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나눔
소교리4-4 : 하나님을 아는 지식(사57:15, 요5:39, 시147:5, 2017년7월2일)

소교리4-4 : 하나님을 아는 지식(57:15, 5:39,147:5, 201772)

    본문 시 147:5 하반절은 하나님을 지혜가 무궁하신 분으로 소개합니다.하나님의 지혜가 무궁하다는 것이 어떤 것 일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앞구절 시편147:4입니다. “그가 별들의 수효를 세시고 그것들을 다이름대로 부르시는도다.” 하나님의 지혜는 우주의 별들에 관한 수치적인 지식과 그 이름을 일일이 부르실 수있는 무한한 지식을 기반으로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만물에 대한 지식을 제한 없이 가지고 계십니다.심지어 시장에서 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거래 될 때, 그 참새 한 마리에대한 지식도 가지시고(12:6), 사람들의 머리카락의 개수에 대한지식(12:7)까지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지식의 방대함과 세밀함을 동시에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또한 그 지식은 습득한 지식이아니라, 본래적 지식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지식은 오래되어 구식이 되지도 않고,아직 써먹지도 못할 너무 앞서간 지식도 아닙니다. 항상 불변한 가치와 정확성을 가집니다.또한 그 지식은 시간에 제약이 없으며, 장소에 제한 받지 않습니다.하나님의 지식은 항상 참되며, 진리입니다. 완전한 지식을 가진 하나님께는 돌발상황이 없고, 예측 불가능한 일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그래서 하나님은 항상 모든 일에 선한 결정을 내리시고, 항상 그 모든 계획이 옳고또한 가장 선한 결과를 가져 오게 하십니다.

    50:20에서요셉도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을 보내고 하나님의 무한하신 지식과 선하심에 대해서 이렇게 고백하지요. “당신들은나를 해하려 하였지만, 하나님께서 그것을 선으로 바꾸시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들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하셨나니.”많은 사람들이 요셉을 죽이려고 했고, 또는 궁지로 몰아서그를 실패한 인생을 만들려고 하는 공격들이 있었지만, 결국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림, 원하시는 선한 결과로 주도적으로 이끌고 가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완전한 지식과 지혜로부터출발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식은 마치 실패하는 것처럼 보이거나,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 마치 하나님께서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일에도, 하나님께서 완전하게주도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나에게 선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일에도 결국 하나님께서 주도하고계십니다. 그래서 요셉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리스도께서 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구속사역에는 결과적으로 실패가 있을 수 없습니다.

    이런 무궁한 지식을 소유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을 알리시기위해서 사람에게 허락하신 유일한 방편이 성경입니다. 오늘 요한복음 5:39에는,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기록된 계시의 말씀인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유일한 방편입니다.나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해 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2,000년 전에 태어나시지 않고, 21세기에 태어나셨더라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온갖 첨단 방식으로 예수님의 사적들을 기록하고 보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비디오는기본이고, 인터넷 생중계를 통해서 전세계에 예수님의 사역들을 생생하고도 낱낱이 보여줄 수 있었을 것입니다.그렇게 되면 복음의 효과가 탁월했을 것이며, 예수님에 대해서 입체적으로 훨씬 더정확히 알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들이 듭니다. 하나님께서는2,000년 정도만 예수님의 탄생을 유보하셨으면 되실 것을 그렇게 하시지 않습니다. 그러고는 몇 명 안 되는 사도들을 동원하여, 성경을 기록하게 하십니다. 우리의 관점으로 보면 완전한 지식을 가지신 하나님이 복음에 더 나은 방법을 알고 계실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방법을 동원하시지 않은것처럼 보여집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실을 아시고도,지금보다 역사기록체계나 언어의 소통 방식이 훨씬 미개하던 시절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을까요? 그래서 오늘날에는 별 영향력도 없는 헬라어라는 글자로 성경을 기록하게 하셨을까요? 만약 하나님께완전한 지식의 본체가 있으셔서, 가장 완전한 계획을 세우시고 가장 완전한 결과를 만드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시다면,왜 이와도 같은 글자를 통해부족하게 보이는방법으로 자신을 계시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인격에 관한 지식이기 때문입니다.

