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나눔
소교리7-2 : 하나님의 작정과 고통의 문제(엡1:5, 요9:1-5, 2017년7월30일)

소교리7-2: 하나님의 작정과 고통의 문제(1:5, 9:1-5,2017730)

    하나님의 작정에 대해, 소교리문답 제7문은 이렇게 정리합니다. “하나님의 작정은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을 미리 정하셨습니다.” 1: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사람의 구원에 관한 작정을 예정이라는 단어로 기록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리의구원에 관한 모든 것만 미리 정하시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모든 것을 정하십니다.

    기독교 신자가 흔히들 착각하는 것은, 하나님은 구원에 관한 것에만 관여하시고 정하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또는 하나님은 인간에관한 일 특별히, 하나님의 자녀들에 관한 생사화복을 작정하실 뿐이다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세상 사람들이나 생태계 같은 것은 큰 사건이나 중대한 사건에 한번씩 관여할 뿐, 내버려 두신다는 믿음입니다. 이것을 이신론이라고 부릅니다.

    많은 기독교 신자들이 생각하길 자신은 이신론과 상관없다고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은연중에 이런 이신론 사상이 기독교 신자들 안에도 들어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누군가 나는 매 주일 하나님을 만나러교회당에 갑니다.”라고 말했다면, 이 말 자체로 틀린 말이 아닙니다.그러나 만약 그렇게 말한 당사자가, 정말 주중에는 하나님을 전혀 만나고 있지 않다면그것은 이신론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전혀 무관하게 살고, 순종하지도,경건에 이르는 연습도, 예배의 삶도 살지 않고,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전혀 잊고 살면서, 주일 아침이 되어서 예배당에 나오는 것은 이신론의 신앙입니다.

    신자가 기독교라는 종교적인 세계관에 갇혀서,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면 그런 착각을 합니다. 하나님은 엄밀히 말하면, “기독교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모든 것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크고 작은 일들을 정하십니다. 만물에대한 것을 주권적이고, 임의적으로 모든 것을 정하십니다. 그리고 그작정은 인생에 관한 것 뿐만 아니라, 모든 생태계에 대한 것 까지 관여하십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는 조류 생태계의 생사와 법칙을 정하십니다.하나님께서 타조에 대해서 뭐라고 말씀하시는지 욥기에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에의하면, 타조는 알을 흙 속에 묻어두고는 마치 자기 새끼가 아닌 것처럼 모질게 대한다고 합니다.그래서 들짐승이 와서 그 알을 밟아 버릴 수도 있는데, 타조는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고기록합니다(39:13-16). 그런데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이는 하나님이 지혜를 베풀지 아니하셨고 총명을 주지 아니 함이라”(39:17).하나님이 타조의 생육방식과 습성에 대한 것을 정하셨다는 것입니다. 매에 대해서 이렇게기록합니다. “매가 높이 솟아올라서 남쪽으로 날개를 펴고 날아가는 것이 네게서 배운 것이냐?”(39:26). 하나님께서 매의 나는 방식들을 지시하시고 명령하셨다는 것입니다.독수리는 어떻습니까? 독수리가 높은 바위에 보금자리를 짓고, 피를 좋아해서, 시체가 있는 곳에 몰려드는 습성을 하나님께서 정하셨다고 기록합니다(39:27-30). 까마귀가 먹이를 구하지 못해서 헤맬 때, 그것에게 먹이를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고 기록합니다(38:41). 이것이 하나님의 생태계를 향한 작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생태계의 모든 구성과 원리와 심지어모성본능까지도 작정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조류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신다고설명하십니까?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10:29). 참새를 두고 하신 말씀이죠. 여기에서허락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하나님께서 결정하신 것을 어떤 특정한 시간에 반드시 이루신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허락은 하나님의 영원부터의 작정이 시행되고 발생되는 Key가 됩니다.

