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교리2: 성경, 영광을 위한 유일한 법칙(딤후3:16,벧후1:20-21, 2017년5월21일)
소교리문답 제2문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즐거워하기위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법칙은 무엇입니까?”라고 묻습니다.그리고 이렇게 답합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즐거워하는 것을 가르쳐 주는 유일한법칙은 신,구약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유일한 법칙”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유일한”이라는 단어에 주목해야 합니다. 왜 우리의 믿음의선조들은, 성경이 하나님께 영광되게 하는 “유일한” 법칙이라고 명시했을까요? 기록된 신,구약 성경만이 하나님의뜻을 보여주는 계시의 방편이기 때문입니다. “계시”라는 말은 “드러내다”라는 말입니다. 성경은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시는기록물입니다. 그래서 “신, 구약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는 유일한 법칙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오늘날 하나님은 성경 외에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말씀하시지 않습니다.혹 물리적인 음성을 주신다든지, 환상을 주시거나, 천사를 보내서 듣게 하신다거나 하는 방법들은 성경이 완성되면서 이제 중지되었습니다. 그러므로신자가 하나님을 뜻을 알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는, 오직기록된 신,구약 성경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신,구약 성경만이 유일한 신적권위입니다.
그래서 오늘 디모데후서 본문은 이 유일한 신적권위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감동으로 된 것으로….”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라는 말은 헬라어원어 성경에서는, “데오프뉴스토스(θεόπνευστος)”“하나님이 숨을 불어 넣으셨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성경이 살아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겉 보기에는 죽어 있는 인쇄활자에 지나지 않지만,실제로 그 영향력은 살아있습니다. 그래서 히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라고 했던 것입니다.
성경이 이처럼 살아있는 어떤 생물처럼 또는 예리한 칼처럼 활동하는 것은, 그것 자체로 신적권위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신자가 참고해야 할 유일한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이 말은 성경이“글자로 된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뜻입니다.이 글자로 된 하나님의 말씀이, 다른 세상의 책과 달리 신적 권위가 있는 이유가뭘까요? 크게 세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1. 무오성,2. 명료성, 3. 충족성입니다. 세 번째충족성에 대해서는 다음주에 설교하고 오늘은 무오성과 명료성에 대해서 말씀 드립니다.
첫째, 무오성. 나는 성경이 처음 히브리어로 주어졌을때, 그 원본은 무오한 상태로 주어졌다고 믿습니다. 시간적으로 보면십계명이 인간 글자로 기록된 최초의 하나님 말씀입니다. 그리고 특이하게도 십계명은 인간 저자가 기록한 것이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돌판에 새겨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출34:28,“모세가 여호와와 함께 사십 일 사십 야를 거기 있으면서 떡도 먹지 아니하였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여호와께서는 언약의말씀 곧 십계명을 그 판들에 기록하셨더라.” 지금으로부터 약 3,400년 전, 시내산에서는 인류역사상 최초로, 하나님의 말씀이하나님에 의해서 인간의 글자로 기록된 사건이 벌어집니다. 이것은 크게 두 가지 의의가 있습니다.첫째, 하나님께서 손수 기록하신 십계명, 즉성경은 완전하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의 성품이 완전하기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불변하시고, 항상 참되시고 선하시며, 실수가 없으십니다. 이런 성품의하나님께서 직접 기록하신 십계명이 내용과 형식, 그리고 그 효력 면에서 완전한 것은 지당합니다.둘째, 앞으로 기록될 모든 성경 또한 무오 할 것이라는 예시이며, 보증입니다. 하나님께서 완전하시다면, 앞으로 직접 동원하여 사용하실 성경의 인간 기록자 또한 완전하게 인도하실 것이라는 보증입니다. 혹 인간의 연약함이나 실수의 여지가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가만하시고, 대비하시고,예방하시고, 보완하셔서 어김없이 하나님의 신적 권위를 성경기록자들을 통하여 기록하게하실 것이라는 의지표명입니다.
