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교리6: 삼위의 한분이신 하나님(고후13:13, 요1:18, 요10:30, 요15:26,2017년 7월 16일)
성경의 가르침 중에서 가장 설교하기 어려운 주제가 삼위일체 교리입니다. 나는 오늘 삼위일체교리를 증명하거나 논리적 설득의 방식으로 설교하지 않을 것입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신적이고 신비의 영역이기때문입니다. 단지 성경이 이에 대해서 뭐라고 말씀하고 있는지 요약하고, 몇 가지 명제로 정리해 보려고 합니다.
먼저 용어 문제부터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혹자들은 “삼위일체”라는 말이 성경에 나오냐? 라는 질문을 합니다. 성경은정확히 이 단어를 사용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많은 성경구절이 삼위일체 교리를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에 이용어를 쓴다고 해서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이 “삼위일체”같은 말처럼, 명시적으로 기록하지 않는 신학적 단어들을 많이 사용합니다. 예를 들어 회심, 칭의, 견인, 성육신 같은 단어들은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심지어 우리에게 익숙한 “성화”라는 단어도 한글 성경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간혹 NASB같은 영어 성경에서 sanctification이라는“성화”라고 번역할 수 있는 단어도, 한글 성경에서는 “거룩하게 하다”로 번역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단어들이 의외로 성경에 등장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실이 기독교신앙을 훼손하거나 왜곡시키지 않습니다. 오히려 3가지 정도의 유익이있습니다. ①교육적 유익입니다: 한 단어에 깊은 성경적 사상을 다 담아서쉽게 배우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②보존의 유익입니다: 한 단어로 성경의사상을 담아서 후손들에게 잘 물려 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후손들이 새로운 성경해석이나 사상들을 다시 정립하기위해서 치열한 상황에 놓일 필요가 없습니다. ③교회수호의 유익입니다: 이단 사상이 공격해 올 때, 신자는 여러 신학적 지식이 없더라도, 한 단어로 그것을 반박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결국 교회와 성경의 진리를 수호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중에 혹 성경의 단어를 쓰지 않고, 인간이 만들어 낸 신학용어나 철학 용어를사용한다고 해서 마음의 불편함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사도 요한도 요한복음 1장을 기록할 때, 그리스어로 기록했는데, 성육신 하신예수님의 신성을 어떻게 이방인들에게 이해시킬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요1:1의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의 “말씀”이라고 한글로 번역된 단어는 본래 “로고스(λόγος )”라는 단어로 요한 사도가 썼습니다. 이 “로고스”라는 단어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단어도 아니고, 본래 기독교적인용어도 아닙니다. 이 단어는 그리스 철학에서 이미 쓰고 있던 단어입니다. 그런데 헬라파 사람들이 이 단어를 들었을 때, 그들은 바로 깨닫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신이구나”라는 사실을 다른 설명 없이 바로 이해하게 됩니다. 이것이 “용어”의 힘입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성경의가르침을 더 잘 반영하고 보존하게 해 주고 또한 교회를 지키는 하나님의 방법임을 알아야겠습니다.
