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나눔
요한복음 ⑬ : 그리스도와 연합 Ⅱ(요15:4-8, 2017년4월2일)

요한복음⑬ : 그리스도와 연합 Ⅱ(15:4-8, 201742)

    저번 주설교를 요약합니다. 그리스도와 신자가 연합하는 것은 접붙임이라고 했습니다. 연합은 농부이신 하나님께서 참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의 줄기에 선택하여 꺾어온 가지를 접붙이신 사건입니다. 이 접붙임이 필요한 이유는, 인류는 두 줄기 중 하나에 반드시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하나는 첫 사람 아담의 줄기, 즉 자연인의 줄기이며, 또 하나는 마지막 아담, 즉 그리스도의 줄기입니다. 모든인류는 첫 사람 아담의 줄기에 붙은 채 태어납니다. 그래서 자연인 상태로는 멸망의 상태입니다.그런데 그 자연인의 줄기에서 택하심을 받고 잘려 나옵니다. 그런 다음 새롭고 완전한줄기이신 그리스도께 그 가지가 접붙임을 당합니다. 그러면 이제 새생명을 얻고 영원한 그리스도의 수액을 공급받고멸망에 이르지 않습니다. 이것이 저번 시간까지의 정리입니다.

    저번 시간의내용이 연합의 구속사적 의의였다면, 오늘은 연합의 실제적 의의를 살펴보겠습니다. 특히 연합과 믿음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서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의4, 5, 6, 7절에서 계속 반복되는 문구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가르침을주실 때, 즐겨 사용하시는 교육학적 기술 중에 하나가 반복입니다. 어떤 것을 반복한다는 것은 그것이 핵심 키워드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어떤 말이 본문에서 반복되고 있는지 봅시다.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5: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나를 떠나서는, 6: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7: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계속 반복되는 2개의 문구가 있습니다. “내 안에 거하면이라는 것과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입니다.마치 두 가지의 조건 중 취사선택할 수 있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처럼 보여집니다. 그래서 실제로 이 구절들은 조건문 형태로 쓰여졌습니다. 영어 성경에 보면, “If a man remains in me…”(5). “If anyone does not remain in me…”(6). “If you remain in me…”(7).

    예수님께서제자들에게 참포도나무 비유를 말씀하실 때, 반복적으로 이 조건문을 사용하시는 저의가 뭔지 밝히는 것이 중요합니다.말하자면 예수님은 이 조건문을 사용하실 때 어떤 뉘앙스로 말씀하신 것일까요? ①엄포와위협, or ②격려와 확신. 답은 2, “격려와 확신입니다. George R. Beasley-Murray(조지 비슬리-머리)라는 신학자는 이 조건문 구절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그리스도)가 너희와 결합하여 있음을 확신하라연합에 대해확신하라! 는 명령을 하고 있다는 해석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참포도나무비유를 하시는 목적은 신자에게 연합에 대한 확신과 격려를 하시기 위함이라고 설명합니다.

    확신은 실제사실에 근거합니다. 실제하지 않는 확신이란 망상입니다. 내 손에 집열쇠가 실제로 있어야, 잠긴 문을 열고 내 집에 들어갈 수 있다는 확신이 생기는 것입니다. 손 안에 키가 존재하지도 않는데, 나는 저 집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근거 없는확신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신자에게 주는 확신은 믿음이라는 형태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그 믿음이 굳건하고 흔들림 없이 확신하도록 뿌리를 내리는 근거가 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가내 속에 계시다는 실제의 사실이, 저 천국문에 들어갈 수 있다는 확신으로 나타납니다. 기독교 신앙의 믿음은 근거 없는 확신이 아닙니다. 실제가 존재하는 확신입니다.그래서 히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라고 했습니다. 그 실제는 그리스도의 영이시며 또한 그리스도 자신이신 하나님께서 신자 가운데들어오심으로 말미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유언, 28:20,“…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에서 어떤 방식으로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신다는 것일까요?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이 신자 안에서 내주하는 방식으로 함께 하십니다.이 그리스도의 영은 신자 안에서 그리스도와 온전한 연합을 이끄시고, 그리스도로 붙들림을받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베드로에게 내가 천국의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16:19)라고 말씀 하십니다.여기에서 천국의 열쇠를 베드로에게 준다고말씀하십니다. 이 천국의 열쇠는 곧, 사도로서 하는 복음 전파와 가르침의사역을 통칭하는 말입니다. 베드로의 손에 천국의 열쇠라는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가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만약 자신에게 하나님의 말씀이신 천국의 열쇠가있는지도 없는지도 확신하지 못한다면, 베드로가 예루살렘 교회를 과연 목회할 수 있었을까요? 없지요. “천국의 열쇠 수여에 대한 약속을 예수님으로부터들었던 베드로는 나중에 참포도나무 비유의 설교 또한 예수님으로부터 듣게 됩니다. 이 두 가지,“천국의 열쇠 수여 약속참포도나무 비유설교와는 서로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까요? 확신과 격려입니다.베드로는 믿음에 있어서 승승장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한번 그리스도를 배반합니다.믿음의 실패를 맛봅니다. 믿음의 실패자들이 갖는 공통점은, “아 내 안에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구나!”라는 생각입니다. 이런 실패의 쓰라림을 맛본 베드로가 예루살렘 교회를 이후에 목회 할 때, 항상 그의 실패했던기억이 그를 괴롭혔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에게 말씀을 책임지는 사도의 직에 대한 흔들림이 생겼을 수도있습니다. 이때 그에게 확신과 격려가 되는 말씀이 어떤 것이었을까요? 나는 개인적으로 베드로가 마16장에서 들었던 소위 천국의열쇠 수여약속 이후, 공생애 마지막 시기에 설교하셨던,15장의 참 포도나무 비유설교가 그에게 큰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의 음성을 떠올렸을 것입니다.“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이미 든든하게결합되어진 사실로 인하여 그는 격려와 확신을 얻었을 것입니다. 자신이 아무리 연약하고 실패한 기억이 있다할지라도, 자신의 믿음과 사도직을 견고하게 하는 유일한 근거는 그리스도께서 붙들고 계신다는 사실이었을 것입니다.

