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나눔
요한복음16 : 죽음에서 몸의 부활까지(요5:26-29, 고전15:12-20, 2017년4월23일)

요한복음16 : 죽음에서 몸의 부활까지(5:26-29,고전15:12-20, 2017423)

오늘 본문 28절은 무덤 속에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라고 말씀합니다. 무덤속에 있는 사람들, 곧 죽었던 사람들이 주님의 음성을 듣는 때가 온다는 것은 재림 때를 말합니다.주님의 재림 때까지, 무덤에 머무는 사람들의 육신의 잔여물들은 계속 썩어가기만 합니다.그러다가 재림 때 무덤 속에 있던 사람들은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이 음성은 어떤것일까요? 살전4:16에는 주님의 재림 때 세 가지의 소리가 난다고말씀합니다. 1. 주님의 호령 소리, 2. 천사장의 소리,3. 하나님의 나팔 소리.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살전4:16)라고 묘사합니다. 여기서 주께서 호령하신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NASB에서는 “with a shout” NIV에서는 “with a loud command”라고 번역했습니다. 이 우렁찬 소리는 역사상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종류의 소리일 것입니다. 그 어떤 소리보다멀리 그리고 광범위하게 퍼질 것입니다. 태평양 밑바닥에서부터 히말라야 산봉우리까지 울려퍼지는 또록또록 하고선명한 소리일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재림 하실 때, 큰 소리를 내시는데 이 소리는 누가 들으라고 외치시는 것일까요? 게할더스 보스(Geerhardus J.Vos)는 분명히 이 소리는 무덤에 죽어 있는 자들에게 외치는 소리라고 설명합니다. 성경은 그 외치는 소리의 내용이 뭔지 기록하지 않습니다만, “잠자는 자들이여 깨어나라!”라고 외치지 않을까? 하고 개인적으로 상상해 봅니다. 제가 이렇게 상상하는 이유는, 사도 바울은 죽은 자들, 특히 신자로서 죽은 자들을 표현 할 때 잠자는 자라고표현했기 때문입니다. (고전15: 18, 20).

우리는 성경이 인간의 사후 세계를 표현 할 때, “잠자는 자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에 대해 먼저 살펴보아야 합니다. 성경의 이 표현은 기독교 역사 오랫동안많은 논란을 낳았습니다. 이 표현이 논란을 낳은 가장 큰 이유는, 재림때 몸의 부활이 기다리고 있다면, 그 전까지 영혼의 상태는 어떤 상태로 존재하는가? 라는 질문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주님의 재림 때몸의 부활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완성된 상태가 아닌 어정쩡한 상태에 머물게 되는 것이기에, 사람들은 이를 두고중간 상태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중세 타락한 로마 카톨릭의 연옥설도 이 중간 상태에 대한 것을 악용하여 만든 것이지요.

그러면 인간 사후에 몸의 부활 전까지, “중간 상태라는 것이 과연 성경적인가요? , 몸의 부활이 있기전까지는 중간 상태라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이 단어는 성경에서 명시된 표현이 아니라 신학용어입니다.그러나 몸의 부활이 있기 전까지 신자의 영혼은 아직 완전한 상태에 이르지 못했다라는 측면에서 중간 상태라고 표현하는 것이맞습니다. 미국의 개혁신학가 마이클 호튼(Michael Horton)은 이 중간 상태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우리가 죽을 때 천국에 가는 것은 일종의 간이역이지복음에서 말하는 최종의 소망은 아니다.”

혹자들은 궁금해질 것입니다. 그러면 신자가 죽어서 즉시 들어가는 그천국은 아직 부족하고 불편하며, 몸의 부활을 입고 나면 더 나은 천국을 다시 받게 되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죽음 직후에 가게 되는 천국이 간이역이라는 말은, 또 다른 더 좋은 천국이 나중에 또 기다리고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물론 요한계시록 21장에서새 하늘과 새 땅, 신자가 영원히 거할 새로운 장소가도래할 것을 명시하고는 있습니다. 그러나 새 하늘과 새 땅은 죽어서 즉각 가는 천국과 본질적으로 완전히 다른또 다른 하나의 천국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질적인 차이라기 보다는, 단계의 차이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누군가LA에서 Seattle까지 차를 타고 여행을 가기로 계획을 합니다.그런데 중간에 San Francisco에 들러서 하룻밤을 자고 아침에 일어나 다시씨애틀로 향합니다. 이때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씨애틀로 향하는 것은, 샌프란시스코가 씨애틀보다 훨씬 못하다거나 불편해서 떠나는 것이 아니라. 처음 계획한 목적지가씨애틀이기 때문에 떠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샌프란시스코는 간이역에 불과하며, 중간단계입니다.

