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교리3: 성경이 주로 가르치는 것(요5:39, 20:31, 2017년5월28일)
소교리문답 제3문은이렇게 질문합니다. “성경이 주로 가르치는 것은 무엇입니까?”이렇게답합니다. “성경이 주로 가르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하는 의무입니다.”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성경은 첫째, 하나님에 대한 신앙,둘째, 사람의 의무에 대해서 기록합니다. 나는오늘 첫째 부분, “하나님에 대한 신앙”에 대해서만 설교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에대한 신앙”이 뭘까요? 오늘 본문은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요5:39).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요20:31).본문은 한결 같이, 성경의 기록목적을 “그리스도”라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이 두 구절에서, 성경의 기록 목적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밝히면서,이것은 곧 “영생”과 “생명”을 얻기 위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결국 요약하면성경에는 그리스도에 대한 가르침으로 가득 채워져 있으며, 그리스도는 곧 생명의 길이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이것을 개혁신학가들은 “성경의 충족성”또는“성경의 충분성”이라는 단어로 설명합니다. 이 말은 성경이 우리에게 구원에 필요한 지식을 주는 데 충분하다는 의미입니다. 이 구원에 필요한지식의 핵심이 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이 그리스도에 대해서 충분하게 계시되었다는 것이 성경의 충족성의 골자입니다.
성경의 충분성이라는 말을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그래서 이런 질문을 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소개할 때,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다”(출15:26)라고 하시고서왜 성경에는 암을 낫게 하는 방법을 주시지 않았는가?” “하나님이 암환자를 직접 고쳐주시지 않을 거면,성경에 그런 비법이라도 소개해 주셨으면, 정말 여호와 라파, 치료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을 텐데…”성경은 사람이 어떻게 암을 고칠 수 있는지에 대한 지식을주는데 관심이 없습니다. 이 말은 성경이 사람의 이 땅의 삶을 하찮게 여긴다는 말이 아닙니다.“성경은 이 세상의 시간 안에 갇혀 있지 않다”라는 말입니다. 성경이 가리키는 시간은 “영원한 시간대”입니다.목표점과 범위가 다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이 땅에서의 고난을 당장 해결해 주는어떤 비법을 기록하지 않았다고 해서, “성경은 불충분하다”고 말해서는안됩니다.
그러면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만약 성경이 구원의 관한 지식을 충분히 제공하고 있다면, 하나님에 대해서 모든것을 다 증명하고 있는가?” 말하자면 “증명의 원리”를 갖다 댑니다. 답부터 말하자면, 성경은 그리스도를증명할 의도가 전혀 없습니다. 성경이 그리스도를 증명할 의도로 쓰여지지 않았다면, 당연히 성경의 문체는 과학적, 합리적 문체가 아닙니다. 오히려 줄곧 이야기를 하듯이, 사건들을 쭉 늘어놓는 식입니다.
예를 들면, 창세기에보면 쌍둥이 형제 에서와 야곱의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서 에서가 야곱에게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판다는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야곱을 편애하는 엄마 리브가가 아들을 위해 아버지를 속이도록 형 에서의옷도 입히고, 염소새끼의 가죽을 야곱의 손과 목에 붙여 줍니다. 그리고모자가 이삭을 속여서, 장자의 축복을 결국 받아냅니다. 이 대목을 성경독자가읽고 있으면 불편해 집니다. 왜 성경은 야곱을 예수님의 족보에 버젓이 기록하면서(마1장), 야곱의 이런 비도덕적이고 교활한 행동을 숨김없이기록하고 있을까? 라는 궁금증이 생깁니다. 또한 성경의 여러 곳에서가르치는 교훈과 어긋나는 것을 뭐 대단한 자랑이라고 기록한단 말이죠. 시5:6, “거짓말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시리이다, 여호와께서는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와 속이는 자를 싫어하시나이다”라고 기록하면서, 창세기 기자는 야곱을 “하나님과 겨뤄서이긴 사람, 이스라엘”이라고까지 치켜세우기 까지 합니다.요8:44에 보면, 사람이 거짓말하고,욕심을 내는 것이 거짓의 아비인 마귀에게 속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는 것으로 보아, 야곱은 마귀의 자식이라고 불러도 될 만큼 형제를 속이고 남의 것을 탐을 냈습니다.
이렇게 성경을 읽다 보면, 성경은 마치 왜 이런 것을 기록해서 사람을 헷갈리게 하고, 더 불편하게 만드는 것일까요?그것은 성경이 그리스도를 증명할 의도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성경은 증명할 의도는없지만, “설득”할 의도를 가지고 기록합니다. 뭘 설득하려고 할까요?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인간 역사에 과연 의인이 있는가? 라는 성경의 집요한 질문입니다. 인간 역사의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가감 없이 기록함으로써, 성경은 독자들에게 계속 간접적으로묻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은 하나님과 씨름해서 이겼고, 이스라엘이라는별명까지 받았는데, 과연 그는 의인인가? 다윗은 이스라엘의 최고의 왕인데,그는 정말 부족함 없이 의인인가? 성경이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독자들에게 얻고자 하는답이 뭡니까? “의인은 없다”입니다. 그리고 성경 독자가 그런 성경의 인물들을 통해, 자기 자신을 투영하게 합니다.“아 다윗이 저렇게 범죄했다면, 나도 별반 다르지 않는 죄인이구나…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를 살려주시고, 칭찬까지 해 주시다니…정말 은혜로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성경은 이렇게 설득합니다.