    이처럼 생태계의 극히 일부분인 조류 하나하나의 먹고,입고, 죽고, 사는 문제를 하나님의 허락이 없으면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고 가르칩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우연처럼 보이는 어떤 일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하나님의 작정 교리에 있어서 중요한 명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을 미리 정하신다면 하나님께 어떤 것도 우발적이지 않습니다.모든 것이 필연입니다. 일어날 일이 일어나는 것이며, 발생된 사건은 반드시 발생되도록 작정되었기 때문에 발생할 수 밖에 없는 필연의 발생입니다. 하나님께는 갑작스런 발생이란 있을 수 없으며, 하나님의 계획과 의지가 없이 일어나는 일이란없습니다. 모든 일이 하나님의 작정 안에서 일어납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생의 고통의 문제 또한 우발적이 아니라,하나님의 작정 안에서 일어난다고 믿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요9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이라고성경이 기록합니다. 당시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병을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은 누군가가 지은 죄 때문이라고믿었습니다. 그래서 2절에서 제자들이 묻습니다.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제자들은 이 병의 원인을 묻고 있습니다.이에 예수님은 원인에 대해서 말씀하시지 않고, 목적에 대해서 답을 주십니다.“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3). 이 대목은 정확히 하나님의 작정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날 때부터 소경이 된 이 사람에게 어떤목적을 가지고 이런 고통을 주셨을까요? 빛입니다. 5,“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예수님께서 자신을 빛으로 소개하십니다.여기에서 소경에게는 두 가지 종류의 빛을 주시겠다는 의미입니다. 첫째,육신의 빛곧 시력을 회복시켜 주시겠다는 것과, 둘째, 영적인 빛곧 구원의 빛 가운데 들어가게 해 주시겠다는것입니다. 말하자면 육신의 빛을 주기 위해서 날 때부터 보지 못하도록 작정하십니다. 또한 이 육신적인 시력이 없이 태어난 그 사람의 고통은, 결국 눈을 떠지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결국 이렇게 정리될 수 있습니다. 그 맹인이 눈이 멀지 않았다면, 예수님을 만날 일이 없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그 맹인에게는 날 때부터 앞을보지 못하는 그의 고통이 필연적인 것이어야 했습니다.

    이 맹인에게 하나님의 작정은, 두 가지 그림으로 나타납니다. 첫째 작은 그림은 시력회복입니다. 둘째, 큰 그림은 구원입니다. 병을 낫는 것을 통해서,예수님을 구주로 인식하고, 믿게 되는 과정을 작정하셨습니다. 이런 개념을 이해한 후에 다시 본문을 봅시다. 1,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이 글을 무심코 보면,“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라는 말이 우연의 한 장면처럼 느껴집니다.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눈으로 보면 그렇지만, 사실은 우연이 아닙니다.예수님이 그냥 우연히 가신 길이 아니라, 그 길을 가실 수 밖에 없는 작정 안에서벌어진 사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 길을 가신 것도 우연이아니며,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 것도 우연이 아닙니다. 성경은그 어떤 것도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작정에는 큰 두 가지 실천적 기둥이 있습니다.바로 그 시간그 장소입니다. 예수님은 맹인을 만나기 위해서 그 시간그 길을 가셔야만 했습니다. 또한 맹인의 입장에서는 그 시간그 길에 있어야 만 했습니다. 이것이 작정의 큰 그림입니다. 아무것도 우연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시간은 우리삶에서 부정과 긍정으로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예를 들면, 긍정적으로때마침이라고 말할 수 있는 상황들이 벌어집니다. 반대로 불행한 일, 부정적인 일이 닥칠 때, “하필이면이라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우연히 우리에게 다가오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작정 안에서 일어납니다.

    이처럼 인생의 고통의 문제가 우연처럼 보이지만,사실은 하나님의 작정 안에서 일어나는 필연입니다. 그리고 그 고통의 문제는 많은경우 구원의 사건과 직결되도록 작정하십니다. 아프지 않았다면 예수님을 만나지 않았을 사람에게,아픔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나도록 하나님께서 인생의 그림을 그렇게 그리시기도 하십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갑작스런 사고나 불행의 요소를 통해서예수님을 만나도록 하십니다. 제 육신의 아버지가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제 부친은 유교집안에서 태어나, 직업이 어부이십니다. 술을 좋아하고, 담배 좋아하고, 친구 사귀는 것을 좋아합니다.이런 이력은 일반적으로 예수님을 만나기가 힘듭니다. 제 아버지께서는 오토바이 사고를크게 당하시고, 기적적으로 살아나셨습니다. 아버지는 오토바이를 타고가시다가, “하필이면” “그 시간” “그 장소에서 중앙선을 넘어서 마주 오는 버스와 부딪혔습니다. 그런데 때 마침아버지의 몸이 부드러운 논에 떨어지셨습니다.그래서 크게 다치시지 않았습니다. 주변에 큰 돌밭도 있고, 아스팔트 위에 떨어질 수도 있었지만, 다행히 거기에 떨어져 목숨을 부지합니다.그러고는 깨달은 바가 있어서 그때부터 교회에 나가시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결국제 부친께서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개인에게 사고라는 것을 통해 구원으로이끄시는 과정입니다. 이 사고는 하나님의 허락에서 특정 시점과 특정 장소에서 일어났으며, 그 허락은 영원 전부터의 하나님의 작정으로부터 출발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특정한 고통을 허락하실 때에는그 고통의 종류와 시기와 정도를 정하십니다. 그리고 그 고통을 해결해 주실 건지 아니면 그대로 두실 건지에대한 결정도 하십니다. 게할더스 보스는 심지어, “당연히 질병과 그질병의 본성, 나아가 치료제의 효능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이 포함된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인생의 고통의 정도와 한계를 세밀하게 정하십니다.

