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나눔
소교리4-1 : 영원하시고 불변하시는 영이신 하나님(사57:15, 요4:24, 시90:2, 약1:17, 2017년6월4일)

소교리4-1 : 영원하시고 불변하시는 영이신 하나님(57:15, 4:24,90:2, 1:17, 201764)

    소교리문답 제4문의 질문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입니다. 이에 하나님은 영이시며….”라고 답을 시작합니다. 오늘 본문 요4:24,“하나님은 영이시니라고 명시합니다.

    오늘부터 몇 주에 걸쳐서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서 설교할 것입니다. 이 속성에 대해서 배울 때,가장 먼저 알아야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은 영이시다라는 전제입니다. 누군가 하나님은 어떤 식으로 존재하시는가?”라고 묻는다면, “하나님은 영으로 존재한다라고 대답하면정답입니다. 그러면 재차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영으로 존재하는것이 무엇인가?”사실 더 상세하게 잘 설명하기가 곤란합니다. 그래서일찍이 개혁파 신학가들은 이런 격언으로 스스로 위로했습니다. “유한은 무한을 담을 수 없다.”(The finite cannot contain infinite.)

    오늘 저의 설교의 전제는, “유한은 무한을 담을 수 없다.”입니다. 나는 그 어떤 조직적이고, 논리적이며,능수능란한 문학적, 변증학적 표현으로도 하나님의 속성을 담아낼 수 없음을 먼저 고백하고이 설교를 시작하겠습니다. 태평양의 가오리가 인간을 이해할 길이 없습니다. 아파트 앞에 지나가는 달팽이가 자신이 힘껏 달려가는 그 속도가 인간이 몰고 가는 차에 비하면 얼마나 형편없이 느려터진 것인지 알리가 없습니다. 심지어 달팽이가 인간은 비행기라는 것을 타고 하늘을 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 가능성은 낙타가바늘귀로 들어갈 수 있는 확률보다도 낮습니다. 이것이 물질 세계 안에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존재의 격차입니다. 물질세계의 하등생물은 고등생물의존재방식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물질세계의 존재가 영으로 존재하는 분을 어떻게 이해 할 수 있을까요?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은 영이시니라는 말씀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저번 시간에 배운 것처럼, 하나님은 자신을 성경에 충분히 그리고 명료하게 계시해 놓으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을 먼저 정리하고넘어가야 합니다. 1. “우리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다.” 라는 전제와2. “하나님은 성경에 자신을 충분히 그리고 명료하게 계시하셨다.”입니다.이 서로 상반되는 이 전제가 어떻게 조화될 수 있을까요?

    이것은 신학자들은 일찍이하나님의 불가해성”(The incomprehensibility of God)이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불가해성이라는말은 두 가지 핵심적인 명제를 동시에 담고 있습니다. 1. “우리는 하나님을 결코 완전하게 이해할 수 없다.”그러나 2.  “우리는하나님을 참되게 알 수 있다.” 이 두 문장을 하나로 만들어 보면 이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결코 완전하게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참되게 알 수 있다.”이 명제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예를 들면 요1 4:8,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말씀이 있는데,이 구절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불가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에대해서 하나는 참되게 알 수 있지만, 하나는 도무지 알 수 없다는 측면이 공존한다는 뜻입니다.그럼 무엇을 알 수 있고, 무엇을 알 수 없을까요? 첫째,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절대적인 사랑, 참 사랑이라는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요? 사랑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공유할수 있는 속성으로 우리에게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에게도 사랑의 개념이 있습니다.그래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죽이시기 까지 보여주신 사랑이 얼마나 절대적이며 큰 사랑인지를 깨달을 수 있다는것이지요. 그러나 반대로, 둘째, 우리는 하나님의 그 사랑의 깊이와 넓이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왜 하나님이시면서그렇게 하셨는지, 어떻게 그런 사랑이 가능한지 등은 인간이 결코 이해할 수 없다는 측면에서 불가해성이 존재합니다.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서 배울 때, 불가해성에 대해서 염두에 두고 배워보자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영이시다라는 말씀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첫째, 비물질의 방식으로 존재하시는 분이라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 시90:2,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비물질의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가장 큰 의미는, 피조 세계가 탄생하기 전에 이미 계시는 분이라는뜻입니다. 혹자는 이 말씀을 두고, “물질의 세계가 창조되기 전에 비물질의세계가 만들어졌다는 말씀이며, 하나님도 그 중에 한 존재다라고 생각합니다.그러나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이 말씀은 우주는 물질의 방식으로 존재하고.그러나 하나님은 영으로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영으로 존재하시는 것은 그 영이 누군가로부터피조 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누군가 물을 것입니다. 천사는몸 없이 영적으로 지으진 피조물 아니냐? 맞습니다. 천사와 타락한 천사,마귀의 집단은 육체 없이 영으로 존재합니다. 사실 성경에도 하나님은 영이시니(4:24)”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으로서…(1:14)”에서 이라는 말로 표현했고, 원어 성경에는 동일하게 프뉴마(πνεμα)”라는 단어를 하나님과 천사양쪽 모두에게 쓰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하나님과 천사가 본성적으로뭐가 다를 게 있나?”라고 물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릅니다.하나님은 창조되지 않은 영이고, 천사는 창조된 영입니다. 이게 어떻게 다를까요? 하나님은 태어난 시간이 없고, 천사는 태어난 시간이 있다라는 차이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에게는 시간에 구애를 받지 않으시지만,천사는 시간에 구애를 받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에게는 과거나 미래가 없이 현존하십니다. 쉬운 말로 하나님께는 항상 현재만 있습니다.세상에 이런 말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1:8,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자요…”라고 표현합니다. 혹자들은 이 말씀을 두고, “하나님이라는 존재는 오래 묵은 존재구나. 또는 나이가 많은 존재구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하나님 안에는 시작도없고, 끝도 없고 시간의 흐름도 없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시작된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결코 멈추지 않습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영원성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천사를 영원성으로 표현하지는 않습니다.천사는 시작된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같은 영으로 성경이 표현했다 하더라도,그 속성은 완전히 다릅니다. 성경이 하나님을 영원하시다라고 표현하는 것은,시간을 연속적으로 끝없이 합쳐놓은 개념이 아닙니다. “1+1+1…1,000년이 또 그 다음1,000년으로 이어지고…”라는 수치의 무한재생산의 개념으로 받아들이면 이것은 인간의 머리로 영원을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는 한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이 어떤 것인지 이해할 수없습니다. 단지 그냥 하나님 안에는 숫자나 시간의 개념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항상 현재로 존재하실 수 밖에 없는 영원 그 자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하신 영으로 존재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후회가 없으시도다”(23:19)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후회는 과거라는 시간을 가지는 사람에게만해당되는 단어입니다. 하나님께는 과거라는 시간이 없습니다. 항상 현재로만존재하신다면 당연히 후회는 있을 수 없습니다.

