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나눔
요한복음 ⑮ : 부활의 주님(요20:1-10, 2017년 4월 16일 부활주일)

요한복음 ⑮ : 부활의주님(20:1-10, 2017 4 16일 부활주일)

    본문1절은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이라고 시작합니다.오늘날로 따지면 주일, 일요일 아침을 말합니다. 우리는 이틀 전 금요일에 Good Friday Service, 주님의 십자가의 죽으신 날을 기념하는 예배를 드렸습니다. 어떤 분들은 궁금해 할 것입니다.예수님이 금요일에 돌아가셔서 일요일 아침에 부활하셨는데, 왜 우리는 사도신경을 외울때장사한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라고 하는가?라는 의문입니다. 그 이유를 알려면 성경의 유대인들의 시간 개념을 이해해야만 합니다.성경에 나오는 유대인의 하루는, 오늘날 우리처럼 밤12시에 시작하여 그 다음날 밤까지가 아닙니다. 그들은 저녁 6시가 하루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오후까지를 하루로 칩니다. 오늘날에는 금요일 만약 1일이면 토요일은 2일로 바뀌는개념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적 사고에서는 금요일이 1일이면서 동시에2일이 되고, 토요일은 2일이면서 동시에3일이 되는 개념입니다. 창세기 1장도 그런시간 개념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이는 첫째 날이니라”(1:5). 성경의 시간 개념은 아침부터 시작하지않고, 저녁부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까지를 하루의 개념으로말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금요일 낮에 돌아가시고, 금요일 저녁이되면서 이틀째가 되십니다. 그리고 토요일 밤부터 사흘 째가 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오늘 본문을 기록할 때, “안식 후 첫날이라고 기록하면서,주님의 부활사건이 사흘 만에 일어났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러면 왜 성경은 예수님의부활의 시간을 적시하고 있을까요?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예정된 시간에 죽음에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그리스도께서는 예고 없이 갑작스럽게 죽음에서 깨어난 것이 아닙니다. 이미 예고가되었고 그 예정된 시간에 맞추어서 부활하셨습니다. 24:46,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라고 예수님이 이미 부활 사건의정해진 시간을 예고하셨습니다. 이 부활의 시간 예고는 예수님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이전 선지자의 예표를 통해서도 보여 주셨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요나입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요나의 예를 드십니다. “요나가 밤낮 사흘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12:40).BC 8세기 때, 이미 요나의 표적을 통해서 예수님의 부활의 시간을 예고 했고,또한 그 요나의 사건은 예수님의 입술을 통해서 자신의 부활의 시간을 다시 확정시키는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의부활의 시간을 예고한 것이 왜 중요할까요? 첫째,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부활사건은 하나님의 부활의시간표안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이 말은 불확실성이 아니라,확실성을 의미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믿음은 확실성안에서 일어납니다.지난번 설교들 중 칼빈의 5대 교리에 관한 것 중, 불가항력적 은혜, 무조건적 선택, 제한 속죄 같은 교리들은믿음의 확실성에 관한 내용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출발이 우리 자신으로부터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구원계획표 안에서 시작하므로 확실할 수 밖에 없습니다. 믿음의 시작이 하나님의구원 계획표 안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그 어떤 인간의 공로나 또한 반대로 인간의 어떤 실수도 개입될 수 없기에그 믿음은 확실하게 보장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신자의 믿음의 확실성 뿐만 아니라, 믿음의 대상인 그리스도의에 대해서도 확실성을 유지합니다. 그 확실성은 성경의 예언(예고)”를 통해서 나타납니다.

    예를 들면성경은 큰 두 가지 관점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예고를 합니다. 1. 그리스도의 낮아지심(비하), 2. 그리스도의 높아지심(승귀)라는 관점입니다. 소교리문답 27문과28문에서 이것에 대해 가르칩니다. 이 두 가지 관점으로 성경은 지속적으로 그리스도에관하여 예고했고, 정확하게 성취됩니다.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에 관하여는성육신, 사생애, 공생애 끝자락의 고난과 죽으심, 사흘 동안 무덤 가운데 머무심 등으로 나타날 것이라는 여러 구약 선지자들의 증언을 통해서 예고됩니다. 그리고 정확하게 성취됩니다. 그리스도의 높아지심에 관하여는 부활, 승천,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심, 심판주로 오실 것임등에 관한 예고입니다. 이것 또한 마지막 심판주로 오실 것에 대한 예고 말고는 다 성취되었습니다.이처럼 그리스도는 어느 날 우연히 오시게 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비하와 승귀라는큰 두 가지 관점으로 예고 되었고 그것이 성취된 사건입니다.