출34:27에 보면,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한참을말씀하신 후, 그 들은 말들을 “기록하라”고 명령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우리는 80세 노령의모세의 기억력이 얼마나 신뢰할 만한 것인지 의심스럽습니다. 40일 동안 음식도 물도 먹지 않은 상태에서 어떤것을 기억할 수 있을까요? 인간적인 논리로 따져보면, 그런 심약한 상태에서하나님의 말씀을 다 기억해서 그것도 한치의 틀림없이 기록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세가기록한 모세오경, 즉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다섯 권의 책이 정확 무오한신적 권위의 성경으로 받아들입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성경 기록에 관여하시고, 간섭하셨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인간 저자의 육신과 정신의 상태와는 무관하게 성경은 완벽하게 기록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벧후1:21,“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무오성에 대해서 의심하는 사람들은, 성경에 표현된 내용 중에 수많은 곳에서 오류가 있다고지적합니다. 그런 지적들은 주로 과학적 관점 및 합리적 관점에서 지적합니다. 예를 들면, 여호수아가 가나안 족속과 전쟁을 벌일 때 일어난 초자연적 현상의 기록입니다.하나님의 능력으로 태양과 달이 멈추는 사건에 대한 묘사입니다. 수10:12-13,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서 그리할지어다. 태양이 머물고 달이 멈추기를…”이 기록을 두고 성경을 폄하하는 얄궂은 사람들은, 성경이 천동설을 주장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과학적 오류가 있다고 말합니다.그도 그럴 것이 실제로 중세교회는 성경의 이런 류의 표현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서, 태양이 움직이는 것이 성경의 진리다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망원경으로태양계의 행성들을 관찰하다가, 천동설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도는 지동설을 주장합니다.그러다가 로마 카톨릭교회로부터 종교재판을 받고, 가택연금 상태에 처해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 신자들도 지동설을 진리로 믿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을위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태양이 머물고…”라고 기록했다고 하더라도, 과학적인 진실을 위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성경은 문학 장르로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구약 성경의 75%는 이야기 형식인, 내러티브 문학장르로 기록되었습니다. 이 장르에서 어떤 현상을 기술하는 방식에서 나타나는 특이점은 “현상적 언어”로 기록하는 방식을 채택한다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성경은 사물의 실체와 자연의 움직임을 기록할 때, 기술적, 과학적 정확성으로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외적현상의 관점에서 기술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태양이 머물다”라는 표현은 태양이 움직이다가 멈춰선 태양계의 시스템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현상적인 기술입니다. 이처럼 성경은 기술적인 정확성을 배제하는 방식으로 내러티브 장르를 이용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셨다라는 표현에서,우리는 어떻게 4,999명도 아니고, 5,001명도 아니고 정확하게 5,000명이냐? 라고 질문할 수있을 것입니다. 사실 성경에는 어떤 숫자를 기록할 때, 많은 경우에딱 떨어지는 숫자로 끝나는 것으로 기록합니다. 10,000, 30,000, 75,000, 심지어 쳐들어온애굽의 군대 숫자를 백만 이라고 기록합니다. 과연 어떻게 그 숫자를 정확히 셋을 것이며, 또한 계수를 했다손 치더라도 어떻게 그렇게 딱딱 떨어지는 숫자일 수 있느냐? 라는 질문입니다.그래서 성경무오를 폄하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성경의 기록들이 진리에 어긋나며 오류투성이라는근거로 내세웁니다.
