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나눔
소교리4-2 : 전지하시고 편재하시는 하나님(사57:15, 렘23:24, 롬11:33, 2017년6월11일)

소교리4-2 : 전지하시고 편재하시는 하나님(57:15, 23:24,11:33, 2017611)

    오늘은 하나님의 전지성과 편재성에 대해 설교하겠습니다.오늘 본문 렘23:24 하반절, “…나는 천지에충만하지 아니하냐이 구절은 정확히 하나님의 편재성을 표현합니다. 편재성은 다른 말로 무소부재라고도 표현합니다.하나님은 계시지 않는 곳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천지에 충만하다라고 기록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온 우주만물에 충만하시고, 계시지 않는 곳이 없다는 말의 물리적 의미가 뭘까요? 첫째, 장소에 제한을 받지 않는 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장소 이동이 필요 없습니다.만약 하나님께서 장소 이동이 필요한 존재시라면, 어느 한 곳에 머무시게 되면,다른 곳에는 머물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동시에 모든 곳에존재하십니다. 천사나 타락한 천사는 하나님과 같이 몸이 없이 영으로만 존재하기는 하지만, 하나님과 가장 큰 차이는 이것입니다. 그들은 천사 하나가 동시에 여러 곳에 있을 수 없습니다.이 말은 시간과 공간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한분이시지만, 동시에 모든 곳에 계십니다.

    그런데 성경에 하나님께서 마치 장소를 이동하시는 거나특정 장소에서 사는 듯한 느낌으로 사용된 표현들이 존재합니다. 예를 들어, “주께서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머무는 곳”(26:8),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니…”(66:1), “그의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68:5), “여호와께서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11:5) 등 이런 여러 표현들은 실제로 하나님께서 어떤 시간과 공간에 제약을 받는 존재라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이것은 신인동형성론적 표현이라고 부릅니다.이것은 하나님은 사람은 아니지만, 사람의 수준으로 낮아져서 사람의 언어로 자신을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온 우주 만물에 가득 채우시고 계십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개념은 아닙니다.물이나 공기가 스며들어 가듯이 틈과 빈 공간에 흘러 들어가서 채우는 개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어디로 흘러가지도, 확장되거나, 퍼져나가는 개념으로서의편재성.” 이것은 틀린 개념입니다. 하나님은 질량의 개념으로서의 편재가아닙니다. 부피나 넓이나 깊이나 길이나 무게의 개념이 아닌, 그 자체로서모든 것을 덮고, 충만하게 넘치시는 분입니다. 신비한 표현이라 이해하기가힘들기에 우리는 믿음으로 받아 들여야 할 뿐입니다.

    스티븐 차녹(1628-1680, 청교도신학자)은 그의 책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에서 하나님의 무소부재(편재성)하심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만일 하나님께서 수백만 개의 세상을 창조하신다고 해도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 안에 계실 것이다. 자신의 존재를 확장시키고 펼치심으로써가 아니라 자신의 무한하신 존재를 통해서 말이다.”하나님이계시지 않는 곳은 없습니다. 지구 상에서 가장 깊은 바다 속에도 존재하시며, 심지어 지구 땅속 맨 안 쪽에도 계십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밀어내거나 제한 시킬 수 있는 곳은단 한곳도 없습니다. 그러면 혹자는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지옥에도 계시는가?” 맞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옥에도 계십니다.그러나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의 마음가운데는 분명히 하나님같이 거룩하신 분이 어떻게 지옥같이 더럽고 추악한 곳에 계실수 있는가라는 의문이 있을 것입니다.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하나님의 영은 지옥이라고 해서 더러워지지 않습니다. 물고기가 바닷물 속에서 산다고해서 그 살이 짜지 않은 것 처럼(회를 먹어본 사람들은 다 아는 것 처럼), 하나님의 존재가 지옥에까지 미친다고 해서 더러워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지옥을 친히 만드신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악한 영들이 있는 곳에도 계시며, 악한사람들이 모인 곳에도 계십니다. 그렇지만 그들의 육신의 악이 하나님의 영의 깨끗함을 건드릴 수 없습니다.하나님은 비물질적인 존재시기에 피조세계의 물질과 혼합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물질 세계에 충만하게 모든 곳에 또한 동시에, 항상 머무십니다.