    둘째,예수님만이 생명의 주가 되심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사흘을 예고하시고 그대로 죽음에서 일어나셨다는 사실은, 자신이 생명의 주인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이 세상에 그 누구도 자신이 언제 깨어날것이라는 것을 예고한 채, 죽었다가 그것을 실제로 정한 시간에 지켜서 깨어날 사람은 없습니다.이 사실이 왜 중요할까요? 세상에는 잠시 죽었다가 깨어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난무하기때문입니다. 그것이 사실일 지라도 그 누구도 자신의 죽음 이후 깨어날 시간을 예고하고, 그 예고한 시간에 맞추어서 일어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생명에 관한 한 아무런 권한이없기 때문입니다. 요새 술수와 마술 또는 초자연적인 능력들을 발휘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자신의 몸을 벽에 통과시킨다든지, 자유의 여신상을 사라지게 한다든지 하는 것 들입니다.이런 것들은 어떤 속임수를 써서 그렇게 한다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Dynamo라는 사람은 대낮에 사람들이 모여있는 가운데서 갑자기 물위를 걷기도 하고, 하늘을 날기도 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것이 어떤 마귀의 힘을 빌어서 그렇게 하든지 아니면어떤 술수를 써서 그렇게 하든지 상관없이, 그 사람이 절대 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면, 자신의 심장을 멈추게 했다가 사흘 후에 다시 뛰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신의멎은 심장도 사흘 후에 다시 뛰게 하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셨습니다. 이것은 자신이 생명의 주가 되신다는증거입니다. 자신의 멎은 심장도 다시 뛰게 하실 수 있다면, 다른 사람의생명을 다시 살리실 수 있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셋째,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다른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들과는 다른 구속사적 의미의 사건입니다. 성경에는 예수님 외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의 예가 일곱 명이 나옵니다. 사르밧 과부의아들(왕상17), 수넴여인의아들(왕하4), 회당장 야이로의딸(5), 나인성 과부의 아들(7), 베다니의 나사로(11), 다비다라고 하는 도르가(9), 유두고(20). 이들 중 나사로를 제외한 여섯 명은 모두사흘이 되기 전에 살아났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사흘이 되기 전에 살아났다면, 실제로 죽지 않았을 것이라는 의심이 많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실제로 그 당시에 예수님의 기절설을주장하는 사람들이 꽤나 있었다는 것이 그것을 방증해 줍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완전히 심장과 숨이 멈추었습니다.19장에 보면 군병이 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를 찔렀고, 피와 물이 나왔다고 기록합니다(19:34). 중동의땡볕 아래에서 손과 발에 20센티미터 짜리 못이 박힌 채 6시간동안십자가에 달리셨다가, 게다가 옆구리에 창에 찔려 구멍이 나서 물과 피를 다 쏟았는데도 죽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요?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유독나사로는 나흘 만에 예수님께서 살아나게 하셨습니다. 11장에서는 나사로가나흘이 되어서 냄새가 난다고 기록합니다(11:39). 분명히 중동지방에서 시체를 굴 속에 장사 지내면, 나흘 째부터 그 몸이 썩기 시작한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의 몸은 죽었지만 썩으면 안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그렇게 예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16:10을 현대인의 성경은 이렇게 번역합니다. “주께서 나를 무덤에 버려 두지 않으시고 주의 거룩한 자를 썩지 않게 하실 것이다.”그리스도의몸이 썩지 않을 것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또한 KJV에서도,“…neither wilt thou suffer thine Holy One to see corruption.”여기에서Holy One은 그리스도를 가리키며, 그의 몸이 썩는 것을 보지 않게 하실 것이라는뜻으로 corruption이라는 단어로 번역했습니다.

    그러므로죽음에 있어서 예수님의 몸 만큼은 반드시 두 가지를 동시에 충족하는 것입니다. 1. 실제로 완전히 죽었다는것을 보여줌과 동시에, 2. 그 몸이 썩기 전에 다시 살아나서, 모든죽은 자들의 몸이 이미 썩었지만 다시 새롭게 예수님처럼 완전히 썩지 않는 몸을 갖게 될 것에 대한 첫 열매가 되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고전15장은 부활의 몸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고전15:50).“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고전15:52-53).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성경에 기록된 다른 일곱 명의 부활 사건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그 이유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은 이제 더 이상 썩지 않는 완전한 몸으로 변화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몸으로 다시 죽지 않으시고 그냥 승천하셨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일곱 명의 사람들은 다시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 몸은 이미 썩었습니다.이것이 예수님의 부활과는 다른 이유입니다. 그들의 몸은 이제 썩었고,다시 썩지 않을 몸을 입을 시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시간은 예수님의 재림의시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신자의 몸의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셔서, 지금 이 시간에도 하늘에서 부활하셨던 모습 그대로 계십니다. 이것이 신비입니다.