둘째, 인간 역사에이토록 모두 범죄했다면, 과연 거룩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가? 독자들은너무도 분명하게 답을 내리게 됩니다. “없다.”그리고 어떤 생각을 하게됩니까? “그러면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성경은 이런 고민에 빠진 죄인에게 답을 줍니다.
셋째, “그러면나는 도대체 뭘 할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봉착하게 되고, 스스로 답을내리길,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구나!” 이때 성경이 깨닫게 해 줍니다.“너희는 할 수 없지만, 나는 할 수 있다. 그 길이 바로 그리스도다”라고 하면서 성경 독자들을 강력하게 설득합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죄인에게 그리스도를 증명하는 방식으로믿도록 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사람의 본성이 어떤 증명도 받아들일만한 영적 상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요1:5, “빛이 어둠에 비치되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요1: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고전1: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인간의 전적 타락으로말미암아, 그 어떤 인간의 지식으로도 그분을 깨달을 수 없기에, 성경은증명의 방식이 아니라, 특별한 성경만의 설득의 방식을 택합니다.
성경이 그 어떤 다른 책과 달리 위대한 이유는,성경이 스스로 죄인을 설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성경이 죄인을 설득한다는 게 뭘까요?이것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1장 5항에보면,“성경의 천상적 성격”이라고 표현합니다. 영어로는 heavenliness입니다. 이것은 다른 일반문학 책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특별하고도 초월적인 특성을 말합니다. 쉽게 설명하면 천상의 것을 절대 가치로잡고, 지상의 것을 비교해 보면, 금방 지상의 것이 얼마나 보잘것없고죄악 된 것인지를 알게 된다는 이치입니다. 예를 들면, 누군가10년 된 하얀색 자동차를 타다가, 이제 금방 새로 산 하얀색 자동차와 색깔을 비교해봅니다. 그러면 10년된 하얀색 자동차를 그냥 볼 때에는,완전한 하얀색인줄 알았는데, 새차와 비교하게 되면서 상대적으로 하얗지 않다는 것을알게 됩니다. 마치 이것처럼 성경이 천상의 절대적 가치를 가지고 있기에, 지상의 아무리 하얗고 선한 것을 갖다 대더라도, 그것이 얼마나 선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것입니다.
이것을 두고 R. C. Sproul이라고 하는 미국의 유명한 개혁신학가가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담을 가지고 이렇게 설명합니다. “나는 어떤 것도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모든 문서의 진술들과 주장들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철학 훈련을 받았다. 그러나 내가 깨달은 것은, 성경을 읽을 때는 진정한 의미에서 본문이 아니라 도리어 내가 비평의대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내가 성경을 비판할 수 있기보다는 성경이 나를 비판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 내용의 천상적인 성격에 직면할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성경은 천상의 성격을 가졌기에,자신을 스스로 증명해 나가는 방식이 아니라, 오히려 이것을 읽는 독자가 성경을 대하면서자신이 얼마나 못난 사람인가를 스스로 깨닫게 하는 설득의 방식을 취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성경을 읽을 때,도리어 성경을 증명하려고 하고, 비평하는 방식으로 들여다 보면 성경이 쓰여진 방식과의도와는 전혀 상반된 관점을 가지고 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부류가 무신론자입니다.무신론자가 만약 성경을 읽는다면 그에게 성경을 읽는 가장 큰 목표는, “하나님은과연 존재하는가?”일수 있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그는 성경을 자신의합리성의 잣대로 증명과 비평의 방식으로 일관되게 읽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존재증명이라는 방법으로계시 하시지 않습니다. 성경이 전혀 그런 의도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그저 모세에게 떨기나무 불꽃으로 나타나셔서 이렇게만 말씀하십니다. “나는 스스로 존재하느니라,I am who I am.”직역하면, “나는 나다.” 라고 말씀합니다. 존재 증명의 목적으로 성경을 읽는 사람들을 실소하게 하는 대목입니다.사람이 자신의 존재 증명을 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중요한 전제조건이 필요합니다. 1. 어디서 누구로부터? 출발했느냐 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부모가 누구냐? 2. 언제? 출발했느냐 입니다. 출생증명서나 호적기록부가 필요합니다. 이것이 개인의 정체성을 증명하는 제일 중요한 사실 아닙니까?그래서 세상의 모든 국적의 공통 ID인, 여권에보면 두 가지가 반드시 들어가지요. 첫째 너는 누구로부터 왔느냐? Family name이 뭐냐? 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Kim이라고 반드시 성을 적습니다. 둘째, 언제부터 너의 정체성이시작되었느냐? 생년월일이 언제라는 말이죠. 이 두 가지 사실은,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계속 따라 다닙니다. 그래서 장례식을 할 때에도, 이것이 증명이 안되면 관을 땅에 묻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전혀 그런 방식으로 자기 증명을하시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가장 큰 이유는,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인간의 이해수준을 생각하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이것과 관련하여 큰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오감으로 인지할 수 없는 방식으로 존재하시기 때문입니다. 오감은 시각,청각, 후각, 미각, 촉각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요4:24)”.성경이 하나님의 존재방식을 기록한 문장입니다. 