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교리5 : 유일신 하나님(신6:4, 사45:5-6,시10:4, 2017년 7월9일)
소교리문답 제5문은이렇게 질문합니다. “한 하나님 외에 다른 신들이 있습니까?” 이에답하길, “살아 계시며 참되신 오직 한 하나님만 계십니다.” 기독교신앙은 유일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본문 신6:4,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라고 성경이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유독 하나님만을 유일신이라고 주장합니다.왜 그럴까요? 우리는 지난 몇 주간을 통하여,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배웠습니다.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서 조금만 알게 되면, 참 신은 한 분 밖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이 당연한 이치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속성을 수없이많이 묘사하고 있는데, 이것을 요약적으로 묘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스스로 계시고, 영원토록 불변하시고, 항상 살아계시며,모든 곳에 거하시며, 모든 것을 아시며, 모든것을 하실 수 있는 존재, 또한 아무런 도움이 필요 없고, 외롭지 않으시며,실수가 없으시며, 어떠한 악이 존재하지 않는 완전한 참 선으로 존재하시는 분.”성경이 이런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서 어떤 명제를 사용해서 설명할 때에는, 신이라는 존재는 적어도이 정도는 되야 한다라는 식의 qualification(자격 요건)을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이렇게 묘사한 의도는 “신적 절대성”입니다. 말하자면 절대성은 여러 개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라야 이치에 맞습니다.
누군가 창과 방패를 들고, “이 창은 모든 것을 뚫을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또 다른 손에 있는 방패를 소개하면서,“이 방패는 모든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모순이지요.“모든 것”이라는 말을 쓸 때에는, 그야 말로“모든 것(everything”을 능가하고, 초월하는 절대적 능력을 가져야 하는 전제가 성립해야 합니다. 그러면 모든 것을 능가하는 것은수치적으로 하나일 수 밖에 없겠죠. 절대 둘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모든 곳에 거하시며, 모든 것을 아시며,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다”라는 명제는 절대 둘일 수 없는 유일의 절대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본문 사45:5,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나니 나 밖에 신이 없느니라…”이 구절을 타종교에서 들으면굉장히 언짢게 생각 할 수 있는 독선적인 표현입니다. 성경이 이와 같이 말씀하는 이유는 하나님만이 신적 절대성을가진 유일무이한 참 신이시기 때문입니다. 많은 세상 사람들이 기독교를 향하여 말하길, “왜 유독 기독교는 자기네 신만 참 신이라고 그러느냐?” 이런 기독교의 배타적인 신앙에 대해서불편한 심기를 드러냅니다. 그 불편한 심기 속에는 어떤 한 사상이 깔려 있습니다. 다원주의입니다. 다양성을 인정하고, 다양한 의견을 존중하겠다는사상입니다. 이것이 종교와 결합된 것이 바로, “종교다원주의”입니다. 종교다원주의가 기독교와 함께 할 수 없는 결정적인 이유는 구원론입니다.“구원의 길에 대해서 열어 두자”라는 것이 종교다원주의의 입장입니다.그러나 기독교 신앙의 구원에 이르는 길은, “열어 두자”가 아닙니다. 기독교가 타종교와 대화를 하지 않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구원론에 있어서 너무 큰 차이가 있기 때문에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누구든지 들어올 수 있고, 누구든지 구원을 취하는 것이아닙니다. 실천적으로는 “누구든지”라고 적용할 수 있겠지만, 신학적으로 보면 기독교 신앙의 구원의 길은 정해져 있습니다.“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을 가진 자만,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만” 들어갈 수 있는 길이며, 배타적이며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길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의 구원은 그런 측면에서 “폐쇄적이고 배타적”입니다. 그래서 “이길 아니면 안 된다.그리고 이 안에 들어와야 된다”라고 가르치는 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그러면 이 이유가 뭘까요? 행4: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라고 성경이 명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의 유일한 길이라고 가르칩니다. 배타적입니다.왜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의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하면서 또한 하나님의 유일성과 연관시켜 생각하는 것일까요?요1:18은 예수 그리스도를, “독생하신 하나님”이라고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타종교를 보십시오. 이슬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마호매트와 같은 반열의 위대한 선지자로 가르칩니다. 불교에서는석가모니와 같은 반열에, 유교에서는 공자와 같은 성인에 비유합니다.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를 선지자나 성인 정도로 끌어 내려버립니다. 이것이 새삼스런 일은 아닙니다.이미 예수님 시대에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생각하고 있던 생각이었습니다. 마16장에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사람들이인자를 누구라고 하더냐?” 이에 제자들이 대답하길, “더러는 세례 요한이라고하고, 더러는 엘리야라고 하고, 더러는 예레미야라고 하는 선지자들 중하나라고 하더이다”라고 합니다.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의 보편적인 믿음은,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라 선지자들 중에 하나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독생하신 하나님으로 믿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가 보면, 간혹 이런 사람을 만납니다. 오랫동안 교회를 다니다가 교회를 다니지 않는다고 합니다.그래서 왜 교회를 안 다니냐? 라고 물으면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는 예수님은 좋은데, 예수쟁이나, 교회는 싫다”라고 합니다. 물론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의 저변에는 교회로부터의 상처나 교회가 성경적으로하지 못한데 대한 질타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말들의 저변에는 본인들 조차도 잘 모르는 어떤 한 사상이있는데, 그것은 예수님을 하나님에서 선지자정도로 끌어 내려버리는 것입니다.