    혹자들은예수님께서 승천하셔서 어떤 다른 영적인 모양으로 존재하실 거라고 상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예수님께서는 이 땅에서 부활하셨던 모습 그대로 지금 존재하고 계십니다. 2위격이신 성자 하나님이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고난가운데 평생을 보내시고,또한 십자가 위에서 최고의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셨습니다. 또한 승천하셨습니다. 그런데 승천하신후, 예수님은 성육신 하시기 전의 모습으로 되돌아 가시지 않았습니다. 보이지 않는 영적 존재로 계시는 하나님의 본체가 이제 눈에 보이시는 하나님의 본체로 천상에 머무시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2천년 전 부활하셨던 그 몸으로 지금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십니다.  그의 몸은 완전한 몸입니다. 아침마다 혈압을 제거나, 혈당 체크를 할 필요가 없는 완전한 몸입니다. 그 몸은 더 이상 삼차원 공간에 제약을 받는 몸이 아닙니다. 인류가 한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완전하고도 신비한 몸인데, 영혼과 몸이 결합된 완전체입니다. 이 완전체의첫 케이스를 예수님께서 가장 먼저 보여주신 사건입니다.

   그래서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15:20)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에는 그리스도께서잠자는 자들의첫 열매가 되셨다고 합니다. 잠자는 자들은 누구를 가리킬까요?지금 이미 죽고 무덤 속에서 그들의 몸이 이미 썩어버린 사람들을 잠자는 자들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우리는 이 구절을 두고, 신자의영혼이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어떤 특별한 공간에서 잠을 자고 있을 것이라고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잠자는자들이라는 표현은 그들의 영혼은 이미 천국에 있지만, 예수님처럼 완전한 몸을 입지 않은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그러므로 이미 죽은 자들의 영혼이나 또한 아직 살아있는 신자의 영혼은 아직 완전한 몸을 입은 적이 없습니다.오직 예수님만이 완전한 몸을 입고 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시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에서예수님의 부활이 갖는 의미는, 신자가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완전하고도 새로운 영원한 몸을 기다리는 소망이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몸의 부활을 이루시지 않았다면, 오늘날 기독교의 믿음은 허상이 되고 맙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고전15:17). 기독교 신자의 믿음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근거합니다. 왜 이것이 중요할까요? 아담의 줄기에서 난 모든 인류는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죽은 자로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는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2:1). 저와 여러분은 자연인으로머물러 있는 동안 우리의 죄로 죽어 있었습니다. 누군가 살리시지 않으면 그대로 영적 죽음의 상태로 심판의길로 가야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서 스스로 죽게 하심으로 죽음의 세력을잡고 있는 마귀를 그런 방법으로 멸하셨습니다. “그도죽음을 통하여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2:14). “또 죽기를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2:15).

    그리스도의죽으심과 부활은 큰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죽음의세력을 잡고 있는 마귀를 멸하시는 것입니다. 둘째, 죽음의 공포로 평생종 노릇하는 인류를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자에게 죽음이란 어떤 의미입니까? 공포입니까? 아니면 새로운 삶에 대한 소망입니까? 당연히새로운 삶에 대한 소망입니다. 기독교 신자만큼 죽음에 대해서 의연한 태도를 가지는 사람들이 있을까요?

    김영순 권사님이위암 말기로 판정 받은 후 2년 정도 치료를 받아 오셨는데요. 며칠전 병원에서는 최종적으로 모든 치료를 중단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제 의학적인 기대로 보면 권사님에게 남은시간이 얼마 없다는 판단입니다. 이런 와중에 권사님이 의식이 조금이라도 있을 때, 목사와 교우들과 예배를 드리고 싶다고 해서, 이틀 전과 어제 예배를 드렸습니다.예배를 마치고 권사님이 제게 그러십니다. “목사님 그 동안 너무 감사했습니다.기도도 많이 해 주시고너무 고마웠습니다.”그런데 정말 천사와 같은 얼굴과 음성으로 그런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고는 가뿐 숨을 몰아 쉬면서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목사님 식사 꼭 하고 가세요!”저는 그 소리가제게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고통과 죽음을 바로 코 앞에 두고 계시면서, 자신의 몸 하나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시는 형편에서, “남편 장로님이 사실 테니 병원 카페테리아에서식사 꼭 하고 가세요!”라는 말을 할 수 있는 그 인간미와 여유는 어떻게 해서 오는 것일까요?죽음의 공포와 모르핀을 맞지 않으면 견디기 힘든 고통이 짓누르는 그 상황에서 어떻게 그런 생각과 인심을 표현할 수 있을까요?권사님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신앙을 누렸고, 또 앞으로도 영원토록 누릴 것이라는 확신이있기에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의죽으심과 부활 사건은 모든 믿는 자들을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시키고, 새롭고 영원한 생명을 소망하게 하며,부활의 완전한 몸을 예수님처럼 입게 될 것이라는 기대와 확신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4/19/2017 11:15:00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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