의 기도의 외적 형식이 어떤지, 그 사람의 자세가 어떤지를 가르쳐 주려는 의도가 없는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 응답이 인간 개인이 기도를 해서 하나님을 감복시켜서 온다는 공식을 보여주려는 의도는추호도 없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기도는 처절함이나 간절함 때문에 응답 받는다라는 식의 기도 응답의 법칙같은 것을 가르치지 않습니다.기도가 만약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에게 응답되는어떤 공로주의식 보상 같은 것이라면, 역사상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가 응답되지 않은 것은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22:44,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핏방울 같이 되더라역사상 이렇게 처절한 기도가 있을까요? 예수님의기도는 역사상 가장 처절하고 간절한 기도였습니다. 그러므로 기도의 간절함의 정도에 따라 응답의 유무가 결정된다면,예수님의 기도는 반드시 응답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는 기도는 응답되지 않습니다. 그 응답되지 않는 이유가 예수님의 기도에 정확히 드러납니다.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22:42). 예수님의 기도는 하나님의뜻을 반대하거나, 하나님의 작정을 변경시키는 것이 아니라, 결국 하나님의작정대로 되기를 바란다는 기도였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자신의 기도를 통해서, 성부하나님의 뜻을 돌이키게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자신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려는 의도로기도한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말씀하는 기도의 핵심은, “기도자가기도로 하나님을 설복시켜서, 기도자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고, 나아가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을 뒤집어서 변경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신앙의 기도는 오히려기도자가 하나님의 작정 앞에 설복 당하는 것입니다.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작정은 기도자의 기도로 완성된다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작정이 기도자의 기도로 완성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작정은 영원 전부터 변하지 않습니다.”신비입니다. 기도자가 기도했는데, 그 기도는 결국 하나님의 작정을 실행시키시는 스위치 같은 역할을 합니다.때로는 그대로 응답하심으로, 때로는 반대로 응답하시지 않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작정을실행시키십니다.

    그러므로 히스기야가 죽을 병에 걸렸다가, 다시 산 사건은 히스기야가 간절하게 기도해서 하나님의뜻이 변경되어서, 다시 살려준 사건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본래 작정은히스기야가 그 죽을 병을 극복하고, 15년을 더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마치 기도 응답이라는 외적 형식을 통해서 하나님의 작정을 이루어 가십니다. 하나님이 만약 그 영원한 작정으로 히스기야가 병드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으셨다면, 히스기야의병은 절대로 발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병을 낫게 해 달라고 기도할 필요가 없었겠지요.뿐만 아니라, 히스기야가 통치하는 예루살렘이 앗수르의 포위를 당해 절체절명의 국가존폐의위기를 맞이하는 것 또한 하나님께서 작정하시지 않았다면 절대 일어나지 않았을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히스기야에게같은 시간대에 동시에 두 가지 사건을 주십니다. 하나는 국가적 위기, 또 하나는 개인적 위기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히스기야의 이야기 그림을 통해 무엇을 그려나가시려는것일까요? 결국 언약의 성취를 통한 구원을 보여주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6, “내가 네 날에 십오 년을 더할 것이며,내가 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구원하고, 나를 위하여 또 내 종 다윗을위하므로 이 성을 보호하리라…”여기 보면 하나님께서 너와 이 성을구원하고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라는 히스기야 개인의 구원과 이 성이라고 하는 예루살렘(유다) 성 전체의 구원을 한 그림에 넣어서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구원은 철저하게 내 종 다윗을 위하므로라고하면서, “다윗 언약을 상기시켜줍니다. “다윗을 위하므로라는 말은 다윗의 후손이기 때문에라는 뜻일 수도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다윗과 맺은 언약을위해서라도라는 뜻이 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 다윗과 맺은 언약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신실하게 지켜가십니다.이 언약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삼하7:12,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메시야 예고입니다. 다윗의 씨 중에 메시야가 나와서 하나님의 나라를 견고히 세울 것이라는 예언입니다.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이나 또는 다윗과 맺은 언약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마태복음1 1절은 이렇게 시작하죠. “아브라함과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이 구절은 아브라함과 다윗과 맺었던 언약의 약속이 성취되어서,결국 그리스도가 육신의 몸을 입고 오셨다라는 것을 확증하는 구절입니다.

