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나눔
소교리7-3 : 하나님의 작정과 인간의 자유의지Ⅰ(엡1:5, 11, 잠19:21, 2017년8월13일)

소교리7-3 : 하나님의 작정과 인간의 자유의지Ⅰ(1:5, 11, 19:21,2017813)

    지난 두 번의 시간을 통해 말씀 드린 하나님의 작정에대해 요약을 하면 이렇습니다. 1. “하나님의 작정은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과 목적인데,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을 미리 정하신 것이다라는 것과 2. “하나님의 미리 정하시는 것은 절대적이며 주권적이다라는 것, 그리고 3. “하나님이 작정의 범위와 정도 또한 하나님이 결정하시며, 그 결정 밖에서는 아무것도 일어날 수 없다라는 것과 또한, 4. “이미 일어났거나 일어나고 있는 사건, 그리고 일어날 모든 사건은 우연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의작정 안에서만 일어나는 필연이다라는 것과 또한, 5. “하나님의 작정은인간의 고통의 문제에 직접적이고도 세밀하게 관여하시며, 그 범위와 깊이와 기간을 정하시며, 그 고통의 궁극적인 목적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통에 동참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오늘은 하나님의 작정과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해서 말씀드립니다. 여러분 중에는 하나님의 작정과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단어를 들을 때 어렵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을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신학적인 단어가 가진 이면의 것들을 잘 살피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지식들이 믿음과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자들이 오해하는 것 중에하나가, 믿음은 마치 추상적이고 신비로운 것으로만 생각하는 편견입니다. 그러나 지식을 쌓아가지 않으면 믿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우리의 믿음은 은혜로 주어지는 것 아닌가?” 맞습니다. 그러나 우리 신자들의 믿음은 처음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거저 주어집니다. 그러나 그 다음 이미 신자는 어떻게 그 믿음을 지속시키면서 자라가게 될까요? 앞으로 자라가야하는 믿음은 천국에 이르는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서 자라가야 할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서의 지식이 없다면 그것은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지식은 어디서 오나요? 오직 성경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지식을 쌓아가는것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쌓아가는 것이며, 그것이 곧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쌓아가는 지식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하나님께서 호세아에게 말씀하셨던,“너희가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라고 하셨던 그 지식은 바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그리고 그 지식은 성경으로부터 나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지식을 쌓는 과정은 자유의지를발휘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칼빈주의자입니다. 칼빈주의개혁주의자들이 가르치는 것들 중에 특히 강경론자들이 가르치는 것 중에,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 사상이아주 중요한 자리를 차지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너무 강조하다 보면, 개인에게 허락하신 자유의지에 대한 부분을 약화시켜버립니다. 그래서 은혜가 은혜가 되는 것이아니라, 은혜주의가 되어버립니다. 성경은 은혜를 말씀하시지,은혜주의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은혜주의는 다른 말로 정적주의라고 부릅니다.하나님의 주권과 은혜를 사모하고 기다리는 나머지, 신자가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자신의 의지를 발휘해서 마치 뭐라도 하면, 불경건한 것처럼 생각하는 풍토가 강경칼빈주의자들의가르침 속에서 나타납니다.

    그러나 지식을 쌓는 일에 자유의지를 사용하셔야 합니다.가만히 기다리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신다라고 생각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온전한 성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하나님의 작정은 개인의 자유의지를 훼손하지 않고, 또한 인간의 자유의지는 하나님의작정을 가로막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작정은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을미리 정하신다”(소교리7)라는명제가 철저히 성경적인 가르침임에도 불구하고,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개인의 자유의지를 기계적으로 전락시키지않으십니다. 그러나 작정과 자유의지가 서로 충돌하지 않도록 하나님은 역사하십니다. 이 신비함을 우리는 이해할 수 없지만, 믿음으로 받아 들여야 합니다.

    본문 엡1:11,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19:21,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만이 완전히 서리라.”이 두 본문은 하나님의작정이 절대적이고 주권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본문은 그의뜻의 결정대로,” “오직 여호와의 뜻만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신자들이 즐겨 쓰는 표현, “하나님의 뜻이라면…”이라고 할 때, 이 표현의 이면에는하나님의 변함없고, 절대적이며, 주권적인 하나님의 작정에 대해서 인정한다는것을 포함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작정과 동일한 의미입니다.

