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교리1 : 영광(고전10:31,마5:14-16,2017년5월7일 주일)
오늘부터 소교리문답의 순서를 따라 설교하겠습니다.
마틴 루터의 [Table Talk]라는 책에 보면, “교리문답에 관하여”라는 장에서 이와 같이 말합니다. “교리 문답은 기독교 신앙의 도리를 가장 정확하고 직설적이고 간추려서 진술합니다. 교리 문답은 가장 온전하고 훌륭한 교리이므로 설교를 통해 지속적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모든 공적 설교는 교리문답의 토대 위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나는 이것을 날마다 설교하고 날마다 낭독하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설교자들과 청중은 이것을 시시하게 여깁니다.”
나는 장로교회 목사로서, 성경의 교리를 시시하게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우리가 믿고 있는 바가 무엇인지 압축적으로 가장 잘 정리해 놓은 소교리문답을 가지고, 그 주제 순서에 따라 공예배시간에 처음부터 끝까지 설교 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은 그 첫 시간으로, 1문을 하겠습니다. 1문의 질문은 이렇습니다. “인간의 최고의 목적은 무엇입니까?”소교리문답은 1문의 답을 이렇게 내립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이 문답의 주제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영광”입니다. 나는 오늘 “어떻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것인가?”라는 방법론을 설교하지 않을 것입니다. 방법론은 소교리 제2문에서 명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신 오늘 나는 성경에서 말씀하는 “영광”이 도대체 뭔지에 대해서 본질적인 접근을 하되, 어원적인 용례와 복음과의 관계성으로 설명할 것입니다.
오늘 고린도전서 본문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do all to the glory of God.”영어에서는 glory라는 단어로 번역한 이 단어는, 성경 원어인 헬라어로는 “독사 (δόξα)”라는 단어입니다. 우리가 흔히들,“하나님께 영광 돌립니다.”라고 할 때, ‘영광’이 바로 “독사”입니다. 이 단어는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단어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 신자들 사이에 이 단어가 너무 가볍게 취급 되기도 하고, 심지어 남용되고 있는 것에 대해서 아픔을 느낍니다. 그런데 이 단어의 용례를 신약적 관점에서 살펴보면 이 단어를 그리 쉽게 내뱉기 힘들어집니다. 왜냐하면 신약 성경에서 말하는 “독사,””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단어는, 복음의 진수와 깊은 연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은, 크게 두 가지로 나타나지요. “그리스도의 낮아지심, 그리고 그리스도의 높아지심”이 부분은 나중에 소교리 제27문과 28문에서 다루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언뜻 생각하기에 “영광”은 그리스도의 높아지심과 관련 있다고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뭔가 화려함의 극치, 칭송 받을 만한 고귀한 상태에 이 “영광”이라는 단어를 붙인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진수와 관련하여, “영광”이라는 단어는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에 가장 먼저 사용됩니다.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이 없으면 높아지심도 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이 뭡니까? 성육신 사건, 고난과 십자가의 죽으심, 무덤에 머물러 계심입니다. 말하자면 신약 성경에서 “영광”이라는 단어는 가장 먼저 한 없이 비굴해지고, 치욕적인 상태로 스스로 낮아진 그리스도의 모습을 담는데 사용됩니다. 특히 사도 요한이 이 단어를 그렇게 사용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을 두고, “영광”이라는 단어를 두 번씩이나 사용합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영광을 표현할 때,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라고 표현했습니다. 