성경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설명할 때,반드시 교회와 연관시켜서 가르칩니다. “삼중적인 연합”이라는 표현을 쓰겠습니다. 이 말은 일반적인 신학용어는 아닙니다. 그러나 원리를 이해하기 쉽게 개인적으로 표현합니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와 신자가 연합해야 합니다(요15장).둘째, 신자와 신자가 연합해야 합니다(엡4장). 셋째, 신자의 연합체인 교회와 그리스도가 연합니다(엡4장). 그래서 성경은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라는 표현이 성경에 적어도 4번나옵니다(엡1:22, 4:15, 5:23, 골1:18).이것이 구원의 논리적인 과정입니다. 그래서 구원의 서정에 연합이 나옵니다.이 연합은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와 신자가 연합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넓게더 나아가서 교회는 구원 받은 백성들이 들어와서 신자와 신자들간에 연결되어지는 공동체가 됩니다. 나홀로 신앙생활하는 것은 기독교신앙의 믿음의 형태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교회없이 예수님만 좋다고 하는 것은 구원의 논리적순서에서 나타나는 일반적인 형태가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그냥 선지자로서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라,구원의 유일한 길로서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의 연합은 결국 교회라는 바탕에서꽃을 피우게 됩니다.
그러면 기독교 신앙이 유일하신 하나님만이 진리이며, 그리스도 외에는 구원의 길이 없다는 것을타협하지 못하는 결정적인 이유가 뭘까요? 십계명의 1계명 때문입니다.“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지니라.”(You shall have no other gods before me, 출20:3, 신5:7). 이 명령을 잘 못 이해하는 분들은, “성경이 다른 신들”을 말하고 있다면, 성경 스스로 타종교의 신들을 인정하는 것 아닌가?”라고 질문합니다. 이렇게 질문하는 사람의 속 마음에는 성경이 “다른 신들”을 인정하면서, 마치 하나님은 “고등한 신”이며, 다른 신들은 약간 “하등한 신”으로서 말하는 것 아닌가?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그러나 성경은 단 한번도 “다른 신”들의 존재를인정한 적이 없습니다. 성경은 신들의 상하관계를 통해서 다른 신들을 인정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오직 참신이냐 거짓신이냐를 밝히는 것입니다.그래서 제1계명에서 “다른 신들”은 인간의 산물이며,만들어진 신이라는 측면에서 ‘신’이라고 불려질뿐입니다. 성경도 그런 측면에서 “다른 신들”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러면 제 1계명에서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일까요? 좁은 의미로는 “다신론 금지”명령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궁극적인 의도는 더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은 “충성”에 관한 문제입니다. 우리는 저번 시간 설교를 통해, “언약적 지식”에 관하여배웠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믿음은, 언약 안에서 인격적 관계로 맺어진지식이 전제됩니다. 그 언약은 종주와 봉신이 있다고 했고, 봉신은 종주에게절대 복종해야 하는 계약이 성립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운 언약이 우리에게 주어졌는데,그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주어진 새로운 언약입니다. 그리고 신자는 새로운언약의 당사자가 되어서, 언약의 책인 성경을 유일한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으로 받고, 그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그 분을 알 수 있다고 배웠습니다. 이 언약적 관계에서 “종주”이신 하나님께 “봉신”인 신자가 해야 할 것은, “순종”이라고 했습니다.다른 말로 하면 “충성”입니다.