성경이 이렇게만 하나님의 존재방식을표현해 버리고 맙니다. 어떻게 보면 너무 무책임하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도대체 “영”이 뭔지 성경은 많은 말을 하지 않습니다.그 이유는 우리가 오감으로 인지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둘째,인간의 언어와 문자로는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습니다. 한국말,특히 한글이 세계적으로 뛰어난 글자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어떤 기관에서는 한글이세계역사상 가장 과학적인 글이라고도 했답니다. 그런데, 만약 이 한글로아이스크림을 설명했다고 칩시다. 아무리 뛰어나게 설명했다고 하더라도, 아이스크림을 한번도 먹어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냥 “정말 차갑고 달고 맛있다.”라고 표현했다면 괜찮은 표현입니다. 표현하는 매체와 그 대상의 영역이 처음부터 서로 다릅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 이렇게 묻습니다. “당신이 지금 겪고 있는 슬픔은 100중에 몇입니까?”그런데 “내 슬픔은 지금100중에 99정도 되요”라고 말했습니다.그러면 이것을 듣는 사람은 느낍니다. “아 저 사람이 정말 힘들구나!”그러나 그것으로 끝입니다. 상대방의 아픔을 수치로 나타냈다고 해서,그것이 내가 동일하게 상대방의 아픔이 실제로 느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 언어와문자의 한계성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중요한 질문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이런 문자의 표현의 한계성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왜 성경이라는 글자 안에 하나님자신을 계시하셨을까요? 답부터 말씀 드리면, 생명의 길을 보여주는 데는그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충분하다는 것일까요? 성경의 내적 조명하심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조명”이라는 단어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 단어를 사도 바울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2:10). 여기에서 “통달하다”라는 단어가 헬라어로 “에류나오(ἐρευνάω )”입니다. 이단어의 뜻은, “조명하다. 비추다, 탐색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영어 성경마다 이것을search라는 단어로 번역했습니다. 이 search하고, 빛을 비추어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도록 탐색하고, 통달하게 하시는 이 동사의 주어가 누구입니까? “성령은”이라고 했습니다. 영어 성경에는 “The Spirit searches allthings…”라고 했습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 되었다면,그 기록된 성경의 말씀을 탐색하고 이해하도록 비추시는 분 또한 성령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성경은 증명이 아니라, 설득이라는 기본 이해입니다.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시종일관 계시합니다.그런데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믿음으로 받아 들여지고, 어떤 사람에게는 그야말로“미친 이야기”로 들립니다. 바울이베스도 총독 앞에서,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과 부활”을 말했을 때,베스도가 한말은,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입니다. 베스도에게는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얘기가 미친 소리로 들렸던 것 뿐입니다.그러나 영적으로 보면, 베스도에게 그 소리가 미친 소리로 들린 이유는 합리성과 과학성에관한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문제 즉,“성령의 내적 조명”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베스도 총독 같은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미친 사람”에 속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고난 받으시고,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다라는 사실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경 곳곳마다 그 그리스도를 예찬하고,소개하는 것에 대해서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 들입니다. 그것은 저와 여러분이 마음속으로깨달아 이해가 되었고 동의가 되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의 이성과 의지를 뛰어 넘는 성령님의 내적 조명하심을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믿어지고, 우리 마음 밭에 믿음이라는 능력으로심겨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하나님의 세상을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누군가 증명할 수 있느냐? 이것은 증명의 문제가 아니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이 사랑을 이렇게 인간의 이해하기 쉬운 이야기로풀이하셨어요. “사람이 친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15:13-14). 예수님께서는 사람 편에서 최고의 사랑을 이해 시킬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비유를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사랑”으로 표현했습니다.그러면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증명할 수 있는 이야기입니까? 아니지요.그래서 하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실제 자기 자신이 인류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죽기로 작정하시고, 또한 실제로 시행합니다. 이것이 실제로 일어난 사실입니다.그리고 이것을 대하는 성경의 독자들은 하나님의 사랑의 절대성과 위대함에 설득당 할 수 밖에 없지요. 왜냐하면 사랑에 대해 이것보다 더한 “자기 증명”이 없기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