    인격에 관한 지식은 글자로 전달하든지, 동영상으로 전달하든지 전혀 그 자체로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믿음은 온갖 신학적 지식에 대한고백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와 인격적인 관계에 대한 신앙고백입니다. 이인격적인 관계가 글자로 전달되든, 동영상으로 전달 되든 그것 자체로는 아무런 영향력이 없습니다.여러분의 배우자가 결혼 기념일이 되어서, 여러분에게 축하의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합니다.그 메시지는 카드에 딸랑 사랑합니다라는말 한마디를 글자로 적었든지, 동영상을 찍어서 거창하게 사랑합니다라고 말로 했든지와 상관없이, 똑같이 인격적입니다. 그래서사랑합니다는 전달매체의 종류와는 상관없이 마음을 녹입니다.그런데 인격적이지 않은 관계에 있는 사람이, 글자나 동영상이 아닌,실제로 눈 앞에서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면전혀 그것은 와 닿지 않습니다. 오히려 스토커라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글자로 만난 것도 아니고, 동영상으로 확인한 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믿지 못합니다. 심지어 “..그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7:5)에서 기록할 정도로 가장 가까운 혈육도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다. 이 기록이 뭘 말해 줍니까? 기독교 신앙의 믿음은, 어떤매체의 전달력이나 생생함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 줍니다. 왜요? 믿음은 인격적인 지식으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자칭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심지어 어떤 교단의 일부 목사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들이믿지 못하겠다고 하는 것은 부활의 증거가 불충분 해서라거나, 직접 보지 않았기 때문이 아닙니다.그것은 인격적인 지식이 그 마음에서 자라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기독교 신앙의부활의 믿음이 마치 생방송 뉴스처럼 생생한 전달과 정보의 충분성에 근거한다면, 부활한 예수님을 직접 만난사람들의 얘기를 듣는 사람들은 다 믿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마가복음 16장을 읽어보면, 부활의 직접 목격한 사람들의 말을 전해 들은 사람들의 반응을3번 연속적으로 이렇게 기록합니다: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16:11).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16:13).“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이러라”(16:14). 예수님 시대에는 많은 사람들이 동시대에 살면서, 직접 그분을 보고 체험하고 또한 듣기도 했지만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정보가 부족해서 그랬나요? 그들에게는 그리스도에관한 지식이 인격적인 지식으로 자라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21세기에예수님께서 태어나셔서, 2,000년 전의 일들을 그대로 행하셨을 지라도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왜냐하면 기독교 신앙의 믿음은 눈으로 확인하고, 머리로 인정되기 때문에 믿는 것이아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인격적인 지식으로부터 출발합니다. 그러면성경이 말씀하는 인격적인 지식이 뭘까요?