우리는 “독생자”라는 단어에 주목해야 합니다. 헬라어 “모노게네( μονογενῆ)”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의 “모노(μονο)”는 영어의 mono와 어원이 같습니다. “하나”라는 뜻이죠. 그야말로, “His one and only son, His only begotten son”이라는 뜻입니다. 하나 뿐인 아들이라는 뜻이지요. 여러분 신약 성경에서, “독생자”라는 단어는 총 5번 쓰였는데, 4번을 사도 요한이 사용했고, 1번은 히브리서에 나옵니다. 히브리서에는 이 독생자라는 단어를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창22장의 사건을 인용하면서 사용합니다. 그리고 사도 요한은 이 “독생자”라는 단어를 유독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의 희생과 관련하여서 만 사용합니다. 예를 들어,“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이 구절에서 우리는 “독생자”뒤에 따라오는 동사 “주셨으니”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이 단어는 헬라어 원어성경으로“디도미(διδωμι)” 입니다. 이 단어에서 “파라디도미(παραδιδωμι)”라는 단어가 파생됩니다. 이것의 뜻은 “내어 주다”입니다. 롬 4:25에서 이 단어를 이렇게 사용합니다.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παραδιδωμι)이 되고…” 이 구절에서 “파라디도미”가 갖는 어감이 어떻습니까? 두 가지 어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희비”입니다. “희비가 엇갈린다”라는 말을 하는데요. 기쁨과 슬픔이 엇갈리는 것입니다. “독생자”를 내어주는 “수여자” 입장에서는 “비”입니다. 한없이 슬프고, 힘듭니다. 그러나 “독생자”를 받는 “수혜자” 입장에서는 “희”입니다. 구원의 즐거움과 감격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 “모노게네(독생자)”라는 단어를 “디도미(주다)”라는 단어와 같이 쓰면서, 하나님의 아버지의 마음과 이 세상의 은혜를 입을 모든 주의 백성들의 마음을 교차시킵니다.
이 구절에서 독생자라는 단어는 아버지가 아들을 사지에 내 몰아서, 죽게 하는 곳으로 스스로 내어주는 의미를 가지고 사용합니다. 마치 군대 사령관이 아버지가 하나 뿐인 아들을 죽을 줄 알면서, 전쟁터의 최선봉에 보내는 의미로, “독생자를 주셨으니…”라고 사용합니다. 이 “독생자”라는 단어에서 우주를 호령하는 하나님의 모습이 느껴지십니까? 아니죠.
“독생자”라는 단어는 성경의 독자들이 성경을 읽을 때,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제2위격으로서의 하나님이라는 위치를 잠시 잊어 먹도록 만드는 표현입니다. 이때 성경은 “독생자”라는 단어와 함께 “영광”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이 표현이 신약성경에 “영광”을 표현하는 가장 하이라이트입니다.“죄인을 위해 하늘의 제2위격의 하나님이신 분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시고, 또한 십자가에서 피 흘리고 죽으셨다.”라는 이 복음의 핵심을 말할 때, “독사”(영광)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이것이 사도 요한의 표현이고요.
사도 바울은 복음의 핵심과 영광의 관계를 어떻게 표현했을까요?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고후4:4)라고 표현했습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왜 “그리스도의 복음”이라고 해 버리면 알아듣기 쉬울 것을, 왜 이리도 복잡한 수식을 사용했을까요? 여기에 보면, “-의”라는 소유격을 세 번이나 씁니다. 실제 헬라어 원문에도 소유격 관사를 3개를 연달아 씁니다. 헬라어에는 관사가 24가지로 격변화합니다. 단수, 복수로 나누고, 남성, 중성, 여성으로 나누고, 또 이것이 주격, 속격, 여격, 목적격으로 변합니다. 그 만큼 헬라어가 복잡하게 보이기도 하지만, 성경의 내용을 정확하게 기록하는 데 더 없이 좋은 언어인 이유가, 관사가 세분화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24개로 격변화하는 헬라어의 관사 중, “투, 테스”라는 단 두 가지 종류의 소유격만 사용합니다. 먼저 단어를 네 개를 배열하고, 그 사이에 “-의”라는 뜻의 소유격 “투, 테스, 투”순서로 세 개를 그 단어 사이에 쑥 짚어 넣는 방식입니다. 굉장히 복잡하게 보입니다. 요새로 따지면, “김태길의 아내의 사돈의 팔촌” 이런 식입니다. 그냥 소개할 때, “저의 친척입니다.”라고 해 버리면 될 것을 소유격을 반복해서 쓰면, 듣는 사람의 머리가 촌수를 계산 하느라 복잡해 집니다.