    무소부재의 하나님, 편재성의 하나님 교리는 하나님의 임재교리의 핵심입니다.임재는 하나님은 어떤 시간, 어떤 장소에서도 제한 받지 않고 항상 역사하신다는 뜻입니다.그러므로 우리가 자주 착각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마치 우리가 기도를 하거나,예배를 할 때 은혜로운 예배가 되기 위해서, 마치 멀리 계시는하나님이 내려오셔서 임재하셔야 하는 것처럼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도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실 때,“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마치 하나님께서는 저 높은 곳 어디엔가 있는 하늘에 머무시는 분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늘에 계신이라고 하신 것은, “초월적인 하나님을 가르쳐 주실려고 한 것입니다. 만물위에 만물을 초월하시고, 온 우주를 통치하시는 주관자라는 뜻으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디 한곳에 머무시다가이 땅에 내려오셔서 특별한 현상을 통해서 임재하시지 않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하나님의 편재성을 너무 단순화 시켜서 왜곡된하나님의 임재를 생각하게 되면, 기독교 신앙이 마치 이교도 신앙으로 변질될 수 있습니다. 이교도 신앙에 있어서 예배의 특징이뭡니까? 두 동사로 요약 될 수 있습니다. 1. “불러내고,”2. “달래다.”그들은 자기기 믿는 신을 언제든지 불러내기도 하고,또한 달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디로부터 불러내거나,어떤 현상을 나타내기를 바라지도 않습니다.

    대게 왜곡된 하나님의임재를 기대하는 사람들은, 어떤 특별한 하나님의 행동이 특수한 현상을통해서 나타나야 한다고 생각하고, 또한 그것을 갈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이런 생각은 하나님의 임재를 편협하게 하고, 단순논리화 시켜버리는 것들입니다. 아마도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성경에서 마치 하나님의 임재를 마치 그런 것들로 묘사하기때문일 것입니다. 예를 들어, 시내산에서 모세와 그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임재하실 때, 빽빽한 구름으로 나타난 것이라든지, 성막위에 구름기둥과불기둥으로 나타난 것이라든지, 어떤 광채로 나타나신 것이라든지 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하나님의 임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물입니다. 우리는 임재임재의 상징물을 구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광야교회에게 임재의 상징물을 주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만 늘 바라보라는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구속역사를 계획하시고, 그때 그때마다 특수하고 특별한 방식으로 임재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일정시기가 지나면 그런 특수한방식은 사라지고, 더 이상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예를 들어 오늘날 하나님은우리에게 홍해를 건너게 하시지 않습니다. 또한 성막을 짓게 하시지도 않습니다. 또한 솔로몬 성전 같은 어리어리한 성전을 지어서 봉헌하게도 하시지 않습니다. 이것을 구약의불연속성이라고 합니다. 오늘날 왜 우리는 성전을 지을 필요가 없을까요? 사도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오늘 신자 한 사람의 몸이 이미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고전3:16).그래서 오늘날 하나님은 더 이상 어떤 눈에 보이거나 특수한 현상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계시하시는 것이 아니라,성령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역사를 통해서 자신의 임재를 드러내십니다.