    연합은 믿음을낳고, 그 믿음은 신자를 담대하고 확신 있게 합니다. 이를 보여주는구절이 바로 엡3:12인데요.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 이 말씀에는 그리스도와 신자와의 연합이 어떤 형태로나타나며, 그 결과가 무엇인지 3단계로 설명합니다. 첫째, “우리가 그 안에서라고 했습니다.‘연합을 말합니다. 연합이 가장 기본 전제입니다.그리고 둘째, “그를 믿음으로라고 했습니다.연합은 곧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형태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리고 셋째,“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라고 했습니다. 연합은 믿음이라는 형태로 나타나고, 그 믿음은 담대함과 확신의 형태로 나타납니다.

    믿음이 있다는말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두텁다는 말입니다. 또한 동시에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굳건하다면 흔들림 없는 믿음으로나타나야 합니다. “신자가 믿음이 좋다라는 말의 뜻이 뭘까요?앞서 말씀 드린 바 대로, 믿음은 그리스도와의 연합 안에 일어나는 담대함과 확신(3:12)입니다. 믿음은 반드시 담대함으로 나타나기마련입니다. 마가복음 12장에 보면 믿음이 담대함의 모습으로 나타나는예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헌금함 근처에 앉아 계십니다. 그리고 사람들이어떻게 돈 넣는가를 보십니다. 부자들은 와서 돈을 많이 넣습니다. 그런데한 가난한 과부는 렙돈 두 개를 넣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그 과부를 칭찬하십니다.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12:43).그러고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12:44).이 과부의 헌금이 칭찬받은 이유는 어떤 수치적인 비교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자들은자신의 몇 퍼센트를 헌금했고, 과부는 100퍼센트를 했기에 대단한 믿음이다라는식의 수치화된 비교를 통해 믿음을 판가름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고 하는 것은 담대함입니다.

생활비 전부라는 말에서 느껴지는 것이 뭡니까?“삶의 위협이죠. 그 생활비를 헌금함에 넣고나면, 곧바로 나타나는 것은 지금 보다 더 훨씬 현실 생활의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부자들은 돈을 많이 내도, 자신이 가진 것으로 호의호식 하기 때문에 전혀 어려움이 없습니다.그러므로 이 가난한 과부와 부자들의 믿음이라는 관점에서 차이는 뭘까요? “담대함입니다. 부자들에게는 돈을 많이 내면서도 담대함이 필요 없습니다. 삶이 더 힘겨워질 것이라는 위협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난한 과부는 자신의 전부를 내고나면, 당장 생활고로 인해 겪게 될 어려움이 뭔지 뻔히 아는 상황입니다. 그때 그에게 필요한 것은 담대함입니다.그런데 그 담대함이 도대체 어디로부터 나올까요? “사랑의 진실함이죠. 하나님을 사랑하는 진실함이 있기 때문에, 그냥아낌없이 드리고 싶은 것이죠. 과부가 무슨 100배로 갚아주실 하나님을기대하고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현재 자신 가운데 존재하는 하나님을 향한 불붙는 사랑이 자신의 것을다 드려서라도 표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담대함이었습니다. 내가 이 사랑을 표현하고 나면,그 다음에 굶어 죽을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현재 내 가슴속에 요동치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이렇게라도 표현하고싶었던 것입니다. “사랑의 진실함은 담대함을 불러일으키고,자신의 어려운 환경이 전혀 두려운 장벽으로 느껴지지 않게 되는 것이지요.