“충성”의 철학적의미가 뭘까요? “한 대상만을 향한 변치 않는 열심입니다.” 여기에서“한 대상”이 포인트입니다. 충성이라는낱말에는 충성의 대상이 단 하나 일수 밖에 없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다른 두 주인을 섬기는 데 그것을 충성이라고하지 않습니다. 미국 시민권 인터뷰 예상문제에 보면 이런 질문이 있습니다. “국기에 대해 충성을 맹세할 때, 우리는 무엇에 대해 충성을 맹세합니까?” 답: The United States라고 나옵니다. 여기에한국이나 또 다른 국가의 이름을 넣지 않습니다. 왜요? 충성은 기본적으로“한 대상”만을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충성의 신학적 의미가 뭘까요? “언약의 당사자로서 적극적이고 열렬한 태도입니다.” 봉신은 종주에게 적극적으로 충성하는 것은선택이 아니라 의무사항입니다. 대교리문답 제104문은,“제 1계명이 요구하는 의무는 무엇인가요?”라고 질문합니다. 종주에게 주어진 의무가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대교리문답 104문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제 1계명에 요구된의무는 하나님께서 홀로 참되신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하나님이심을 알고 인정하며, 따라서 그분만을 생각하고 명상하고기억하고 높이고 공경하고 경배하고 좋아하고 사랑하고 사모하고 경외함으로 그분에게만 예배하고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또 그분을 믿고 의지하고 바라고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그분에 대한 열심을 가지고 그분을 불러 모든 찬송과 감사를 드리고 전인격적으로그분에게 모두 순종하고 복종하며 그분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범사에 조심하고, 만일 무슨 일에든지 그분을노엽게 하면 슬퍼하며 그분과 겸손히 동행하는 것이다.”
이 문장에서는 느껴지는 감정이 뭡니까? 온통 하나님밖에 없는 세상 같은 느낌이 듭니다. 하나님으로 가득 차 있고, 하나님이 아니면 안 되는 세상, 하나님만이 주가 되시는 세상 같은 느낌이 듭니다.그래서 그 하나님에게 당연히 적극적이고 열렬한 충성을 발휘해야 하는 도전을 받게 됩니다. 이 충성은 소극적이 아니라 아주 적극적이고 열렬한 열심을 말합니다. 그냥 알고 있는 정도로그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리폼드신학교 조직신학 교수인, 존 프레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한번이라도 “미온적인태도”가 첫째 계명을 어기는 것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는가? 적어도 나는대교리문답 104문을 읽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다. 하나님에대한 우리의 태도가 미온적이라면 우리는 다른 것들을 주님보다 우선시하는 것이다.””미온적인 태도”라는 표현을 했습니다. 이 단어를 가장 잘 표현한 성경의 표현을 사도 요한이 썼습니다.“…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계3:15). 성경은 “미온적인 태도”에 대해서 명백하게 부정적입니다. 그런데 이 “차든지뜨겁든지 하라”고 명령하신 분이 주님이시라고 바로 앞 구절 계3:14에서 밝히는데, 그 주님을 이렇게 묘사했다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이 명령을 내린 주님을 “충성된” 분으로 묘사합니다. 기본적으로 충성은 “미온적인 태도”를 거부한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대교리문답 제 105문을 보면, “미온적 태도”에 대해서 더 명확하게 알수 있습니다. “제 1계명에 금한 죄들은 무엇인가요?”답: “제 1계명에 금한 죄들은 다음과 같다.하나님을 부인하거나 모시지 않는 무신론과 참 하나님 대신 다른 신을모시거나 유일신보다 여러 신을 섬기거나 예배하는 우상숭배와 이 계명이 요구하는 바 하나님께 당연히 드릴 것을 무엇이든지 생략하거나,태만히 하는 것과 그분을 모르고 잊어버리고 오해하고 그릇된 의견을 가지며 하나님께 합당치 않는 악의로 그분을 생각하는것과 그분의 비밀을 감히 호기심을 가지고 꼬치꼬치 파고들려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대교리문답은 제 1계명을 범하는 죄를, “하나님을 부인하거나 모시지 않는 무신론”이라고 먼저 밝힙니다. 저와 여러분 중에 “하나님을 부인하는무신론자”는 없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뒤에 표현,“하나님을 모시지 않는 무신론”이라는 표현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이 표현에 대해서, 존 프레임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무신론자는 하나님이 계심을 믿기는 하지만 그의 언약적 종이 되기를 거부하는 자를 말한다.”