마치 이와 같이 지금 현재 천상에 존재하는 천국은 완성된 최종의 모습이 아니라, 중간 단계라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그래서 영원한 삶이 주어질 장소가 새창조에 의해 최종적으로 주어진다면, 거기에 살아갈신자의 몸 또한 그 장소에 적합한 새창조로 최종적인 완성이 있어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그러면 중요한 질문, “중간 상태에서 신자의 영혼은 과연 잠자는가? 입니다. 아닙니다.사후의 영혼은 절대 잠자지 않습니다. 성경이 표현하는 잠자는 자라는 표현은 단지 죽은 자를 표현하는 은유법입니다. 고전15:51,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라고 분명히 밝히듯이, 사후의영혼은 잠자지 않습니다. 그래서 영혼 수면설같은 주장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영혼가멸설”, 즉 몸이 죽을 때, 영혼도 같이 죽고, 부활 때 몸과 영혼이 같이 부활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사후의 영혼이 즉시천국에 들어가서 예수님과 함께 한다고 말씀합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이한편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23:43)라고 말씀하셨을 때, 만약 그 강도의 영혼이 죽자마자 수면상태로 들어간다면, 예수님을 보지도, 의식하지도 못할 것인데, 왜 낙원에함께 있을 것이라는 약속을 주셨을까요? 이 약속은 분명히 사후에도 계속 영혼은 의식이 살아있는 상태로 존재하는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신자가 죽으면 그 영혼은 즉시 천국에서 그리스도와 의식이 생생한 가운데 함께합니다.고후5: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사후에 몸을 떠나 영혼은 주님과 함께 있을 것이라 성경이 표현 하는 것은, 죽음직후 영혼의 의식이 주님 곁에 있을 뿐만 아니라, 주님을 알아보고 또한 주님도 그 영혼을 알아보는 가운데일어나는 실제 상황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32, “사람의 사후 상태와 죽은 자의 부활에 보면, 1항에서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사람의 몸은 사후에 흙으로 돌아가서 부패를 겪게 되지만, 그 영혼은 불멸의 실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죽거나 잠자지 않고, 그 영혼을 주신 하나님께로즉시 돌아간다. 그때 의인의 영혼은 거룩함으로 완전하게 되어, 천국에영접된다. 거기서 그들은 빛과 영광 가운데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몸의 완전한 구속을 기다린다.그리고 악인의 영혼은 지옥에 던져진다. 거기서 그들은 고통과 암흑 속에서 지내며,그 큰 날 마지막 심판을 받도록 남겨져 있다. 몸에서 분리된 영혼이 가게 되는 이두 장소 이외에는 다른 어떤 곳도 성경은 인정하지 않는다.”

사후에 영혼이 죽지 않거나, 잠자지 않는다는 것은, 의식이 살아있다는 말입니다. 또한 그 살아 있는 의식은 지상에서 살아 있을 때의 연장선상에서의식이 살아 있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죽는다고 지상의 삶을 다 잊어버리고, 마치 컴퓨터 포맷 시키듯이 완전히 새로운 기억체계를 부여 받는 것이 아닙니다. 이를 두고,R. C. Sproul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영혼이 죽지 않는다는 의미는,죽음 이후에도 우리의 개인적 정체성과 실존이 계속된다는 의미이다….우리 개인의 삶은죽는다고 중단되지 않는다.”이것이 옳은 말입니다.