그러나 성경이 이 숫자를 기록하는 것은, 어떤 통계자료를 통해 정확한 수치를 보여주려는 의도가아닙니다. 또한 이 숫자의 명시를 통해서 예수님의 정당성이나, 권위에힘을 실어 주기 위함도 아닙니다. 얼마 전 수개월간 한국 광화문에서는 촛불집회가 있었는데, 그 모인 숫자를 계산 할 때 이런 표현들을 합니다. 경찰추산 몇 명, 주최측 집계 몇 명…. 그런데 항상 주최측 집계가 경찰 추산 보다 몇 배씩 많이 나옵니다.왜 그럴까요? 자신들이 말하고자 하는 주장에 힘을 실어주고, 정당성을 확보하는데 숫자가 굉장히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신적권위를 내세우거나,가르침의 정당성에 힘을 싣기 위해서 5,000이라는 숫자를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오히려 그런 것이 필요하셨다면 차라리 50,000이라는 숫자를 사용하는 것이 더나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숫자를 먹이셨다는 것을, 성경이정확한 숫자가 아닌 대략적인 무리의 규모를 기록하면서 나타내시고자 한 것은 다른 의도가 있습니다. 그것은예수님 자신이 큰 무리, 즉 인생들을 먹이시며 더 나아가서 결국 자신이 생명의 길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그래서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6장에서, “오병이어”사건의 뒷 이야기를 적으면서, 예수님께서 자신을 지칭하여 여러 번 말씀하신 것을 집중적으로성경독자들에게 알려주려고 합니다. 예수님의 반복된 가르침은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참 떡이다. 내가 생명의 떡이다”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무리들, 즉 인생들이 만나를 광야에서먹었으되 죽었고, 또한 오고 오는 모든 세대의 인생들이 음식을 먹지만 결국 죽지만, “내가 참 생명의 음식(떡)”이므로 “나를 먹고,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산다라는 메시지를주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 기록자가 5,000이라는 숫자를사용하는 이유는, 성경의 청자(listener)들에게 예수님께서 무리를먹이시는 분이시며, 또한 그분은 영원한 생명의 왕이 되신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의도입니다. 그러므로 이 숫자가 정확하게 기록되지 않았다고 해서 성경의 무오성에 전혀 해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제1차 성경의 청자가 이것을 들을 때, 성경화자(narrator)의 의도가 전혀 왜곡되거나 의심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교인들끼리만나서 이야기를 하다가, “집사님 교회는 몇 명이나 출석합니까?”라고물을 때, “우리 교회는 500명이 모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해서, “어떻게 499명도 아니고,501명도 아니고, 딱 500명이 모입니까?”라고 따져 묻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화자나 청자가 다 질문을 하고, 대답을 할 때 기술적인 정확성이라는 관심을 가지고 대화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서로그것이 전혀 진실에 어긋나는 것으로 서로 오해하거나 불편해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은 신적인 하나님의 권위가 인간의 유한한 언어로 담겨질 때에는, 기술적,과학적 정확성으로 기록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진리에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청교도 신학자들은 일찍이 이런 표현을 자주 썼습니다. “유한은 무한을 담을 수 없다.”한낱 인간의 언어와 글자가 무한하신 하나님을 담아 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유한한 인간의 글에 담긴 무한한 하나님의 뜻은 전혀 손상을 받거나 오류로 전락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조그마한 종자기에 태평양 물을 담아서, “이것은 태평양 물이요”라고 했다고 해서, 그것이 진리에어긋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태평양 물을 설명하기 위해서, 태평양물을 다 떠올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종자기에 담긴 물도 본질적으로 태평양물이며, 또한 태평양의 물을 본질적으로 보여주기에 전혀 모자라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만 종자기에 담긴물은 태평양의 거대함만은 담을 수 없는 것입니다. 마치 이와 같이 하나님의 무한성을 인간의 유한에 담을 수없을 뿐이지, 그렇다고 하나님의 본성과 뜻을 전혀 나타내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기록된 성경의 말씀은 비록 유한하지만, 무한하신 하나님의 본성을 조금도 틀림없이 보여줍니다.