    질병에 대한 하나님의 작정은, 질병의 종류를 정하십니다. 그리고 그 개인에게 주어질 질병의 숫자를 정하십니다.어떤 이에게는 하나의 질병을 주시기도 하고, 어떤 이에게는 여러 가지 질병을 한꺼번에주시기도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질병의 기간을 정하십니다. 어떤 이는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가지고 갑니다. 또 어떤 이는 40대가 되어서야질병을 가집니다. 또 어떤 이는 평생 건강하게 지내다가 인생의 황혼기에 병을 얻는데, 그것이 원인이 되어서 죽기도 합니다. 그리고 또한 하나님은 질병의 정도를 정하십니다.어떤 이의 질병은 모르핀을 자주 맞아야 될 정도 심한 고통을 동반하도록 하십니다. 또 어떤 이에게는 모르핀을 맞지 않아도 참아 낼 정도의 약한 고통을 주시기도 하십니다. 이모든 것을 하나님의 작정 안에서 결정하십니다.

 이 사실을 생각하면 참 원망스러운 생각이 듭니다.그러나 한편으로 이 모든 질병의 종류와 모든 세세한 모든 것을 정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면, 오히려 은혜의 길이 무엇인지 보게 됩니다. 오히려 이 모든 고통이 우연히 발생한 것이라면,너무 막막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혹 너무너무 가혹한 질병이 주어졌다고 할지라도하나님께서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주시기로 작정하셨다면 그것이 설혹 고통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신뢰함으로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작정은 참으로 신비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이런 고통을 좀 덜어주어서 하나님의 나라에 더 큰 일들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육체에 질병이 있었지만, 죽을 때까지 그 질병을 가지고 가도록 하셨습니다. 디모데는 위장병이 있었고, 몸이 약해서 자주 병치레를 했습니다(딤전5:23). 그래서바울은포도주를 조금씩 쓰라고 권면했습니다. 아마도 디모데는 포도주를 약간씩 쓰면 도움이 될 정도의 위장병과 질환이 있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러나 바울은 최소한 디모데보다는 좀 더 중한 병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세번씩이나 병을 낫게 해 달라고 간구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울과 디모데의 질병을 낫게 하시지 않고,각각에게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십니다.

    기독교 신자가 되면 질병이 반드시 나을 것이라는 기대는순진한 생각입니다. 때로는 그런 방법으로 일하시기도 하시지만, 훨씬많은 경우에 하나님은 병을 낫게 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각자에게 가장 은혜로운 방법으로 그 질병이나고통의 문제를 다루십니다. 어떤 이에게는 평생을 질병을 가지게 하시기도 하고, 어떤 이에게는 어느 날 낫게 하시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그 두 경우에 다 하나님의 작정은 선하십니다.우리는 그런 생각을 해 봅니다. 병을 낫게 해 주시면, 더 힘있게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을 건데, 왜 그렇게 하시지 않는가?

    나는 개인적으로 존 칼빈이 55세까지 밖에 살지 못했다는 점에 대해서 아쉽게 생각합니다. 그는 에스겔서를 쓰다가 다 마치지못한 채, 만성 위장질환과 편도선염, 결석증으로 투병하다가1564년에 생을 마감합니다. 사실 칼빈이 성경의 각권의 주석을 거의 다 썼는데,몇 권 정도는 쓰지 못했습니다. 그 중에 가장 아쉬운 부분이 요한계시록에 대한 주석을쓰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에스겔을 마무리 했더라면, 그 다음순서가 요한계시록이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칼빈에게 건강을 좀 허락하셔서,신앙의 후손들을 위해서 요한계시록 주석을 쓸 시간을 주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렇게 하시지 않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기독교신학에 큰 손실이고 아까운 부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칼빈의 날수를정하시고, 그대로 시행하십니다. 그럼 왜 하나님께서는 인생에게 각각여러 가지의 고통을 해결해 주시지 않을까요? 나는 개인적인 각자 각자의 고통의 문제에 대해서 속시원한 답을드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성경이 우리에게 이 고통의 목적이 무엇인지 보편적이고 궁극적인 답을 주십니다.

    벧전2: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로 부르신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받으신 고난에 동참하고,그분의 발자취를 뒤따라 가게 하기 위해서라고 성경이 밝힙니다. 우리에게 주신 십자가가추상적인 십자가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갈2:20에서 사도 바울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작에 못 박혔나니..."라고 한 그 십자가는 우리가 2000년 전에 골고다에 같이 못박혀서 고통을 받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현재 우리가 그 주님의 십자가에 동참하고 있는 "십자가의 현장성"을 말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에게 주어진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나에게 참된 의미의 십자가이며,나 또한 나에게 작정된 고통의 문제를 통해서, 각자의 십자가를 지게 하시는 것입니다.그래서 결국 주님의 십자가가 그냥 역사속의 십자가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실제로 살아있는 십자가가 되는 것입니다.

7/30/2017 6:56:00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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