영어 성경에도 보면, 소유격 of를 세 번 반복해서 씁니다. “…the light of the gospel of the glory of Christ…”헬라어도 영어와 문자 배열이 같습니다. 그냥 봐도 복잡한 표현을 바울은 성경에 기록합니다. 문학적으로 보면 가히 좋은 표현이 아닙니다. 아마도 오늘날 바울이 글을 써서, 출판사에 맡겼으면 퇴짜를 맞았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문학적으로 그것이 투박하게 보일 진 몰라도, 신학적으로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 여기에는 바울의 언어적 천재성이 엿보입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라는 표현을 통해서 그의 의도를 확실하게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보여주려는 바울의 의도는, “본질의 동일성”입니다. 즉, 4가지 본질,“그리스도=영광=복음=광채”라는 도식입니다. “그리스도 자신이 영광이며, 복음이며, 또한 광채다.”라는 것입니다. 또한 이렇게도 가능할 것입니다. “복음이 그리스도시며, 영광이며, 또한 광채다.”
이 사실이 왜 중요할까요? 그리스도의 존재론적 본성과 복음의 실천적 목적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그리스도의 존재론적 본성”은 뭘까요? 영광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성경에서 “영광”이라는 단어가 대체적으로 3가지 용례로 나타난다는 것을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본체로서의 영광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일 본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영광으로 존재하십니다. 하나님의 본체가 영광의 상태로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1서 4:16)라고 사도 요한이 표현한 것처럼, “하나님은 영광이시라”고 또한 표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 임재로서의 영광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의 본체가 특정한 시간과 공간 안으로 들어오시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광야교회 시절에는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 갈 때, 하나님의 영광은 빽빽한 구름과 함께 머물렀습니다. 또한 성막 위에 구름기둥이나 불기둥의 형태로 머물렀습니다. 이것을 히브리어로 “쉐키나”라고 불렀습니다. 셋째, 유효한 영광입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것을 “적용적 영광” 또는 “실천적 영광”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쉽겠다는 생각입니다. 이 적용적 영광은 사람들을 통하여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주기도문을 외울 때, 첫 마디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할 때, 이것은 분명히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려는 목적입니다. 또한 사람들의 선행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문제는 대게 세 번째 “유효한 영광”이라는 측면에서 발생합니다. 왜냐하면, 본체로서의 하나님의 영광은 절대불변하며, 모양도 형체도 없는 그냥 존재입니다. 그런데, 이 영광을 사람의 입이나 행동을 통해서 나타내시려고 할 때는 변수가 생깁니다. 그 변수는 인간의 불완전성입니다. 하나님의 본체적 영광은 완벽하지만, 그 영광을 나타내야 하는 인간은 불완전하다 보니, 영광이 영광으로 나타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이것을 두고 청교도 신학자들은 태양과 날씨에 비교했습니다. 태양은 불변합니다. 그런데 이 태양 빛이 대기권을 통과하면서, 변화가 일어납니다. 비가 오기도 하고, 태풍이 불기도 하고, 눈이 내리기도 합니다. 이때 마치 태양은 사라지거나 약해진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태양의 실체는 그대로입니다. 단지 대기권의 변화무쌍함이 태양의 실체를 왜곡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태양은 대기권에 영향을 줄 수 있지만, 대기권은 태양을 주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적용적 영광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수도 있지만, 때로는 인간의 부족함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이 왜곡될 수 있는 위험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죄성이나 부족함이 하나님의 본체적 영광을 가릴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다.”라는 말의 의미가 뭘까요? 하나님의 본체적인 영광이 덜 해지거나, 퇴색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불완전한 인간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려고 할 때, 왜곡되고 부족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바로 이점에서 아주 중요한 명제가 하나 생깁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에 어떠한 영향력도 행사 할 수 없다.” 무슨 말이냐 하면, 사람의 어떤 잘못도 하나님의 영광의 본체에는 전혀 해를 끼칠 수 없으며, 또한 반대로 사람의 어떠한 공로도 하나님의 영광의 본체에 선을 더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신자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하는 것이 인생 최고의 목적이 된다는 말은 무슨 말일까요?
