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교리7-1: 하나님의 작정과 주권(엡1:5, 롬9:13-30,2017년7월23일)
하나님의 작정 교리는 신,구약 성경 전반에 흐르는 중요한 기둥입니다.하나님의 작정교리를 잘 못 이해하고 있거나, 또는 전혀 이해가 없는 사람들은 성경을읽어도 무슨 뜻인지 모르고 읽을 확률이 높습니다. 그 만큼 작정교리는 성경을 이해하는데, 또한 신앙생활에 성경의 말씀을 적용시키는 데 아주 중요한 교리입니다.
작정이라는 한글 단어는 성경 여러 곳에서 나타납니다.성경에서 나타나는 작정의 뜻은 대게, “계획,””목적,”“뜻,” “의도,” “경륜”이라는 말과 동일하게 쓰입니다. 나는 이 모든 단어를한 마디로 “신적 결정”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신적 결정”이라는 단어에서 받는 느낌이 뭡니까? ‘단호함,’‘타협 없음,’ ‘번복불가’ 이런 느낌을 받습니다.하나님의 작정이라는 개념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결정을 타협 할 수도,변경할 수도 없고, 아무도 뒤 짚을 수 없는 신적결정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결정은 절대적이고 주권적입니다. 그렇지만 불공평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롬9:13-14,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여기에 “불의”라고 번역된 단어가 새번역성경과 현대인의성경에서는 “불공평”이라는 단어로 번역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은 사랑하고에서는 미워하였다”라는 표현은 구원의 선택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한 배에서 태어난 쌍둥이 형제를 작정하실 때, 한 명은 구원으로, 또다른 한 명은 영원한 멸망으로 가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하나님의 결정에 아무도 불공평하다고 따져물을 수 없다고 성경이 기록합니다. 이 기록을 읽을 때 우리의 마음에 드는 생각은, “하나님이 너무 불공평하신 것 아니냐?”입니다. “에서에게는구원 받을 수 있는 기회조차 주지 않고, 처음부터 그럴 수 있느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이 생각하는 공평의 기준과 하나님의공평이 다를 수 있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사람이 생각하는 공평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첫째,“똑같이 대접 받는 것”입니다.평등과 관련된 것이죠. 둘째, “일한 만큼대접 받는 것”입니다. 보상과 관련된 것이죠. 이 두 가지는 인류가 시작되면서 지금까지 인간에게 나타나는 변함없는 양상입니다. 1. “똑같이대접 받고 싶어 하는 욕구”는 지금이나 고대시대나 변함이 없습니다. 나는 두 딸이 있습니다. 얼마 전 큰 딸아이가 고등학교를 졸업해서, 선물로 처음으로 스마트폰을 사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작은아이가 자기도 사달라고 그랬습니다. 이유는 “언니는 사주는데,왜 나는 사주지 않느냐? It’snot fair.” 라고 하면서, 공평의 문제를 언급했습니다. 그런데 옆에서듣고 있던 언니가 그럽니다. “지금 동생에게 스마트폰을 사주면 불공평 해요. 저는 고등학교 내도록 갖고 싶어도 갖지 못했는데, 동생은 아직 중학생인데 사 주면,It’snot fair.”라는주장이었습니다. 동생도 공평을 말하고, 언니도 공평을 말하는데 서로 주장은 엇갈려도 그 마음 본연의 중심은 같은 데서 출발한 것입니다. “나는 똑같이 대접 받고 싶다”입니다. 이것이21세기에 일어나는 일상의 공평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고대사회는 어땠을까요? 인류가 막 시작되었을 때, 최초의 아기가 탄생합니다. 가인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둘째가 탄생하는데, 이름이아벨입니다. 이 이야기가 창4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인류 최초의 형제 이야기는 살인이라는 비극으로 치닫습니다. 물론 창4장의 기록의 목적은 범죄한 아담의 후손들이 어떻게 비도적이며, 죄로 물들는지를 보라!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어떻게 이것을 회복해 가시는 지를 보라!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성경의 기록목적과 해석학의 관점이 아닌,공평과 불공평의 관점으로 이것을 보자는 것입니다. 형 가인이 동생 아벨을 쳐 죽인사건의 발단은 다름아닌 제사였습니다. 하나님이 아벨과 그 제물은 받으셨지만, 가인과 그 제물은 받지 않으십니다. 이 제물에 관한 가장 흔한 해석은, “아벨은 피의 제사를 드렸지만, 가인은 곡식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은 아벨의 것은 받으셨지만, 가인의 것은 받지 않으셨다.”라는 식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레위기를 통해서 곡식제사를 명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자신 스스로 모순되는 행동을 하실 리가 없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차별”하는 듯한 행동을 하셨는지에 대해서, 성경이 뭐라고자세히 밝히고 있는지 먼저 살펴보아야 합니다. 창4:4-5, “…여호와께서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여기에서 우리는 과연 하나님께서, 가인과 아벨의 “제물”만을 받으셨는지 유심히 봐야 합니다. 사실은 하나님이 제물만을 받으신 것이 아니라,“아벨과 그의 제물”그리고 “가인과 그의 제물”이라고 기록합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제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선적으로 사람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런 측면에서 하나님은 사실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가인”을 받지 않으신 것입니다. 이것을 롬9장의 “에서와 야곱”에 대한 기록과 연관 지어 보면, 하나님은“가인은 미워하시고, 아벨은 사랑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작정입니다.