    항상 현재로, 영원 안에서 존재하시는 하나님이시라면, 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불변하십니다. 오늘 본문약1:17에서도, “하나님은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영이시라면, 비물질의 존재이시므로 변형이 생길 수 없습니다. 사람은물질적 존재이기에, 시간이 흐르면 크게 두 가지 측면으로 변합니다. 첫째, 외모가 변합니다. 쇠하여 갑니다.“방부제 미모이런 말도 한때이지, 세월 앞에장사 없습니다. 둘째, 생각이 변합니다. 긍정적인 면으로는 시간이 흐를수록 생각이 완숙해 집니다. 반대로 부정적인 면은,시간이 갈수록 생각이 순발력이 없거나, 편협해 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한때 존경받던 사람들이 시간이 지나면 실망스럽게 변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나 그것은물질세계 안에서 변질되고 쇠퇴할 수 밖에 없는 시간과 변화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성경에도 이와 같은 인물이 있습니다.

    그 좋은 예가 솔로몬입니다. 성경은 솔로몬이 당대 최고의 지혜자라고 소개합니다(왕상4:30, 10:23). 솔로몬은 젊어서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겼습니다.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그는 변질됩니다. 왕상11:4, “솔로몬의 나이가 많을 때에 그의 여인들이 그의 마음을 돌려 다른 신들을 따르게 하였으므로….”성경은 솔로몬의 나이가 많을 때라고 기록하면서,그가 처음에는 그러지 않았는데, 나중에는 결국 변했다라는 것을 알려줍니다.이처럼 가장 지혜가 뛰어난 사람마저도, 하나님을 끝까지 잘 섬기지 못했다면,오늘날 신자가 자신의 믿음을 끝까지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요?