본문 고후13:13은 삼위의 하나님을 열거하면서 소개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 성령. 이 본문에서는 삼위 하나님께서 신자와 교제하실 때 나타내시는 각각의 특성들을 기록한 것입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새 은혜 언약의 중보자가 그리스도 이심을 보여줍니다.2. 하나님의 사랑과: 성부로서의 사랑의 주권, 신적 사랑의 영원하심, 값없음, 불변하심을 보여줍니다.3. 성령의 교통하심: 성령이 신자를 위로하시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구절을 받아 읽는 1차 독자들은 약간의 신선한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특히 그 중에는 유대교에서 개종한 그리스도인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구약성경에 나타나는“유일하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 익숙합니다. 그래서 고후13:13에 나타나는 새 단어—은혜,사랑, 교통(위로)—는 여호와 하나님의 전유물로 여겨졌습니다. 은혜, 사랑,교통. 헬라어 원어 성경에는 카리스(χάρις), 아가페(ἀγάπη), 코이노니아(κοινωνία) 세 단어를 썼습니다. 카리스는 구약의 “헤세드(חֶ֫סֶד)”라는 단어인데요.한글 성경에는 “자비, 인애”라는 단어로 주로 번역되었습니다. 아가페는 절대적인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뜻으로 쓰였고요.코이노니아는 하나님과의 교제가운데 주어지는 위로에 초점을 맞추어서 쓰여졌습니다. 개종한 그리스도인들은 유일신 여호와 하나님 외에는 사람에게 자비와 인애와 사랑과 위로를 더해 줄 다른 어떤 신이 없다고 믿고 있었기에이 표현은 혁신적으로 다가 왔습니다. 마치 성경이 여호와 하나님의 전유물인 구원의“은혜”를 그리스도에게 나누어 주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위로”라는 것을선포하셨는데, 그 구약의 유일신 여호와 하나님이 성령께 이 위로사역을 나누어 주고 있는 것처럼 묘사되고 있기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곧 깨닫게 됩니다.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은곧 신약 시대에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더 명확하게 드러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도 성령도 같은 하나님임을 알게 됩니다.
본문 요10: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예수님의말씀입니다. 헬라어 원어 성경을 직역하면, “나와 아버지는 1로 존재한다(ἐγὼ καὶ ὁ πατὴρ ἕν ἐσμεν.)”입니다. 이것을 영어 성경에서는, “I and the Father are one.”이라고 번역했습니다.만약 사도 요한의 글들—요한복음, 요한서신, 요한계시록—이 없었다면, 기독교 신자들은 삼위일체에 대한 교리를 제대로 이해하기가 힘들었을 정도로 사도 요한이 큰 공헌을 합니다.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는하나다”라는 말처럼 명확한 표현이 없을 정도로 삼위일체의 교리를 보여줍니다. 사도 요한은 “동일시의 원리”를 사용하여, 삼위일체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요한은 이 표현을 설명하기 위해서 다른 표현들을 계속적으로말합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14:9). “나를 미워하는 자는 또 내 아버지를 미워하느니라”(요15:23).
그러면 사도 바울의 고후13:13의 표현과 사도 요한의 표현들에서 나타나는 삼위일체 교리의 중요한 명제는 무엇일까요? 1. 하나님은 세 위격이시다. 2. 각 위격은 완전한 하나님이시다. 3. 한 분 하나님이 계신다. 이 세 가지 중 어느 것 하나도 빠지거나, 더 강조하거나, 덜 강조하면 안됩니다. 동시에 이 세가지의 명제가 항상 같이 가야 합니다. 이것을 지키지 않을 때 기독교 역사를 보면 삼위일체와 관련한 이단사상들이 난무했습니다. 이런 이단들의 양상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하나는 단일신론입니다. 이 단일신론은 두 가지 부류로 나뉩니다. 원래 한 하나님 밖에 없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양자로 삼았다고 하는 양자론이 있습니다.그리고 한 하나님이 여러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이고,또한 성령님이다라고 주장하는 양태론이 있습니다. 2. 또 하나는 삼신론입니다.성부, 성자, 성령이 각기 다른 하나님이라고설명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영어로 표현 할 때 유의해야 합니다. “Three Gods”가 아닙니다. “Three Persons”입니다. 세분의 하나님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세 분의 위격 또는 인격이 존재한다고 표현하는 것이맞습니다. 칼빈 시대의 세르베투스라는 사람은 삼위일체를 표현하길, "머리 셋 달린 괴물"이라고 했습니다. 결국 그는 이단으로 정죄 받았습니다. 삼위일체는 1/3씩 본질을 나눠 갖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 하나님"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Three Persons를 번역할 때도 "위격"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낫다고 봅니다. 물론 persons를 인격이라고 번역한다고 하더라도 의미상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위격이 좀더 좋은 번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한국말의 인격이라는 말이 갖는 특성 때문에 오해가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흔히들 “다중 인격 장애”라는 말을 쓰지 않습니까? 전문용어로는 “해리성 정체감 장애”라고 한다고 하는 이말에도, “인격”이라는 단어를 씁니다. 그래서 한 육신 안에 여러 개의 인격이 존재하는 사람이 실제로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삼위일체의 persons는 인격으로 번역한다고 해도 오류는 없지만, 이런 한국말의 어감상,위격이라는 말이 오해를 줄일 수 있는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삼위 하나님은 서로 어떤 관계를 가질까요? 신학적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내적사역”이라고 부릅니다. 먼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2장 3항의 표현을 빌리겠습니다. “①성부는아무에게서도 말미암지 않으시고, 나지도(begotten), 나오지도(proceeding) 않으신다. ②성자는 영원히 성부에게서 나시고, ③성령은 영원히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신다.”