우리는 이런 관점에서 보면, 가인이 왜 그토록 분노했는지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가인은 자신의 제물이 받아들여지지않았다는 데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배제 당하고 있고, 뭔가 차별당하고 있다는 데 대해서 분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작정이 가인이 아닌 것은 창4장 후반부에 가서 분명해집니다. 창4:25, “아담이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여기에서 아벨 대신에 “다른 씨”라는 표현을씁니다. 그리고 그 “다른 씨”는 셋이라고 밝힙니다. 하나님의 작정이 더 분명히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가인은 “미워하셨고,” 아벨을 대신할 “셋”을 “사랑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뒷장 창5장에 가면, 아담의 계보가 셋으로 이어진다는 것이 나옵니다. 결국 이 셋의 계보 마지막은 노아로 끝납니다.그리고 노아와 그의 가족은 구원을 얻습니다. 하나님의 작정은 노아의 구원 사역으로귀결됩니다.
사실은 아담도, 가인도,아벨도, 셋도 모두 홍수 심판으로 죽었어야 할 인생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작정은 누군가를 살려두는 것이고, 그 살려두시기로 한 하나님의 구원의 작정은셋의 계보를 통해서 일으키십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의 작정은 궁극적으로구원과 깊은 관련을 가지고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그것은 반드시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임의적인 작정의 은혜로선사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구원받은 신자로서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우리가 신자가 되었다면 우리에게 좀 평안과 행복을 주시면 되는 것 아닌가?”라는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바람대로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늘고통이 따르고, 오히려 불신자들이 세상적으로 잘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작정은 물질세계의 풍요로움을 주기 위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작정의 최종적인 관심은, 영적인 세계에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주실 자에게 주실 것들을 주시고, 일으키실 것을 반드시 일으키신다는 것입니다.그리고 이것마저도 하나님의 은혜라는 개념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을 대하는 방식을보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택하시고도 “불공평한 방식으로 홀대”하시기도 합니다. 눅16장에 보면 나사로와 부자 이야기가 나옵니다. 나사로는 천국에 가고 부자는 지옥에 간다는 골자의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신자와 불신자라는 관점으로 봅시다. 나사로가천국에 갔다면, 이 땅에 살았을 때 신자였다는 말이고, 부자는 지옥에갔다면 살았을 때 불신자였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작정의 관점에서 보면, 신자는 창세전부터 구원받기로 예정 된 사람이므로 나사로는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에 의해 예정 된 신자입니다. 반대로 부자는 구원의 예정 밖에 있는 사람입니다.그런데 나사로가 이 땅에서 어떤 대접을 받았나요? 그는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눅16:21)라고 성경이 기록한 것 처럼, 거지였습니다. 뿐만 아니라,나사로의 온 몸은 “헌데 투성이”(눅16:20)라고 기록한 것처럼, 종기와 부스럼 투성이였습니다. 나사로는돈 없는 것도 서러운데, 몸이 아프기까지 합니다. 나사로는 세상적으로보면,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신자입니다.