둘째, 명료성. 성경은 누구든지 읽어도 이해되도록 기록되었습니다.이 말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을 사람이 꽤 있을 것입니다. 성경은 신학공부를 따로해야 해석할 수 있다 라거나 성경을 제대로 알려면 목사의 설교나 성경공부를 통해서만 제대로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오해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여기에 성경이 사람을 유익하게 하는 방식을4개의 단어로 표현합니다. 교훈, 책망, 바르게 함, 의로 교육. 이 단어 4개를 사용할 때, “유익하니”라는 단어로 연결 됩니다.그러면 “유익”은 누구에게 유익하다는 것일까요?성경교사입니까? 아닙니다. 성경독자 모두를말합니다. 이것을 이 구절에서 더 상세히 밝힙니다. “또 네가 어려서부터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3:15). 여기에서 두 가지를 유심히 봐야 합니다. 1. 디모데는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다는 점, 2. 성경은 능히 디모데에게 지혜를 주었다는 점.디모데가 어린 시절부터 성경을 깨닫게 되었다는 점은 성경의 내용이 아이도 이해할 수 있게 기록되었다는 증거입니다.이것은 성경의 명료성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아이나 어른이나, 지식이나 무지한 자나 상관없이 성경은 누구에게나 명료하다는 말입니다.
또한 디모데에게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주었다고 했는데, 그 주어가 어떤 스승을 지칭하는 사람이아니라, “성경” 자신이라고 말씀합니다. 지혜를 제공하는 주체가 인간교사가 아니라, 성경 자신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이라고 표현했습니다.성경 자신이 성경교사라는 말입니다. 이는 성경을 혼자 스스로 읽는 독자에게,성령은 이해되도록 인도해 주시고 또한 성경이 그 만큼 명료하게 기록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잘 읽지 않는 신자들이 흔히들 핑계 대는, “너무 어렵다”라는 것은 사실 편견에 불과합니다. 사실 성경을 읽어보시면, 신학적인 논쟁이 있는 구절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다 이해가 됩니다. 물론 성경을 읽을 때에는 기본적인 교리의 체계를 가지고 읽게 되면, 잘못된 해석이나,가르침에 빠지지 않게 됩니다. 베드로후서 본문에 보면,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벧후1:20)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로마카톨릭이 이 말씀을 근거로 해서, 평신도의 성경 읽기가 이단에 빠질 위험이 있다고 하면서, 함부로 평신도가 성경을 읽지 못하게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고, 해석할 권리는 교황에게만 있다고 가르쳤습니다.결국 이런 가르침은 성경이 명료하지 않다고 천명하게 되어버린 셈입니다.
성경은 명료합니다. 그래서 글자를 읽을 줄 아는 모든 사람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성경이 이해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 중에 대게 보면 성경을 편협하게 읽거나, 일부만 읽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성경의 모든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라고 경고한 것은, 그 당시그런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오늘날 평신도들은 성경을 함부로 읽고 해석할 생각 하지말라는 뜻으로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읽는 자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크게 두 가지를 말씀합니다. 1. 성령의 조명하심을 따라 읽으라는 명령입니다.“…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 임이니라”(벧후1:21).성령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다면, 성경 독자 또한 성령님의 감동으로 읽어야 한다는의미입니다. 성령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성경을 아전인수 합니다. 예를들면, 신자 중에 애주가들이 즐겨 사용하는 성경 구절이 있습니다. “술 취하지 말라…”(엡5:18). 그러면서 그들은 “성경에 봐라. 술 취하지 말라고 했지, 술 마시지 말라고했냐?”그러나 이 본문의 의도는, 술은 마셔도 되는데 술 취하는 것은안 된다는 것을 천명하기 위해 의도된 말씀이 아닙니다. 만약 누군가 이 구절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려고 한다면,그는 또한 술의 종류에도 신경을 써야 할 것입니다. 성경에는 그 어떤 소주나 맥주를말씀하지 않습니다. 거의 다 포도주입니다. 그러면 “술을 마시되 취하지 않을 정도로 마시되, 와인만 마셔야 한다”라고 적용해야 맞지 않습니까? 게다가 성경이 이것을 문자적으로 “술 취하지 않을 정도만 마셔라”는 것을 의도하려고 했다면, 문자적으로 술 취하지 않을 정도의 기준이 뭔지 또한 어떤 성경구절을 통해서라도 밝혔어야 되지 않을까요? 예를 들면, 알코올 농도 0.1% 이상은 안되고,눈감고 한쪽 발을 들고 10초동안 서있을 수 있으면 된다…라든가 하는 규정들 말입니다. 그러나 이 본문은 술이 아니라, 성령의 충만에 대해서 말씀하시려고 의도된 본문입니다.