이것은야고보서2:19에서 분명해집니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잘 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귀신도 믿는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귀신에게 없는게 뭘까요? “언약적 관계”가 없습니다. 귀신은 하나님이 한분이심을 믿는 믿음은 있지만, 그는 언약적 종이 되지는 못합니다.귀신은 사단의 종이지요. 그래서 사단을 섬기지 하나님을 섬기지 않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계심을 믿지만 언약적 종이 되는 것을 거부하겠다고하면, “종주를 믿기는 믿지만, 봉신으로 섬기지는 않겠다”라는 말입니다. 모순입니다. 종주와 봉신의 관계는 유지하겠지만,충성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언약적 관계가 성립이 안됩니다.언약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봉신이 종주에게 열렬한 충성을 변함없이 하는 것입니다.충성 없는 봉신은 더 이상 봉신이 아닙니다. 종주의 말에 순종하지 않으면서,봉신이 되겠다는 것은 언약의 관계에서는 용납이 안됩니다. 대교리문답은 이런 사람을두고, “무신론자”라고 밝힙니다. 이것을 신학용어로는 “실천적 무신론자”라고 일컫습니다.실천적 무신론자는 자신을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신앙고백을 가진 자로 인식하면서도, 전혀 삶에서 열매가 나타나지 않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론적으로는 믿는데, 삶에 그리스도를 위한 제자도가 전혀 없습니다. 제자도의 핵심은, “자기부인”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것”아닙니까?(마16:24). 자신의 삶에 종주가 항상 존재한다고말은 많이 하는데, 자신은 봉신이 되어 본적이 없는 사람, 그 사람이바로 실천적 무신론자입니다. 본문 시10:4, “악인은…그의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 오늘날 신자들은 자신을 무신론자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그런데 그의 삶에서는 “모든 사상에서 하나님이 없다”라고 그의 가치관과 입술과 행동이 대변해 줍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이런 실천적 무신론자들이 너무너무 많다고생각합니다. 이들은 “그리스도가 자신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었기 때문에,나는 그분을 믿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신자는 언약의 당사자 입니다. 그 말은 그리스도께서십자가에 못박힐 때, “나” 또한 같이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을 말합니다.그리고 또한 그리스도의 부활에 동참한 것이며, 그래서 믿음 안에서“새언약”의 수혜자가 된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2:20)의 사도 바울의 고백은 오늘날 모든 신자들의 고백을 대신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독교 신앙의믿음을 가지게 된 것은, “그리스도만” 죽으신 것이 아니라,“나도” 거기에서 죽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내 안에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는 고백이현실이 되는 것입니다. 이 신비한 고백이 무슨 말입니까? 내 속에 내가“주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오히려 봉신이 되고, 그리스도께서 나의 “봉주”가 되신다는 실제적인 변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실천적 무신론자가 아니기를 바랍니다.십자가에서 “그리스도만” 죽고,나는 여전히 “옛모습”으로 살아서 내가 마치 종주인 것처럼 행세하는 엉터리 신자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실천적 무신론자는 삶의 고백만 있고,삶의 열매는 전혀 뒤따르지 않는, 전혀 충성스럽지 않는 미온적인 신자입니다.대교리문답 105문처럼, “하나님께 당연히드릴 것을 무엇이든지 생략하거나, 태만히 하는 것과 그분을 모르고 잊어버리고 오해하고 그릇된 의견을 가지며하나님께 합당치 않는 악의로 그분을 생각하는 것”이 체질화 된 사람입니다. 그러면서 회개도 없고, 양심의 찔림도 상실한 사람입니다.
결론입니다. 하나님께서유일하신 신이라면, 구원도 그분에게만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그리스도를통해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신다면, 우리 안에 구원의 역사들을 일으키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