여기에서 우리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되는 표현이 있습니다. “성자는 영원히 성부에게서 나시고”달리하면 성자 하나님은 성부하나님이 낳으셨다는 표현입니다. 이렇게 표현한 이유는 성경이 그렇게말씀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요1:18, “…아버지 품 속에 있는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성육신 하신 예수님이 “독생하신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사실 예수님을 “독생자”라고 부르는 표현은 사도 요한의 글에서만 단 5번 나타나고 다른 성경에는 없습니다.우리는 이 “독생자”라는 표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아버지 하나님이 어머니 하나님을 만나서 결혼하고, 아들을 낳았다는표현일까요? 아니면 어떤 결혼은 아니지만, 마치 생물학에 배운 것처럼,동식물 중에 암수 구분 없이 생산하는 “무성생식”같은 방법으로 하나님이 아들을 낳았다는 말일까요?
이것은 반드시 하나님의 속성교리와 접목해서 이해해야 합니다.우리는 하나님의 영원성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하나님에게는 시간이 없이 항상 현재로만나타나신다 라는 것이 영원성입니다. 하나님에게는 시간의 흐름이 없기 때문에, 지나간 과거나 다가올 미래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지난 과거지만, 지금 하나님은 과거에 현재로 계시고, 우리에게는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이지만,지금 하나님은 미래에 현재로 계십니다. 그래서 “영원히”라는 단어를 붙여서 “성자는 영원히 성부에게서나시고”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사이에시간의 간격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상하구분이 없으며, 본질적으로변했거나,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개념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은 유전학적으로 생체학적으로 서로 공유하는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완전히 다릅니다. 첫째, 시간적으로 다릅니다.아들이 아버지보다 앞설 수 없고, 또한 아버지가 아들과 동시간 대에 날 수 없습니다.그래서 인간의 아버지와 아들은 본질적으로 서로 다릅니다. 그러나 성자 하나님이 영원히성부 하나님으로부터 나시는 것은, 시간적으로 본질적으로 전혀 차이가 없습니다. 그래서 “동일 본질”이라는 표현을 씁니다.만약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사이에 시간의 차이가 있다면 “동일 본질”이 아닙니다. 그러면 결과적으로 서로 다른 하나님일 수 밖에 없지요. 그러나 성부와 성자는 서로 같은 본질이십니다. 그리고 시간적으로 누가 더 앞서거나,또한 우열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부와 성자 사이에는 상하가 존재하지 않습니다.성자가 더 하등 하거나, 성부가 더 우세 하거나의 차이가 없습니다.항상 동일 본질입니다. 그렇다면 그 본질 안에 변화가 있을 리가 없습니다.항상 동일한 모습으로 존재하십니다. 인간의 지식과 이성으로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습니다.그러나 성경이 그렇게 말씀합니다.
프란시스 쉐닐(Francis Cheynell)이라는 청교도 신학자는 이렇게 말합니다.“성부는 어떤 변화나 동작 없이 가장 영광스럽고 경이로운 방식으로 성자를 낳으셨다. 성부는 어떤 변화 없이 성자를 낳으셨고, 성자는 어떤 변화 없이 나셨다.”말하자면 서로 “동일 본질”의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그러므로 성부와 성자간에는 세대차이란 존재하지 않고, 또한 존재방식의 차이란 있을수 없습니다.