복음 안에서 빛으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마태복음 본문, 5:14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사람이 “빛”이라는 정체성을 부여 받게 됩니다. 앞서 네 단어의 등식을 기억하십니까?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 그리스도=영광=복음=광채.” 영광이라는 단어는 구약과 신약에서 동일하게, “빛”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헬라어로 “포스(φως )”라는 단어인데요. 이 단어는 한글로 “광채”라고도 번역하고, “빛”으로도 번역했습니다. 특히 한글 성경에는 요한복음 1장에서 “포스”를 ‘빛’이라는 단어로 번역했는데, 사도 요한은 포스를 7번이나 사용합니다. 여기서 빛은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요1:5).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요1:9).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본성적으로 빛이신 하나님이신 분이, 이 땅에 빛으로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 모습은 이전의 천상에서 존재하시던 광채가 아니라, 또 다른 광채의 모습으로 오셨는데, God-man, 신인으로 오셨습니다.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사람이신 그리스도는 빛으로 오셨는데, 그 자체가 “하나님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셨습니다.
그 영광으로 오신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에게 주신 것은 복음의 영광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받고 중생하게 되면, 그 사람은 그 십자가의 복음의 영광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 영광의 풍성함 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 영광의 풍성함 안에 들어간다는 것은, 우리가 곧 빛이 된다는 뜻입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5:8). 우리의 신분이 어두움에서 빛이 되었다고 선포합니다. 이것이 복음의 영광 안으로 들어가고 난 다음 변화된 신자의 모습입니다.
“그리스도는 빛의 발원체이시며, 신자는 빛의 반사체다”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큰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신자의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영광은 여전하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에서 “너희”는 복수이고, “빛”은 단수입니다. 그래서 영어에서도 “the light”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뿐인 빛, 즉 그리스도의 빛을 말하는 것입니다. 빛의 발원체이신 그 빛을 각자의 반사체로 빛을 반사하면, 각자의 부족함으로 인해 그 빛이 굴절되고, 왜곡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빛의 본성에는 아무런 손상도 주지 않습니다. 다만 그 빛의 본성을 잘 드러내지 못하는 책임을 져야 하는 일들이 생길 뿐입니다.
둘째, 신자가 빛이라는 사실은 비추는 일을 할 뿐, 자신이 주목 받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본문 5:15과 16절에서는 두 번이나, “사람에게 비취게 한다”라고 했습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의 혜택을 입은 신자들이, 자신에게 들어온 복음의 영광의 광채이신, 그리스도를 사람들에게 비추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빛을 소유했다면, 그 빛은 반드시 사람들에게 비춰져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께서 빛으로 이 땅에 오신 목적이며, 또한 영광이 되시는 목적입니다.
그러면 신자는 어떻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나요? 엡5:8-9은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여기서 세 가지를 말씀합니다. “모든 착함, 의로움, 진실함” 모든 착함은 “선”, 의로움은 “의”, 진실함은 “진리”입니다. 이것은 죄성을 가진 인간은 소유할 수 없는 그리스도만의 절대적 성품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그리스도의 선, 의, 진리가 우리 가운데 들어오셔야만 이런 “빛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 “중생”에 관한 설교를 통하여 살펴봤던 것처럼, 요15장의 예수님의 가르침을 되새겨야 합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 예수님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법칙은, 그리스도 안에 접붙임 바 되어 거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빛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어떤 빛의 열매도 없습니다. 그러면 그 빛의 본체인 영광도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길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만을 의지하고, 그리스도가 아니면 안 된다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유일한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