    먼저 기독교 신자들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표현을 할 때 조심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남용입니다. 인간 자신의 뜻을 펼치기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경우입니다.기독교 교회가 타락할 때 나타나는 대표적이고도 가장 일반적인 죄악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남발하는 것입니다. 타락한 목사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미명하에, 성경의 말씀을 비성경적이고,사적인 해석으로 가르칩니다. 그것은 교회를 마귀에게 넘겨주는 행위입니다.예를 들면, 목사가 기도원에서 일주일 기도하고 내려와서 교회 앞에 공포하길,“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당을 새로 지으라고 하셨습니다. 건축이 하나님의 뜻입니다!”라고 말했다면, 그 것은 비성경적이며, 또한 하나님의뜻에 대한 모독입니다. 이 경우, 교회당 건축이 성경적이냐 비성경적이냐의문제를 따지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계시에 관한 문제입니다. 성경이완성된 이후, 지금 신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어떤 한 개인에게 자신의 뜻을 직접 계시하지 않습니다.왜냐하면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이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66권의 맨 마지막 장(22:18-19),이 성경의 내용에서 더하거나 빼면 큰 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성경 외에는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예배당 건축이 필요하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는 합당하고도 합리적인 이유가 있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건축을 해야 할 당위성이 현저히 떨어지는 대도 그것을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갖다 붙여서 밀어붙이게 되면 그것은 죄악입니다.

    그러면 이제 궁금해집니다. “신자는 어떻게 매순간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순종할 수 있나요?”답부터 말씀 드리면,“신자는 어떤 것을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는 자유의지가 주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어떤것을 선택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일어납니다. , 그 자유는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위배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만 선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새로운 차를 구입하려고 할 때,현대차를 살지, 토요다차를 사야 할지 하나님께 뜻을 물어볼 필요가 없습니다.그 어떤 것을 사기로 결정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일어납니다.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원리 안에서 어떤 결정을 하시더라도 그것은 항상 하나님의 뜻이 됩니다. 그런데 만약, 누군가 어떤 차를 사서, 범죄를 행하는일에 그 차를 사용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이런 경우, 어떤 종류의 차를 사더라도 차를 구입하는 것 자체가 이미 범죄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하나님의뜻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어떤 직장을 선택할 지 하나님의 뜻을 물어볼 필요가 없습니다. 직장의 선택을 위해서기도하지 말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그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확정적인 음성을 듣기 위해서는 기도하지 마십시오.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A라는 회사를 갈까요? 아니면 B라는 회사를 갈까요? 라고 하면서 기도하다가,성경을 폈는데, “예수께서 산으로 가시더라..” “이라는 단어에 마음이 꽂혀서, “삼성물에 가야겠다고 결정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적인가르침이 아닙니다. 또한 하나님의 뜻을 응답해주는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가장 알맞고 적합한 직장 여러 개 중 어느것을 택하든지, 그것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일어납니다. 그러나 만약여러분이 가려는 직장이 명백히 사회법을 어기고 있고, 비도덕적이며, 양심에 어긋나거나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에 앞장서는 직장이라면, 그 직장은 선택하지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를 들어, 직장 A B가 있습니다. 회사 A는 연봉 5만불을 주는 기업입니다. 그리고 회사B는 연봉 10만불을 주는 기업입니다. 그런데두 곳 동시에 합격을 했습니다. 어떤 곳이든 본인이 선택하면 됩니다. 그런데 만약 회사B가 연봉 10만불이라 마음이 가지만,기독교이단종파에서 직영하는 기업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선택하면 안됩니다.왜냐하면 이단에 유익을 주는 어떤 선택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당장 누군가는 물을 것입니다. 그런 게 성경에 나와 있느냐? 예 있습니다.2 1:10, 이단은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고 명시합니다. 또한 딛3:10,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고 가르칩니다. 이처럼 성경은 명시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기도 하고, 또는 명시적이지는 않지만, 그 원리와 하나님의 성품을 기록함으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구별할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어떤 기업을 운영해서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헌금을 수입의10%를 할지, 수입의 20%를 할지는 여러분자유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10만불을 벌어서 10만불을 다 헌금하고 싶은 마음이 들더라도, 만약 그 수입이 부정한 방법이나 편법으로 번 돈이라면그것은 이미 헌금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받지 않으십니다. 혹 여러분이 그런 부당한 방법으로 돈을 번 후에, “하나님 복 주셔서 감사합니다.하나님께 영광 돌립니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신성모독입니다. 미가 선지자가 미가서 6장에서 줄곧 노래하는 것이 뭡니까? 사람이 행해야 할 선이 뭔가?라는 것에 대한 것입니다. 미가의 핵심적인 답은 그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라면, 공의, 사랑, 겸손이 나타나야 한다!!”(6:8)를 말씀합니다. 그래서 그의 고민이 뭐냐 하면,“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갈까?”였습니다. 쉽게 말하면 어떤 예물을 하나님께 드릴까?의 고민입니다. 그러면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 하실까”(6:7). 새번역성경에서 이렇게 번역합니다. “수천마리의 양이나, 수만의 강 줄기를 채울 올리브 기름을 드리면 주님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이에 하나님의 대답이 이렇습니다. 6:10-11, “악인의 집에 오히려 불의한 재물이 있느냐 축소시킨 가증한 에바가 있느냐, 내가 만일 부정한저울을 썼거나 주머니에 거짓 저울추를 두었으면 깨끗하겠느냐이것을 새번역성경에서 이렇게 번역합니다.“악한 자의 집에는, 속여서 모은 보물이 있다. 가짜 되를 쓴 그들을, 내가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느냐? 틀리는 저울과 추로 속인 사람들을, 내가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느냐?”