이 이야기를 읽을 때, 많은 독자들이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 나사로 같은 불행한 거지도 신자로 부름 받고 구원받을 수 있구나.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는신분고하를 막론하고 주어지는구나!” 그러나 나는 이 이야기를 대할 때 그렇게 보지 않고, 다른 관점으로 봅니다. “나사로 같이 하나님의 자녀로 예정 된 사람도, 저렇게 병 걸린 거지로 불행한 삶을 살 수 있구나!” 성경은 신자의 이 땅에서의 삶의 질에대해서 전혀 관심을 쏟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신자가 평균적인 세상적인 삶의 질보다 현격히 떨어지는 삶을살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뿐만 아니라 불신자보다 더 못한 삶의 질을 평생 살다가 이 땅을 떠날 수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것이 자신의 게으름이나 나태함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작정 안에서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사실을 나사로의 이름 뜻에서 더 확고히 합니다. 나사로는 히브리어로 “하나님이 도와주시는 사람”이라는뜻입니다. 우리는 나사로라는 인물의 실제 인물인지 가상의 인물인지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성경이 나사로라는 이름을 기록하고 있고, 그 이름의 뜻이 “하나님이 도와주시는 사람”이라는 것은 그의 인생이 하나님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시사해 줍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 땅에서의 인생은 신자였음에도 물질적으로 육신적으로 형편없이 지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작정이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의 작정은 이렇게 요약될 수 있습니다.1. 인생의 실패나 불행의 요소가 반드시 죄악과 관련되거나 저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반대로, 2. 인생의 번영과 행복의 요소가 반드시 하나님의 대한 깊은 신앙심 때문에 받는 보상이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세요. 이 두 명제에 대해서 많은 예가있습니다. 열왕기하 13-14에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불신앙에도그들의 번영을 허락하십니다. 여로보암 2세는 “악한 왕”이었지만 솔로몬 제국을 회복합니다(왕하14:23-27).여호아하스는 “악한 왕”이었지만 그의 기도가응답됩니다(왕하13:4-5). 심지어 ‘아사랴’로 불리는 웃시야왕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행하였다”(왕하15:3)고 기록하고서는 단지 “산당을 제거하지 아니하였으므로”(왕하15:4)문둥병이발병합니다. 그리고 그 병을 평생동안 가지고 갑니다.
웃시야의 입장에서 보면 억울합니다. 불공평합니다. 여로보암 2세와 자신을 비교해서 보면,자신은 잘되야 되고, 오히려 여로보암 2세는이 땅에서 형편없이 대접을 받아야 옳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히려 악한 왕 여로보암 2세를 호의호식하고, 번영의 시대를 주십니다. 그런데 웃시야는비교적 선한 왕입니다. 그런데 형편없는 불행한 인생을 보냅니다. 불공평하게보입니다.
또 이어서 보세요. 아마샤는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한”(왕하14:3)왕이었고, 심지어 모세의 율법을 잘 지켜 행한(왕하14:6)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북 이스라엘의 악한 왕에게 패하여 암살당합니다.
이처럼 성경을 읽다 보면, 성경은 수많은 선한 사람들에게 “불공평”하게 대우하는것처럼 보이고, 오히려 악한 사람들에게는 아량을 베푸는 것처럼 보이는 곳이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이렇게 기록하고 있는 것은, 기독교 신앙이 “인과응보”사상이나 “권선징악””사필귀정”같은 단순한 도덕적 철학들을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다스리시는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작정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다스림이라면,사람의 구원에 관한 것 또한 주권적인 다스림으로 나타납니다. 그것을 성경은 “예정”이라는 낱말로 표시합니다. 본문 엡1: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라고 기록하듯이, 예정은 하나님의 “그 기쁘신 뜻대로”하시는 작정이라는말입니다. 이 표현에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뭡니까? “주권적,”“타협불가,” “변경불가”라는 느낌입니다.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고 이 자리에 있는 것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신 덕분입니다.
그러면 이 예정은 언제 이루어졌을까요? 엡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하나님의 작정은, 창세전에 영원한 시간 속에서 이루졌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미 그 때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라는 이름은 성부 하나님이 이 땅에 오시고 난 후에 불려진 이름입니다.그렇다면 “창세 전에”라는 것과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의 시간적 차이가 얼마나 될까요? 수치적으로 말할 수 없지만, 굉장한 시간적 차이가 존재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자신의 자녀로 부르시려고 예정하실 때, 그리스도 안에서 하셨다고 했습니다.뭘 말하려는 것일까요?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미 창세전에 그 계획을세우셨다는 말입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구원에 관한 작정이 아담이 범죄한 후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이미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시간 역사 속의 사람의 범죄함을 보시고(아시고),그와 함께 십자가의 구속 계획도 함께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하나님의 작정은하나님 입장에서 예상치 못한 갑작스런 인간의 타락에 대한 수습책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이고절대적인 다스림 가운데서 일어난 신적 결정입니다.
이 사실을 안다면 우리는 인간적인 공평을 논하면서,하나님께 나의 억울함과 불행의 요소를 가지고 따져 물을 수 없게 됩니다. 인간적인관점에서 보면, 가장 “억울함”을 호소해야 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억울함을 가지시지 않을 뿐더러,오히려 자신의 변함없고 영원한 작정을 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로예정하셨다는 사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