인생의 절망에 빠진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차라리 죽자,죽으면 다 끝이니까….죽으면 다 잊어버리게 될 것이고, 모든 게 다 마무리 될꺼야…”그러나 성경은 이런 말을 전혀 지지하지 않습니다.한번 시작된 개인의 삶은 그 육신이 죽는다고 해서, 끝난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한번 시작된 개인의 삶은 중단되지 않고 계속되는 것입니다. 사후의 개인의 영혼은몸은 없지만, 그 의식은 생생하게 살아서 지상의 삶의 연장선에서의 기억체계를 여전히 가지게 됩니다.사후에 우리의 기억은 우리의 의식 속에서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 좋은 예가 누가복음16장에 나옵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가 사후에 각각 천국과 지옥에 갑니다.이 때 지옥에 들어간 부자는 그곳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천국의 아브라함에게 부탁을합니다.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16:27-28). 이 대화에서 부자는 아직 지상에 살아 있는 자신의 형제 다섯 명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을 뿐더러, 그들을 걱정하기까지 합니다. 만약 사후의 영혼의 의식이 살아있으되 지상의 의식과 단절되어,완전히 다른 의식 체계를 가지고 있다면 어떻게 이 부자가 이런 부탁을 할 수 있을까요? 어떤 이들은 이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가 단지 비유에 불과하며, 실제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에영혼의 사후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설사 비유에 불과한 이야기라 할지라도,그 비유 속에 나오는 대화의 내용까지도 비유적이라고 치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티칭 사역을 하실 때, 비유법을 많이 사용하셨습니다. 비유는 실제 없는이야기를 지어내어서 하시기도 하고, 있을 법한 내용을 예를 들어 설명하시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비유의 내용이 진리에 어긋나도록 가르치신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모든비유는 성경의 진리와 일치하고 잘 부합하도록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므로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가 실제 사건이었던지,아니면 비유 이야기였든지 그 내용은 진리에 반드시 부합합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에서 죽음은, 지상과 천상의 삶이 완전히 단절되는것이 아니라, 연장입니다. 지상에서의 가족이었던 사람들은 천상에서 더이상 혈연이라는 끈으로 묶이지는 않지만, 여전히 가족이었던 것을 기억하고 서로 만나면 기뻐할 것입니다.그리고 그때에는 지상에서의 서로간의 오해는 풀리고, 사랑의 관계는 더욱 돈독해 질것입니다. 혹 목회자와 교인간에, 교인과 교인간에 오해로 서로 갈라섰던아픔이 있었다 하더라도, 사후에 다시 만날 때에는 지상에서보다 더 정확하고 바른 지식으로 서로를 이해하는가운데 만나게 될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심판 날 다시 만날,분쟁하는 목사와 교인들]이라는 책에 보면 그런 내용이 나옵니다. 물론 심판 날은 예수님의 재림 때 나타날 현상을 말한 것이긴 하지만, 그 책의 내용면에서 보면,심판 날이 아닌 중간 상태에서도 충분히 적용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 책에 보면,목사와 교인들 사이에 갈등이 생겨서 서로 헤어졌습니다. 그런데 심판 날 다시 만나게되면 지상에 있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만나게 되는데, 가장 큰 차이는 서로에 관한 지식이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의 지식은 지상에서보다 훨씬인지력과 이해력이 넓어지고 깊어집니다. 그리고 서로 알고 지내던 사람에 대한 지식이 훨씬 더 많이 분명해지고,많아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상에서는 서로 갈등하고 헤어졌지만, 그때에는 서로가 만나서 서로에 대한 상태를 정확하게 편견 없이 보게 됩니다. “교인들은 자기목회자가 신실하고 충성스러운 사람이었는지 아닌지를 알게 될 것이고, 목회자들은 모든 교인들의 상태를 알게될 것입니다.”라고 에드워즈는 말합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표현합니다.“그래서 모든 잘못과 모든 부당한 비난들이 끝장나게 될 것입니다.”이런 일들이 사후에신자들에게서 일어날 일들인데, 어떻게 이게 가능할까요? 천상의 영혼의의식이 지상에서의 의식과 단절되지 않고, 연장선 상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만약 너무 억울한 일을 당했다고 해서 너무 실망하지 마십시오. 그때가 되면사람의 의식은 그대로 연장되고, 그러나 그 지식은 확대되어서 자연스럽게 진실이 다 드러나고 이해되는 순간이올 것입니다.