    언약적 지식입니다. 구약 성경에 나오는 언약은 하나님께서 당시 고대근동의 나라와 나라들이 행하는 계약의 형식을 취하십니다. 성경에 나오는 언약의 기본 형식은 종주봉신입니다. 언약의 두 당사자 중 한쪽은 주인이 되는 것이고, 한쪽은 이 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한쪽은 섬김을 받고,한쪽은 섬기는 자가 되는 계약입니다. 오늘날 계약이라는 형식으로 보자면,종주는 이고, 봉신은 입니다. 이 언약에는 주인이신 하나님이 종인 이스라엘을 향하여, 줄기차게 한 가지를 요구하십니다.“순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라는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형통할 것이고 불순종하면 벌을받을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오늘날 신자가 성경을 읽을 때 반드시 가져야 할 태도가뭘까요? “나는 순종의 종이다라는 자세입니다. 다시 말하면내가 언약의 당사자라는 것입니다.그래야 성경이 인격적 지식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이 뭡니까? 구약은 옛언약이며, 신약은 새언약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의종주가 되시며, 나는 하나님의 봉신이 되어야 비로소 구약과 신약의 말씀이 나에게 진정한 언약이 되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봉신은 오직 이스라엘이었습니다.그 외에는 다 이방인이었습니다. 이방인은 언약에 있어서 제 3자에 머물렀습니다. 언약의 제 3자가 아무리 그 언약에관한 지식을 많이 가졌다고 해도, 그 언약의 수혜자는 되지 못했습니다. 왜요? 언약의 당사자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언약의 인격적 관계가 성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3자인 이방인에게는 언약이 인격적 지식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언약에 있어서 제 3자였던 우리가 언약의 당사자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옛언약을 갱신하는, 아니 혁신하는 사건이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입니다.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옛언약을 새롭게 했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잘 지켜 순종하면복을 받을 것이라는 기본 사항이 폐지됩니다. 그러고는 새언약에 와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복의 기본이 됩니다. 그러면왜 이런 언약 갱신이 일어났을까요? 인간의 한계성 때문입니다. 사람은아무리 노력해도, 옛언약을 잘 지켜서 봉신의 노릇을 못하더라는 것입니다. 옛 언약에서 봉신이 순종을 하지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벌을 받는 것입니다. 그 벌은 죽음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언약한대로 이스라엘이 순종하지 못했기 때문에 형벌을 제대로 가했다면, 이스라엘은영구적으로 회복하지 못하고 멸망의 길로 갔을 것입니다. 그리고 온 인류는 이미 구약시대에 끝장 났을 것입니다.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옛 언약의 당사자, 즉 봉신이었던 이스라엘에게 벌을 주는 것이아니라, “종주셨던 하나님 자신에게 벌을 주시는 것으로 옛 언약을마감하시려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형벌입니다. 언약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십자가 사건은 봉신인 이스라엘이 달려 죽어야 되는데,거꾸로 종주이신 하나님 자신이 달려 죽게 되는 사건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은혜라고표현했습니다.

    신자는 은혜 언약의 수혜자입니다. 반대로 자연인은 은혜 언약의 제 3자입니다. 신자는 은혜언약의 수혜자이므로, 언약의 봉신에 해당됩니다. 그러므로 언약의 책인 성경은 모든 신자들에게 인격적인 글이며,내가 목숨과 같이 여기고 묵상하며 순종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 신자들의 문제가 뭡니까? 자신이 언약의 당사자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잊고 삽니다. 그 결과가 뭔지 아세요? 언약의 책을 무시해 버립니다. 그리고 그 언약의 인격적 이 되시며,영원한 종주가 되시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거의 없다시피 합니다. 많은 기독교 신자들이착각합니다. 자신에게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관한 확신이 있기 때문에 성경에 대해서 많이 몰라도 괜찮다고생각해 버립니다. 성경을 연구하고 배우고 익히는 것은 신학자나 목회자나 신학생들의 몫이라고 생각해 버립니다.그러면서 스스로 자기를 마치 언약의 제 3자처럼 취급해 버립니다.

    성경이 왜 중요한 줄 아세요? 오늘날 하나님께서 언약의 당사자인 신자에게 자신을 나타내시는 유일한 방편으로 성경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성경 외에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오늘날 이상한 교단이나 교회에서는성경을 제쳐두고, 하나님을 다른 방법으로 만날 수 있는 것처럼 가르치기도 합니다. 어떤 뜨거운산상 집회나 특별한 은사체험집회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믿게 만듭니다. 그것은 기독교 신앙이 아닙니다. 믿음은 뜨거운 느낌이나 신비로운 체험으로 생기는 것이 절대아닙니다. 믿음은 오직 언약의 말씀 가운데서 역사합니다. 말씀 없이믿음이 생기는 것은 성경의 진리가 아닙니다. 성경을 잘 몰라도 믿음이 자란다는 가르침 또한 거짓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을 만나는 사건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만만나게 됩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언약의 당사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언약의 책인 성경이 하나님과 만나는 길이며, 지금 현재 나에게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고계시는 것입니다

7/9/2017 5:56:00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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