    여러분이 나라에 바쳐야 할 세금을 교묘한 방법으로 탈루하거나,조금 더 수입을 벌기 위해서 편법적인 방법으로 세금을 떼먹은 후에 그 수입으로 교회에 헌금을 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도 이에 대해, 22:21,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가 계속 말하는 것의 핵심이 뭘까요?하나님께서는 일어날 모든 일을 미리 정하셨지만, 그렇다고 죄짓는 일에까지 작정하시지는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일을 작정하시지만, 사람이 짓는 죄에대한 책임은 없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의 창조자나 원인자가 아니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주어진 자유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지만, 하나님은 사람이 죄를짓도록 유도하거나 계획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죄가 발생했다면 그것은 다만 하나님께서 허용하셨기 때문에 발생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궁금해 집니다. “하나님께서 죄가 발생하도록 허용하셨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책임이 있는 것 아닌가?”라는 의문입니다.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짓도록 작정하신 적이 없습니다. 다만 자유의지를 주셨기 때문에 인간의 자유로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또 다른 질문이생깁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율권을 주셔서 방관만 하시고, 인간사에 별로 관여하시지 않는 신이신가?”라는 이신론의 개념으로 다시 질문하게 됩니다.아닙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결정하시고, 그대로 시행하십니다. 그러나 개인의 자유의지를 무시하지 않고도 영원한 작정을 성취시킵니다.이것은 인간의 논리로 이해하거나 증명해 낼 수 없는 신비의 영역입니다.

    목사는 이런 질문을 자주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죄 지을 수 있는 가능성을 처음부터 차단하셨다면, 죄가 이 세상에 들어오지도않았을 텐데,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다 알고 계시면서도 아담을 그렇게 지으셨다면, 결국 하나님께서 죄를 짓도록 작정 하거나 다름없지 않느냐?”라는 질문입니다. 이 문제는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님을 먼저 밝히고 설명하겠습니다. 먼저2가지의 가정을 해봐야 합니다.