    하나님께서 피조물의 모든 곳에 충만하게 또한 항상 계신다는의미의 실천적 의미는 뭘까요? 아무도하나님으로부터 도망 칠 수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곳에 계시다면, 도망치는 그곳에도 계시므로 우리는 결국 하나님을 떠나 도망칠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뭐라고 말씀하나요?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신을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23:24).사람이 어딘가에 숨는 이유는 하나 뿐입니다. 두렵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두려움이 찾아오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죄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아담도 범죄한 후,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3:10)라고 기록합니다. 여기서 아담의 가장 큰 문제는뭘까요? 죄를 짓고 나서 하나님의 무소부재의 속성을 망각해버렸다는 사실입니다. 아담의 말을 잘 보세요.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전에 없던 수치심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누가 신경쓰기 시작한 것입니까? 세상에 존재하는 나머지 한 사람, 하와가 신경 쓰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벗은 것이 두려워지기 시작한 것입니다.하나님께 대한 영적인 눈은 가려지고, 오히려 육신의 두 눈만 남게 되었습니다.그래서 항상 보고 계시며, 항상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망각해 버립니다.그래서 아담은 숨는 것으로 뭔가 해결해 보려고 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 심지어 신자들마저도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에 대해서 망각하고 삽니다. 그것의 가장 큰 증거는이것입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부끄럽고 창피해서 하지는 못하는 죄들을, 사람들이 없을 때 버젓하게 짓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런 우리가 망각하고 있는 사실이 뭡니까?하나님은 항상 그곳에 계신다라는 사실입니다. 내가 죄를 짓고 있고,가식적이고 위선적인 모습으로 행동하는 그 때에 하나님은 공기보다 더 가까이 우리 가운데 임재하고 계십니다.하나님은 단 한번도 우리로부터 멀어진 적도 떠난 적도 없습니다. 항상 우리 곁에가장 가까이 임재해 계십니다. 어떤 개혁신학가가 하나님께서 얼마나 우리에게 가까이 계신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축구공 두 개가 있는데, 이 공을 서로 완전히 붙힙니다. 이제 더 이상 공과 공 사이에는 아무것도 끼어들 수 없을 정도로 서로 밀착된 상태입니다. 그런데하나님은 그 사이에도 계신다.”라고 표현했습니다.

    오늘날 신자가 이런 무소부재, 편재의 하나님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신전의식,“코람데오정신으로 대해야 합니다. 이것은라틴어로 하나님 앞에서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사실상 이 말도 하나님에 대해서 정확하게 표현 한 것이 아닙니다.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앞에 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항상 우리를 온 사방으로 두르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살아갈 수 밖에 없는존재입니다. 이것을 안다면 어떻게 죄지을 수 있을까요? 어떻게 사람들앞에서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워 신사적으로 행동하고, 친절을 베풀다가도, 혼자 있을 때 그를 비판하기도 하고, 혼자 있을 때 범죄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이런 속성을 배우고, 정말 믿음을 가진 신자라면, 마치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 것처럼 살수 없습니다.스티븐 차녹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와 동등하거나 우리보다 못한 비천한 사람들앞에서는 이들의 시선이 두려워서 죄를 억제할 수 있으면서도, 정작 하나님 앞에서는 죄를 억제할 수 없다면,우리는 하나님을 우리보다 못한 분으로 여길 뿐만 아니라, 가장 비천한 인간이나 어린아이보다도못한 분으로 여기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하심, 무소부재의 하나님을 믿게 되면, 우리는 한 순간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거나 도망 칠 수 없습니다.헤르만 바빙크는 이렇게 말합니다. “결코 당신이 도망 갈수 있는 장소는 없다.당신은 그분으로부터 도망치려 하는가? 차라리 그분께로 도망치라.”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가까이 계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데 우리가 어디로 도망가겠습니까?

    이제 하나님의 전지하심에 대해서 살펴봅시다.하나님의 전지성은 하나님의 편재성(무소부재성)에서 다음과 같은 명제를 추론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곳에 항상 계신다면,하나님은 항상 모든 것을 아셔야만 한다.”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아실 수 있는전제는 하나님께서 항상 거기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못할 것이로다”(11:33)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전지하심은 단지 많은 지식을 소유했다는 의미가아닙니다. 지식의 본체시라는 뜻입니다.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1. 하나님 자신에 관한 완전한 지식을 가지신다. 또한 2. 세상 만물에 대한 완전한 지식을 가지신다. 라는 뜻입니다. 성경은 이를 두고 여러 표현들을 합니다. “별들의 수효를 세시고”(147:4), “모든 인생을 살피시고”(33:13),“주께서 나의 걸음을 세시오니”(14:16),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10:30).