만약 술에 관한 성경의 의도, 또는 하나님의 관심이 무엇인지 알려고 하면, 성경에 여러 본문들에서 술에 관하여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지를 다 찾아보면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성경이 해석하고 보완하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에서 명확하게 이해되지 않는다면,저 구절에서 이것을 더 명확하게 설명해주고 있고, 또 저 구절이 명확하지 못하면,또 다른 구절이 이 구절을 더 확증시켜주는 형태로 성경은 기록되었습니다. 이것이성경의 “자가해석능력”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예를 들어, ‘술’에 관한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싶다면, 성경을 두루 찾아보면 신자는 자연스럽게 느끼게 됩니다. 롬13:13을 예로 봅시다. 술이라는 단어가 어떤 단어와 같이 쓰이고 있는지 보면 금방 하나님의 마음이느껴집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롬13:13). 여기에서 술이라는 단어가 “방탕””음란””호색”이라는 단어 가운데 들어가 있습니다.기본적으로 이런 단어는 부정적이며 죄악에 해당되는 원초적이고 대표적인 단어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술에 관하여 신자들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마음은 어떤 것일까요? 술 자체가중립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술은 방탕, 음란,호색과 같은 반열에 놓일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마음은“술은 마시되, 취하지 않을 정도만 마셔라”를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5:22)를 보여주시려고 하는 의도라고 봐야 합니다.
사실 성경을 광범위하게 정기적으로 많이 읽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성경이 주는 용어와 표현이 성경 독자 자신에게 뭘 요구하는 지 자연스럽게다가오게 합니다. 이것이 성경이 하나님의 숨결로 되어진 살아있는 말씀이라는 증거입니다. 성경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정말 신자의 마음으로 매일 읽다 보면, 처음에는 몰랐던 것이 나중에는이해되어지고, 처음에는 반항하던 마음이 어느 순간 보면 온순한 모습으로 순종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됩니다. 이것이 성경의 신적 권위입니다. 성경이 어려운 것 같지만,사실 알고 보면 너무도 명료하고 분명해서 사람의 마음을 찔러 쪼개고 변화시킵니다.
성경은 처음 기록될 당시의 하나님의 의도는 설교되어지기에 앞서, 읽혀지게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소교리문답 89문에는, “말씀이 구원을 위해효과적으로 역사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에 대한 질문에 이렇게 답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성경읽기와 특히 설교를 사용하여 죄인들을 깨닫게 하고, 회심시키며,거룩과 위로를 더하사 믿음을 통해 구원에 이르게 하기 때문입니다.”성경은 하나님의은혜를 전달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입니다. 그런데 이 성경은 가장 먼저, “성경 읽기”라는 너무도 단순한 진리가 개인의 삶 속에서 시행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 되고 맙니다.조나단 에드워즈는 이렇게 말합니다. “마귀는 하나님께서 위대하고 영원한 법칙으로주신 거룩한 말씀에 사람들이 호의를 갖게끔 놔두지 않을 것이다.” 제임스 패커도 말합니다. “내가 만일 마귀라면, 사람들이 성경을 탐구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을 첫째 목표 가운데 하나로삼을 것이다.”