    그런데 우리는 솔로몬의 영혼에 대해서 궁금해집니다. 이처럼 나이가 들어서 그의 인생의 말로가,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우상숭배로 마감되었고, 하나님의 야단을 크게 맞게 되었는데,그렇다면 솔로몬은 과연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끝까지 소유하였는가? 라는 질문을 하게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기로 솔로몬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가졌고, 지금 저 천상에 주님과 함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의 형편없이 범죄로점철된 인생의 마지막 시기를 대하면서, 그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소유했을 것이라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있을까요? 이것은 하나님의 영원하심의 속성을 이해해야 도움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영원하시다는 것은 자신이 모든 것의 제1원인이 되신다는 뜻입니다. 영원성은 시작이 없었다는 뜻이며, 오히려 모든 것의 시작을 가능케 하시는 첫 번째 원인이 되신다는뜻입니다. 그래서 다윗의 고백처럼, “모든 것이 주께로부터 왔으니…”라는 고백처럼, 우리의 인생의 자산, 가치,역사, 우주 만물이 다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했다는 고백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만약 하나님께서 영원토록 존재하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절대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그러므로 하나님은 모든 것의 제1원인이 되시지요. 이것을 부정문으로 고치면 이렇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영원하시지 않다면 하나님은 절대 모든것의 제1원인이 될 수 없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하나님 자신이 시작점이 있는 존재라면, 그 하나님을 존재케 하는 또 무언가가 있었을 것이기때문입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3:14)라는 말에는 시작점이 없이 본래 계셨다는 의미입니다. 만약 출발점이 있는 존재라면,그는 태어난 존재이기 때문에,누군가 하나님보다 더 절대적인 존재가 하나님을 태어나게 한 것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그리고 또한 하나님이 태어난 존재라면 시간 안에 시간의 영향을 받는 존재가 돼 버립니다. 그러면그는 출발점이 있기 때문에 스스로 영원한 존재가 아니며, 또한 스스로 불변하는 존재가 아닌 것이 됩니다.

    이것이 왜 중요할까요? 기독교 신앙의 믿음의 본질이 이것과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3:9). 성경은 신자의 의가 믿음에 근거하는데, 그의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쉽게 말하자면, 죄인이 의인이되는 그 믿음의 원천이 하나님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또한 이 믿음을 이렇게 표현합니다.“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1:6). 우리 가운데믿음을 시작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면, 그 하나님은 반드시 끝까지 그 믿음을 변치 않게 이끌고 가실 것이라는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확신입니다.

     기독교 신앙에 입문하는 사람들마다 갖는 공통된 궁금함이 있습니다.“도대체 까마득하게 먼 옛날에 내가 알지도 못하는 예수라는 사람이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 죽으셨다는데, 도대체 그것이 오늘날 나와 무슨 상관이 있으며, 또한 그 십자가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데과연 그것이 믿겨지는 일인가?”라는 질문입니다. 일종에 시간적인 괴리감이죠.차라리 골고다 언덕에 십자가의 현장에 참관하는 군중 속에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그것이 나와 깊은 연관성으로 다가오겠지만, 도대체 2,000년이나 지난 지금 그것이 어떻게 나의 구원의 십자가가 될 수 있는가? 라는 의문을 던질 수있습니다.

    이점이 바로 역설입니다. 2,000년의 세월이 흘러도 그 십자가의 효력이 전혀 변하지도 쇠하여지지도않는 복음의 실체가 역설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믿음은 오래 전에 일어났던역사적 사건을 믿는행위를 말하지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믿음이라는것은, “지금 역사하는 십자가의 능력이 나에게 효력있게 하는 사건입니다.뿐만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역사적으로 경험하지 못했던, 구약의 모든 신자들 또한 십자가 복음의 효력 안에 있습니다. 모세도 아브라함도 여호수아도 다윗도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세상의 시간 안에서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들에게 구원을 이루는 근거가됩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요? 하나님의 영원하신 속성 때문입니다.하나님께는 과거나 미래가 없는 항상 현재로 존재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계획하시고, 주신 사건은 인간 편에서 보면, 골고다십자가 사건보다 구약의 인물들이 훨씬 시간적으로 앞서지만, 하나님 편에서 보면 항상 현재로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왜요?하나님은 현존하셔서, 과거나 미래가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신비입니다. 우리에게는 십자가가 이미 2,000년 전에 지나버린 과거의 사건이거나, 모세에게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까마득한 미래의 일일 수있습니다. 그러나 시간 바깥에 계시는 하나님께서는 항상 현재로 거하셔서, 모든 과거와 미래를 현재로 보시고,일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지나버린 사건이나 아직 벌어지지 않은사건의 개념이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원성으로만 설명할 수 있는 신비로운 법칙입니다. 하나님은 만세 전부터2017 6 4일에 있는 김태길을 보고계십니다. 사람의 입장에서는 보고 계셨습니다라는 과거형으로 표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6,000년의 세상 시간이 흐르기 전에도 하나님은 현재형으로 김태길을 보고 계시며, 또한 지금도 보고계시며, 또한 앞으로 영원한 천국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고 있는 김태길을 동시에 보고 계십니다.”사람에게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던 모든 일이 하나님께는 현존하는 일로 보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히13: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이 말씀이 진리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2,000년전에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이미 만세 전부터, 그 택하신 백성에게 이미주어진 것이요, 지금 현재 주어지고 역사하는 복음의 능력입니다. 이사실을 안다면 내가 2,000년 전의 십자가의 사건을 봤다고 더 큰 능력이 있고, 그 현장에 없었다고 해서 효력이 약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저와 여러분의형질이 생기기 전부터 이미 나에게 주어졌고, 지금도 역사하며, 앞으로도그럴 것입니다

6/5/2017 7:34:00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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