    사도 바울이고린도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정확하게 이에 대해서 기록합니다. 마게도냐교회의 믿음을 칭찬하면서 고린도교회에그 사실을 소개합니다.“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고후8:2). 마게도냐교회가 극심한 가난중에서도, 선교의 헌금을 넘치도록 할 수 있었던 것은 믿음의 담대함 아닙니까? 이 헌금을 하고 나면 지금보다 더 극심한 가난에 빠져서 굶어 죽을 수도 있다는 삶의 위협에 굴하지 않고, 담대함을 발휘하게 된 것 아닙니까그래서 바울은 이 마게도냐교회의 담대함을 고린도교회도 좀 본받고 그렇게 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러면서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내가 명령으로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다른 이들의간절함을 가지고 너희의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하고자 함이로라”(고후8:8).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하고자 함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사랑한다 하고, 내 이웃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그 진실함을 어떻게 증명하겠느냐? 그것은 내가 궁지 몰리고 삶의 위협 속에 스스로 빠진다 해도,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현실과 타협하지않고 담대해지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싶은 것입니다. 결국 마게도냐교회 교인들은 믿음이 있었고,그 믿음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두터웠기에 가능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자가그리스도와 연합이 끈끈하고 굳건하다면 반드시 믿음의 담대함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렇다면신자는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나는 과연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인가?” 신자의 불안이 뭡니까? 나 같은 사람이 과연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 갈 수 있는가?입니다. 설교 초두에 말씀 드린, 조건문 내 안에 거하면또는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이라는 단서조항이 계속 맘에 걸립니다. 왜요? 마치 연합의주체가 신자 자신인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머무를 수 있는가? 아니면 그리스도 밖에서 살아갈 것인가? 네가 선택하라!”라는 말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다시 George R.Beasley-Murray의 해석을 인용합니다. “(그리스도)가 너희와 결합하여 있음을 확신하라신자가연합을 확신할 수 있는 근거는 신자에게 있지 않습니다. 오직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연합의 주체는 신자가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께서 주체가 되십니다. 본문 4-7절까지 계속 반복하는 문구, “내 안에 거하면내 안에 거하지 않으면이라는 것은 연합을 이루기위해서 너희가 어떻게 해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연합이 든든하니걱정하지 말라. 만약 그리스도께서 이 연합을 이루지 않았다면 너희들은 불에 던져지는 가지(6)에 불과하다라는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이런 것입니다. 아빠가 아이를 업고 폭풍이 부는 언덕길을 걸어갑니다. 그러면서 아빠는 등에 업힌 아이에게 말합니다. “내 등에 꼭 붙어 있어. 나도 너를 붙들테니, 그렇지 않으면 폭풍이 너를 날려버릴 거야!” 이 아빠의 말의 저의가 뭘까요? “살려면 나를 꼭 붙잡아라라는 말일까요? 아니지요. 오히려아빠가 너를 꼭 붙들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라. 아빠가너를 놓지만 않으면 절대 폭풍에 날려갈 일은 없단다.”이 말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아빠의 등에 업힌 아이의 모습은 정확하게 그리스도와 신자와의 연합을 보여주는 그림입니다. 아이가아무리 아빠의 등에 업히려고 애를 써도, 아빠가 쪼그려 앉아 허리를 숙여주지 않으면 절대로 업힐 수 없습니다.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선택하셔서, 아담의 줄기에서 떼어내어 참포도나무,즉 그리스도 자신의 줄기에 접붙여 주시지 않으면 우리 스스로 그리스도와 절대 연합하지 못합니다. 또한 아빠의 등에 업힌 아이가 아무리 손에 힘이 약하고, 아빠의 목을 끌어안고 있을 힘이 더이상 없다 하더라도, 아빠만 놓지 않으면 그 등에서 절대로 아이는 떨어지지 않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줄기에 한번 접붙임을 받은 가지는, 아무리 허약하고 보잘것 없더라도 그리스도의 강한줄기의 힘이 절대 놓지 않기에 절대 땅바닥에 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연합은 그리스도께서 앞장서시는일입니다. 연합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붙들고 계시는 사건이며, 우리는그에게 붙들린 바 되어 절대 놓여지지 않는 영원한 참 포도나무의 줄기에 접붙인 바 된 사건입니다.

   신자가 자신의믿음의 상태를 보고 힘들어 합니다. 그 힘들어 하는 근본 이유는, 그리스도와의연합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신자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기 위해서 애를 쓰고,노력을 하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열심히 합니다. 애를 씁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지칩니다. 왜요?내 속에 여전히 존재하는 죄의 법을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운데 여전히 흔적으로존재하는 옛 자아는 끊임없이 괴롭힙니다. 그런데 그것을 해결 하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죄책감만이 남습니다. 7:23, “내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자는 것을 보는도다사도 바울의 고백이 남일이 아닙니다. 바로 오늘날 저와 여러분 모든 신자들의 모습이며,힘겨워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리도 힘겨워하고 자신의 믿음 없음을 한탄하는 매일매일의 나 자신이 결국 바라 볼 곳은 그리스도 예수 한 분 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4/9/2017 5:29:00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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