여러분이 만약, 지금 성경을 정기적으로 읽지 않고 있다면, 그것은 첫째 매일매일 마귀와의 영적 전투에서 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한 여러분이 교만에빠져서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이도, 인생을 살 수 있다고하는 착각과 자만에 빠져서, 하나님의 은혜의 방편을 너무도 쉽게 무시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계시되어 기록된 말씀을 매일매일 대하지 않고서 하나님의 영광은 없습니다. 성경은 여러분이 사업을 계획 할 때, 커피점을 열게 할지, 화장품 가게를 열게 할지를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커피점이나 화장품 가게는 동일하게 선한 사업입니다.그러므로 여러분이 어떤 사업을 해야 할지 두 개를 놓고 하나님께 물어 볼 필요가 없습니다. 물어 본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음성으로나 어떤 싸인을 통해서 답을 주시지 않습니다. 그것은 기독교신앙이 아닙니다. 사업자체가 인생을 망치거나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나쁜 사업이 아니라면 무엇을 선택하셔도좋습니다. 그러나 만약 여러분이 사회를 망치거나 인생을 병들게 하는 사업을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이런 기준들은 성경이 분명히 밝히고 있기 때문에, 성경의 가르침을 조금만 안다면충분히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결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만약 여러분이 선한 어떤 사업을 하기로 결정하고 나서, 그것을 어떻게 운영하느냐하는 것입니다. 이때 여러분은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지를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성경은 상공인, 기업가들에게 주는 지침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속이는 저울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 공평한 추는 그가 기뻐하시니라.”(잠11:1)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안다면 하나님의뜻은, 장사하는 사람은 반드시 “정직”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는 것입니다. 세금보고 정직하게 하고, 원료를 좋은 것을 쓰고, 또한 사람들에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최선의 서비스를 하고,게다가 약간의 이익이 준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양심을 파는 행동을 하면 안되다는 진리를 보여주는 가르침입니다.만약 이 사실을 성경을 통해서 읽고, 그렇게 실제로 순종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뜻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며, 곧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동하는 것은, 하나님의 어떤 특별한 계시를 음성이나 환상으로 보고 듣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제대로 묵상하고,익히고, 훈련해서 그대로 순종하는 삶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말씀을 제대로 순종했다면, 여러분이 어떤 길을 선택했다고 하더라도 결국 그길은 하나님의 뜻이 됩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신비입니다. 신자는 하나님께 A라는 길과, B라는 길을 놓고 어느 길을 갈까요? 라고 물어서 하나님의 뜻을 살피는 것이 아니라, A와 B의 길이 하나님의 뜻에 더 합당한 길이 어떤 것인지 성경이 가르쳐 주는 원리로 판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혹 그 두 개의 길이 다 성경에 위배되지 않는 길이라면, 두 개중 어떤 것을 선택하더라도결국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결과를 얻게 됩니다. 이것이 신비입니다. 이런 신앙의 과정은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니라, 성경의 명료성으로 분명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계시해 놓았기 때문에,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스스로 읽고 묵상하여서 얻을 수 있습니다.
6세기 교부, 그레고리우스 1세의 말이 멋집니다.“성경은 양이 걸어 다니고 코끼리가 수양할 수 있는 잔잔하고도 깊은 강이다.”심오하지않습니까? 양이 걸어 다닐 수 있을 정도로 얕은 강이 어떻게 코끼리가 헤엄칠 수 있는 깊은 강이 될 수 있습니까?양이 걸어다닐 정도의 강은 코끼리가 수영할 수 없을 정도로 얕을 것이며, 코끼리가헤엄 칠 정도의 강이라면 너무 깊어서 양이 빠져서 허우적 거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두 가지의 요소가전혀 서로를 충돌하게 하지 않고서도 성경은 얼마든지 무한한 하나님을 유한한 인간이 만나도록 명료하게 기록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스스로 성경을 묵상하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여러분이 성경을 읽지 않으면,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는 법칙을 모르기 때문에하나님이 원하시는 영광을 돌리기 힘듭니다. 신자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살아가야 합니다.그것이 곧 영광의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