    하나님께는 스스로에게 궁금함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하나님께 새로운 지식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또한 오래된 지식도 존재하지 않습니다.항상 완전한 지식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플랜 A만 존재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경험이나 정보수집을 통해서 지식을 습득하지 않습니다.항상 완전한 지식의 근본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고민을 한다든지,해결되지 않는 문제를 가지고 씨름하거나, 문제해결이 안돼서 뒤로 미루는 일이란 결코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해결책을 아시고, 모든 인생의 가장좋은 해법을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만이 인생에 대한 완전한 지식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아직 존재하지 않은 것을 존재하는 것처럼 현재로 보고 계시며, 알고 있습니다.아직 인간에게는 일어나지 않았거나, 닥치지 않은 일이 하나님께는 이미 다 마치 일어난일처럼 존재합니다. 그러나 이런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미리 내다보셨기 때문에 아신다.”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전지성,편재성, 영원성이라는 측면에서 굉장히 부족한 표현입니다. 그래서 일부 신자들이 믿는, “예지 예정은 하나님의속성을 어설픈 것으로 전락시켜 버립니다. 그들은 주장 하길, “하나님은영원 전부터 개개인이 그리스도를 영접할 지 안 할지를 미리 내다 보셨다라는 것이 예지예정의 요지입니다.엄격이 말해서 하나님께는 내다 보는 것이라는개념은 없습니다. 영원성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하나님께는 시간의 개념이해당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내다보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인간에게는 미래이지만, 하나님께는 바로 지금보고 계시고, 함께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개혁신학가들은,하나님께는 예지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다고말합니다. 차라리 지식이라고부르는 것이 합당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아실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미래를 내다 보시는 정도가 전지하심의 속성이라면, 하나님은구원의 계획을 마치 카지노 도박하듯이 세운 것으로 전락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 계획을 세우실 때,빌라도 앞에 군중들이 바라바는 풀어주고, 예수는 십자가에 못박아라!!”라고 하는 장면을 내다보고세우셨다면, 십자가의 가치는 퇴색됩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필연적인 구속의 은혜가 아니라, 사람들의 난폭한 행동의 선택에 의해서 결정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사실 십자가형을 구형한 사람이 누군지 아십니까? 맨 처음, 대제사장들과 그 일당들이 구형합니다. “대제사장들과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보고 소리 질러 이르되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하느니라,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노라"(19:6). 그러고난 다음 빌라도가 유대인 군중들에게 물었을 때 군중들은 이렇게 소리칩니다.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19:15). 하나님의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가 두번의 우연대제사장 그룹의 요청과 이어서 유대인 군중의 요청을 내다봤기 때문에 계획된 것이라면,하나님의 구원의 의지는 어디에 있으며,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의역사는 어디 있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은 예지하시는 능력은 하나님의 지식의 본래적인 속성이 아닙니다.그래서 헤르만 바빙크는 말하길, “하나님의 전지를 예지, 현재 통찰의 지식, 그리고 기억으로 구분하는 것은 전적으로 인간적인 표현이다.”

    십자가의 구원의 은혜가 값진 이유가 뭘까요?그것은 하나님의 가장 완전한 지식에서 그 아이디어가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십자가는 그리스도가 구속의 주가 되시는 가장 선한 길이며, 유일한 길이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하나님이 전지하시다는 의미는 하나님의 지식이 가장 완전하다는 의미입니다. 이 말은하나님께는 차선책이 필요 없다는 말입니다. 플랜 B가 하나님께는 존재하지않습니다. 만약 하나님께 이것 안되면 저거, 저거 안되면 또 다른 것이라는 개념이 존재한다면, 하나님은더 이상 전지하신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구속의 은혜를 베푸시는데, 가장 좋은 길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십자가를 직접 지시는 것이었고,또한 그 십자가는 수여될 사람에게 수여되도록 만세 전부터 영원한 지식가운데서 결정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식은 수동적으로 결정하기 위한 자료수집 같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지식은 그자체로서 가장 선하고 옳은 길을 스스로 결정하시고 깊고 깊은 지혜를 발휘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십자가는 누구에게도 의존되거나 수동적인 십자가가 아닙니다. 그래서 대제사장이나 군중들이 십자가를 지운 것이아니라, 자신 스스로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파라디도미라는 단어를 쓰면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스스로 자신을 내어주다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나를 위해서 계획하신 능동적이고 헌신적인 십자가이며, 내가 반드시그 십자가를 붙들도록 계획된 은혜의 십자가입니다.

6/12/2017 1:14:00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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