    그래서 다윗의 언약의 후손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가 안전하게 오시게 하기 위해서는, 이 언약은철저하게 지켜져야 합니다. 또한 다윗의 계보에 나타나는 왕들의 신변에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기거나,돌발상황으로 인해 메시야가 오시는데 방해가 되면 안됩니다. 모든 것이 언약 안에서안전하고 철저하게 인간 자신의 역할들을 각각 해 주어야, 다윗의 계보에서 진정한 왕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가탄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히스기야가 너무 빨리 죽거나 신변에 문제가 생겼을 경우, 메시야가 탄생하는데난관이 생기게 하는 일은 절대 일어나면 안 되는 것입니다. 1:10에 보면, 예수님의 족보에 히스기야라는 명단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히스기야가 너무 빨리 죽어서, 그 다음 왕 므낫세가 왕국을 통치할 만한 기반이 미쳐 마련되지못하게 된다면 그것 또한 예수님이 탄생하는데 큰 걸림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작정은 히스기야가 BC 701년경, 왕위에 오른 지 14년째에 병들어 죽게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본래 왕위에 오른 지 29년이 되는 해에 죽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왕하20:21, “히스기야가 그의 조상과 함께 누워 잠드니, 그의 아들 므낫세가 그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그리고 이어서 왕하21:1,“므낫세가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십이 세라 예루살렘에서 오십 오 년간 다스리니라…”라고 기록한 대목에는 숨겨진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히스기야의 섭정입니다. 히스기야가 죽을병이 낫고15년간 더 살면서 그가했던 것은, 아들에게 왕권을 물려주고 가르치는 일을 합니다. 그래서성경을 순진하게 그냥 읽으면, 므낫세가 열 두 살 때 홀로 왕이 되어서 유다를 55년간 다스린 왕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히스기야가 15년간 섭정을 통하여, 15년을 공동통치를 했다고 보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답입니다.이에 대해 Edwin R. Thiele라는 학자의 책, “히브리왕들의 연대기라는 책에 보면 상세하게 나옵니다. 그래서 사실 므낫세는 히스기야를 코치를 받으면서 12-27세까지 섭정 시대가 있었고,므낫세 27세가 될 때, 히스기야가 죽고 그로부터40년간 홀로 유다의 왕으로 통치하게 됩니다. 그렇게 계산을 하지 않으면,유다는 BC 586년에 멸망하지 않고, 15년이 더 지난 BC 571년 망하게 되는 계산이 나오게 됩니다.

    뭘 말해 줍니까? 히스기야의 인생의 년수는 BC 701년에 끝이 나도록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BC 686년에 끝이 나도록 영원 전부터 작정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히스기야가 죽을 병이 들어서기도한 것은 자유의지로 기도한 것이지만, 하나님은 그것마저도 하나님의 작정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히스기야의 입장에서는 100% 자발적이며, 자율적인 의지로기도한 것입니다. 누가 부추겨서 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이사야 선지자가기도해 보시오, 혹시 하나님이 고쳐 주실수도 있으니…”라는 말 조차도 하지 않았습니다. 절대적으로 히스기야 개인이 스스로 자신의 의지로 기도한 것입니다.그리고 기도자의 입장으로 보면, 기도의 응답으로 15년의 수명이 연장된 사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본래 계획에 없던 15년의 수명을 더한 것이 아니라, 본래 그랬던 것을 기도 응답이라는 외적 형식을 사용하셔서하나님 자신의 작정의 그림을 완성시키신 사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작정의 한치의 착오도 없는 절대성과 인간의자유로운 의지로 한 기도는 서로 충돌하지 않고 신비롭게 어우러져서 하나님의 뜻을 나타냅니다. 히스기야의 기도는하나님이 기도하도록 강요한 흔적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그 기도는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 안에서 일어났습니다.그리고 그 낫는 방법 또한 하나님의 작정 안에서 일어납니다. 앞서 말씀 드린바 대로하나님은 병의 낫는 방법과 시기까지 정하신다고 하셨습니다. 7절에 보면, “이사야가 이르되 무화과 반죽을 가져오라 하매 무리가 가져다가 그 상처에 놓으니 나으니라이구절은 무화과 열매가 피부병을 낫게 하는 만병통치약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구절이 아닙니다. 여기서 보여주시려는하나님의 의도는 병을 허락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며, 또한 하나님이 낫게 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처음 설교 초두에 질문한 두 가지: 1. “하나님의 작정으로 우리의 삶의 모든 부분을이미 결정해 놓으셨다면, 우리는 항상 그리고 모든 문제에 대해 기도해야 하는가?” 2. “우리가 자유의지로 기도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작정을 뒤 엎어서라도 응답해 주시는가? 아니면우리에게 그 어떤 자유의지로 기도하는 것도 허락된 적이 없고 결국 하나님의 뜻대로만 기계적으로 발생하는 기도와 응답인가?”

    답을 내리자면,  1.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의 모든 부분을 작정해 놓으셨더라도, 우리는 모든 문제에 대해서 항상 기도해야합니다.” 또한 2. “우리가 자유의지로 무엇을 구하든지 그것은 하나님의작정을 뒤엎어서 우리의 뜻을 관철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오히려 우리가 무릎 꿇는 것이며 그럼에도불구하고, 우리의 기도는 기계적인 기도가 아니라, 우리의 완전한 자유와의지로 한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모든 것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바꾸거나,우리의 의지를 관철시키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완전히 자유롭게 기도했는데,나중에 지나보니 하나님의 작정 안에서 예정 되어있던 것이, 우리의 기도의 응답으로완성되어 있는 것을 보게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작정은 인간의 기도로 손상 받지 않으시고,또한 동시에 사람의 기도는 절대 그렇게 하도록 정해져 있는기계적인 기도를 하는 것 또한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가 전혀 필요가 없으신 분이시지만,마치 없으면 안 되는 것처럼 사용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작정은 우리의 자유의지로기도하는 것을 통해 변경되거나 하나님의 뜻을 바꾸면서까지 우리의 자유로운 기도를 사용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작정은 절대로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기도를 사용하시므로 하나님 자신의 뜻을 이루어가십니다.

    

8/21/2017 12:03:00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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