우리가 중간 상태라고 부르는 가장 큰 이유는, 아직 몸을 입지 않았기때문입니다. 사후에 사람의 영혼은 주님의 재림이 도래하기 전까지는 몸 없는 영혼의 상태로 존재합니다.이런 상태가 과연 구체적으로 어떤 상태인지 우리는 상상하기 힘이 듭니다. 몸이 없는영혼의 상태로 과연 무엇을 보고, 말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이 듭니다.그러나 조금 전 말씀 드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32 1항에서는, “거기서 그들은 빛과 영광 가운데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라고 기록하는 것처럼, 신자의 영혼은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 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면 비가시적 존재이신 하나님을 어떻게 본다는 것일까요? 그것도 눈도 없는 영혼의 상태로말입니다. 도무지 이해 불가의 상태입니다. 뇌도 시신경도 없는 상태에서하나님을 본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우리는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조나단 에드워즈는 설명하길,“우리 영혼이 하나님의 존재를 직접적이고 즉각적으로 볼 것이기 때문에, 신체적인시력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에드워즈는직접적이고 즉각적이라는 표현을 했습니다. 천국에서의 감각은 직접적이고 즉각적이기 때문에, 지상에서의 방식으로 사물을 알아보고 소통할필요가 없어집니다. 사실 지상에서의 시각은 직접적인 방식이 아니라 간접적 방식입니다. 어떤 피사체에 빛이 비취고, 그것에 반사된 가시광선이 눈의 망막에 전달되고, 그것이 특별한 전달물질에 의해서 전기신호로 바뀌고, 그것이 시각을 담당하는 뇌에 전달되어,그림같이 피사체가 인식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 번의 간접적인 시각의 인식 단계를거치고 나서야 분명해지는 간접적인 감각입니다. 그러나 천상에서는 더 이상 이런 간접적인 방식이 필요 없고,몸은 없지만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방식으로, 지상에서의 오감을 뛰어넘는 인식체계가생기게 됩니다.

이처럼 중간 상태에 있는 영혼은 몸이 없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아직미완의 단계이며, 최종에 이르지 못한 단계입니다. 그러나 몸이 없어서불편하거나 부족한 상태를 뜻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아직 완전함에 이르지 못한 상태일 뿐입니다.이를 두고, 게할더스 보스는, “이는 늘 입는버릇해서 입고 있지 않으면 그리워지는 옷이 만들어내는 편함이나 불편함 정도 같은 것이다.”라고 표현했습니다.말하자면 불편함은 없지만 그렇다고 완전한 편함으로 완성된 단계가 아닌 정도라고 보면 좋을 것입니다.

그럼 이제 우리는 몸의 부활의 단계로 넘어가서 생각해 봐야 합니다. 먼저 부활의 범위가 어떻게 될까요? 본문은무덤 속에있는 자가 ”(28)라고 표현했습니다. 여기서 라는 단어는 헬라어 원어 성경에 판테스(πάντες)”라는 단어입니다. All, everyone이라는 뜻이지요. 판테스라는 단어에는 세 가지 큰 의미가 있습니다.첫째, 악인과 선인 모두입니다. 그래서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29)이라고 말씀합니다물론 선인과 악인이 같은 시간에 부활한다는 전제는 무천년주의해석에 입각한 것입니다. 만약 전천년주의의 해석을 따르게 되면, 선인과악인의 부활은 1,000년의 시간차가 나게 됩니다.

둘째, 죽어서 무덤에 있는 사람과 현재 살아서 부활을 맞이할 사람 모두입니다몸의 부활은 죽었던 과거의 사람과 예수님 재림 시 아직 살아있는 모든 사람을 동시에 포함합니다.