    어떤 한 존재가 죄를 지을 수 없는 상태에는 두 가지의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첫째, 처음부터 절대 죄를 지을 수 없는상태로 만들어지는 경우입니다. 둘째, 자신이 하나님인 경우입니다.아담을 창조하실 때, 이 두 경우를 적용해 봅시다. 첫째, 하나님이 만약 아담을 처음부터 죄 지을 수 없는상태로 창조하셨다면, 이 세상에 원죄는 없을 것입니다.그렇게 되면 어떤 순간이 오더라도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만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발적인 순종이 아니라, 기계적인 순종입니다. 하나님께서 프로그램을 입력시키듯이 그렇게 아담을 만드셨기 때문에 그렇게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그런 아담을 창조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외로워서 사람이라는 정교한 기계를 만들어 놓고 장난감 놀이를 하실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창1:26에서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아담은, 인격적인 하나님과 소통하는 인격적의 사람이 아니라, 항상 반드시 복종할 수 밖에 없도록 프로그래밍 된 가짜 하나님의 형상물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형상을 닮도록 만들면서까지 비인격적인 기계 같은 사람을만드실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을 닮은 한 완전한 인격체를만드신 것이 분명합니다. 그 인격체는 불완전하게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인격체는 자신의 자유의지로 하나님을 완전하고도 자유롭게 경배하고 찬양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자신의 선택권으로 자유롭게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완전히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한 진정한 경배와 순종이 되기 위해서는, 인간에게 완전한 자유의지를 부여하지 않고는불가능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에게 그 자유의지를 부여하시는 장치를 하나 마련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입니다. 그 나무를 동산 중앙에 배치시키시고,아담에게 명령합니다.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2:16). 하나님은 아담에게 맘대로 먹을 수 있는 권리를 주셨습니다. 말하자면 할 수 있는 범위를 정해 주십니다. 그런데 만약 아담이 맘대로 할 수 있는 범위만 부여 받고, “하면 안 되는범위를 부여 받지 않는다면, 아담은 항상 선만을 행하도록 프로그래밍된 기계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도덕적 선이나, 양심의 발동에 의한자신의 선택과 결단을 내려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 그렇게 만들어졌기에 순종하는 로봇으로 전락하는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부정 명령문을 함께 아담에게 말씀합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2:17).

    정리해 보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율권을 주셨습니다. 1. Able to sin, 2. Ablenot to sin. 죄를 지을 수도 있고, 죄를 짓지 않을 수도 있는 자유의지입니다.사실 상 두 가지의 가능성을 열어두십니다. 그러나 죄 지을 가능성이 있다고 해서,그것이 완전하지 않다고 말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틀림없이 아담을 완전하고도거룩하게 지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지으셨을 당시 아담이 죄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죄가 있게 지으셨다면, 하나님은 죄의 창조자와 원인자가 되십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명령 중에, “죄를 지을 수 있는 가능성을 아담이 선택합니다. 순전히 자신의 자유 의지로 죄를 지을 수 있는 가능성을 더 이상 가능성으로남겨두지 않고, 실제가 되게 했기 때문에, 그 죄의 책임은 아담에게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작정하시지만, 인간의 자유의지를 말살하면서까지 작정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자유의지가 완전히 자유롭게발동하면서도, 그렇다고 하나님의 작정이 손상을 입지 않도록 하십니다. 사람의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이치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정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항상 선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죄 짓는 것을 단 한번도 원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죄 짓는 것을허용하시기도 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불의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것은하나님의 십자가 계획을 세우시게 하는 궁극적인 이유가 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택하신 백성들을 위해 십자가 계획을이미 만세 전부터 세우십니다. 그 계획이 아담의 타락 전 작정인지,타락 후 작정인지개혁신학계에서도 아직 결정이 나질 않았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구원의 확실성입니다. 하나님의 작정은 실수가 없고, 반드시 일어나야 할 일을 일으키십니다. 우연처럼 보이는 사건 또한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작정안에서 일어나는 필연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사건은 유대 백성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라!”라고 자유의지로 선택해서 그렇게 된 것처럼 보입니다.또한 빌라도는 그 민심의 자유의지의 결정에 로마총독이라는 공식직함으로 십자가형이라는 로마법의 최고형을 언도합니다.그것 또한 개인의 자유의지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각 사람들의 완전한 자유의지로인한 십자가 사형이 집행되었고, 그것이 우연처럼 보이지만, 성경은 그것을우연이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구약 성경은 수도 없이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에 대해 예언합니다.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그렇게 예고 했다면, 그것이 말해 주는 것이 뭘까요?예수님의 관한 그 어떤 것도 우연이 아니며, 그것은 철저히 하나님의 작정 안에서일어난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뭘 말씀하는 것일까요? 구원의 확실성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사람들은 우연히 예수님을 믿고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은 반드시 구원시키시며, 십자가가 그들에게 반드시 유효하다는 것을 확정시키는 구원의 확실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작정하셨다면, 그것은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구원의 은혜요, 또한 사람개인의 공로를 내세 울 수 없는 무조건적 선택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작정은 절대불변하며,반드시 시행되는 확실성의 은혜입니다. 또한 사람의 자유의지가 완전히 자유롭게 발휘되면서도,우연이 아니라, 절대적이고 주권적인 하나님의 작정을 위배하지 않는 신비롭고 은혜로운하나님의 뜻의 결정체입니다.

8/21/2017 11:44:00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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