그리고 “성령은 영원히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신다”라고했습니다. 본문 요15:26,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성령 하나님도 마찬가지로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나오십니다.그리고 또한 성자 하나님으로부터 나옵니다. 한때 “성령 하나님이 성부로부터 나오는 것은 맞는데, 성자로부터 나오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지금은 “성령은영원히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신다”라는 것이 가장 성경적인 표현이라고 받아들여졌습니다.
이처럼 한 분 하나님이시지만 서로 다른 관계성을 지니고 있다는 측면에서 삼위가 계십니다. 그러나이 세 위격은 항상 동일한 한 분 하나님으로 존재하십니다. 그래서 그 사역이나 관심사항이 서로 충돌하거나갈등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항상 서로의 뜻이 일치하고, 항상 함께 한본질이 한 사역으로 나타납니다.
성부의 뜻은 동시에 항상 성자와 성령의 뜻이며, 성자의 뜻은 동시에 항상 성부와 성령의 뜻이며,또한 성령의 뜻은 항상 성부와 성자의 뜻이 됩니다. 성부의 일은 성자와 성령의 일이되며, 성자의 일은 성부와 성령의 일이 되고, 또한 성령의 일은 성부와성자의 일이 됩니다. 서로 충돌하거나 갈등하거나 반목하지 않고, 항상뜻을 함께 펼치며 같이 역사하십니다. 예를 들면 삼위일체 하나님은 창조사역에 함께 계획하시고,함께 동참하셨습니다. 창1:26, “하나님이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라고 할 때, 하나님은 자신을 “우리”라고 하는 복수형으로 소개합니다. 뭘 말하는 걸까요? 그것은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창조사역부터 “함께”하셨다는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삼위일체라는 관점에서 보면 너무도 신비합니다. 성경을 “삼위”라는 관점과 “일체”라는 관점으로 읽게 되면 같은 사건도 다른 느낌이 옵니다. 삼위의 관점으로 십자가를 보면,예수님은 이 땅에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성부로부터 파송을 받았습니다(요12:45,17:18, 20:21, 요1서 4:14). 그래서 성경은 계속적으로 그리스도를 “아버지께서 …보내신것”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성자는 성부의 명령에 순종함으로 십자가를지십니다. 히5:8,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라고 표현할 뿐더러, 마26:39,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체”의 관점으로 보면, 그리스도는 아버지가 시켜서 어쩔 수 없이 하는 행동처럼 굴복적인 자세로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지신 사건입니다. 이것이 부활 사건에서 정확하게 묘사됩니다. ①성부는 그리스도를 살리셨습니다. 골2:12, “…죽은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또한 동시에 ②성자께서 스스로 살아나신 것입니다.요2:19,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 일으키리라.”예수님 자신이 스스로 죽음에서 일어날 것을 예고합니다. 요10:17-18,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얻을 권세도 있으니… ”또한 동시에 ③성령이 그리스도를 살리셨습니다. 롬8: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여기에서는 성령님이 예수님을 부활시키셨다고 기록합니다.
이런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성경의 기록이 서로 충돌하는 것일까요? 성부는 자신이 그리스도를살리셨다고 그러고, 성자는 자신이 스스로 일어났다고 그러고, 성령은자신이 그리스도를 살리셨다고 서로 자기 주장을 하는 것일까요? 삼자대면이라고 시켜서 누구의 주장이 옳은지가려야 하는 상황입니까? 아니죠. 이것은 성경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하나님이 서로 일치되며, 같은 본질로, 하나의 일을 하신다는 말씀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은 서로 다른 하나님이 아니며 같은 본질의 한 분 하나님이시라는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는 어쩔 수 없이 죽임을 당한 “억울한 죽음”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으로서 스스로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하나님의 아들이 지신 사건이고, 동시에 아버지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이 지신사건입니다. 그리스도는 인간으로서 로마의 극형으로 처형을 당한 수동적인 처형이 아니라, 하나님이시지만 스스로 십자가에 오르셔서, 저와 여러분의 모든 죄를 대신 지신 능동적인 삼위일체의하나님의 완전한 계획 가운데 일어난 사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