셋째, 무덤이 존재하는 사람이든지 아니면 무덤이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든지상관 없이 모두. 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에서 성경은 몸의 부활을 입는범위를 명시합니다. 몸의 부활은 신자에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선인과악인에게 다 일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혹자들은 질문합니다. 비행기 폭파사고로 죽은 사람이나, 폭탄 테러로 죽었던 사람들이나, 바다에서 상어밥이 된 사람이나, 화재로 불타서 죽은 사람 등, 몸의 어떤 일부도남아 있지 않거나, 무덤 자체가 없는 사람은 부활 시 부활할 몸이 없는데, 어떻게 되는가? 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했던 것이썩는다고 해서 그 물질의 성분이 무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물리,화학의기초상식을 예를 들어보면, 물질의 가장 기초는 원자입니다. 지금까지밝혀진 물질의 최소단위인 원소가 90개가 넘는 것으로 압니다. 수소가가장 가볍고, 우라늄이 가장 무거운 원소지요. 이런 것들이 물질을 이룹니다.또한 사람의 몸도 이런 것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런 원자는 몸이 죽고,썩어지는 것과 상관없이 항상 존재합니다. 원자는 사람의 호흡이 멈추는 것에 전혀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한 사람에게 고유하게 부여되었던 그 원자는 그 사람이 죽고 나서도 계속 지구상에 남아있게 됩니다. 그러기에 무덤이 있는 사람이든지 무덤이 없는 사람이든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이 세상의 물질의 기초를 만드시고, 원자와 전자, 중성자와 양자 같은 미시세계를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셨습니다.하나님이 만드신 이 물질의 기초단위와 체계들은 하나님 외에는 발생시키거나, 사라지게할 어떤 피조세계의 에너지나 주체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주님의 재림 때,어디엔가 있을 각자 고유하게 부여되었던 그 원자들을 다 끌어 모으셔서, 그것으로부활의 몸을 다시 입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새 창조를 행하실 때, 완전히 새롭게 없던 물질을 다시 만들어서 몸의 부활을 입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원래 창조하셨던고유의 것들을 새롭게 하시는 방식으로 마지막 날에 새 창조를 하십니다.

그러면 몸의 부활은 어떤 방식으로 일어날까요? 땅과 바다,심지어 공중에서 사람들의 몸이 일어납니다. 그 속에는 아담과 하와의 몸도 있고,아브라함과 모세의 몸도 있습니다. 이 몸들이 살전 4:17절에 의하면, 구름 속까지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하게 됩니다. 이때 일어나는 신기한 현상은, 몸과 천상에 있던 영혼이 재결합을 하는 것입니다.그러면 영혼과 재결합을 하는 몸은 도대체 어떤 몸일까요? 대개의 개혁신학가들은 부활의몸은 지상에서의 몸을 입되, 다른 특성의 몸을 입게 될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이를 두고 마이클 호튼은, “우리의 몸은 교체되는 것이 아니라 변화될 것이다.”변화하다라는 단어는 알라쏘(ἀλλάσσω)”인데, 여기에서 이 단어는 외형이 완전히 바뀌지는 않지만, 그 특성이 바뀌는 것으로 쓰였습니다. 부활의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총 11번 나타나시는데, 그때 예수님을 보고도 한눈에 못 알아본 경우도 있고, 한 눈에 알아본 경우도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새로운몸을 입으셨지만, 그 외형이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바뀌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줌과 동시에 그러나 완전히 새로운특성을 가졌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부활의 몸을 입고, 주님과 공중에서 만나게 될 때,두 손과 두 발, 그리고 눈, ,입이 지상의 몸과 외형적으로 유사할 것입니다. 그래서 지상에서 먹고 마시던 일들을새로운 부활의 몸을 입고서도 계속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배가 고파서 먹고 마시는 것과는 다른 특성을갖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포도주를 마시되내 아버지의 나라에서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26:29)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또한 성경은 새 창조의 세계에서 어린양의 혼인 잔치가 있을 것이며, 그때 고기를먹는 것을 묘사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볼 때, 부활의 몸은 뭔가 필요해서음식을 섭취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기쁨에 참예하는 방식으로 그것을 섭취하게 됩니다.외형적인 것은 약간 남아 있지만, 그러나 완전하고도 신비한 특성을 가진 몸을 입게된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면 왜 우리의 몸은 최종의 시간이 올 때, 지금과는 비슷한 면을가지면서도 또한 완전히 다른 특질을 소유하게 될까요? 마이클 호튼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현재 상태에서 이 몸은 하늘의 도성의 영광을 견딜 수 없다. 이 몸은 다가올 시대에 참여하려면그리스도의 몸처럼 영화롭게 되어야 한다. 지금의 타락한 상태에서 혈과 육은 시온의 기쁨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신자의 몸은 주님의 재림의 때에, 공중에서 각자의 영혼과 재결합한 후,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의 영광에 참예할 수 있는 영광스런 몸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인류가 단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4/24/2017 6:26:00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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