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⑪ : 중생, 거듭남의 신비3(요3:1-8, 2017년3월12일)
지난 두 번의 설교를 요약하겠습니다. 거듭남은 첫째, 성령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임의적인 사역입니다.그래서 사람이 거듭남을 위해서 어떤 공로도 세울 수 없습니다. 또한 그 거듭남의시작과 끝을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본문 8절 말씀처럼,“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둘째, 거듭남은 전인에 일어나는 혁신 사건입니다. 이것은 신자의 전인이 완벽해 진다는 뜻은 아닙니다. 여전히 신자가 된 이후에도 거듭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죄의 비참함을 보게 됩니다.이것은 칼빈의 표현에 따르면, “죄의 법은 제거되었지만, 죄의 흔적은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이 거듭남의 사건이 전인에 일어난 혁신 사건이라면, 중생한 참 신자에게 반드시 나타나야 할 변화가 어떤 것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 5절에서 말씀하길,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이 말씀에 의하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로마 카톨릭은 오랜 세월 동안 이 구절의 “물”을 물세례라고 해석하며 적용해왔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세례 받는 것이 곧 중생을 일으키는 중요한 과정이라고 봤습니다. 결국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세례 받으면 곧 구원 받는 것과 동일한 의미가 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의 가르침이아닙니다.
성경에는 세례를 받았지만 거듭나지 못한 사람의 예가 나오기때문입니다. 사도행전 8장에 보면 사마리아 성에 시몬이라는 마술쟁이가 세례를 받습니다. 그는 빌립 집사를 따라다니면서 표적과 큰 능력들을 보고 놀랍니다. 그러다가 예루살렘에서 본격적인 사마리아 복음 사역을 위해서 베드로와 요한 사도가 파송받아 옵니다. 이 두 사도가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안수하는데, 그 자리에서 성령이 내립니다. 이것을 본 시몬이 사도들에게 돈을 주면서, 그런 권능을 자기에게도 좀 달라고 청합니다. 이때 베드로가 야단을 칩니다.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네 은(돈)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행8:20).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 바 되었도다”(행8:23). 많은 학자들은 이 대목을 두고 마술쟁이 시몬은 세례를 받았지만, 거듭나지 못했다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세례는 거듭남을 일으키는 1차 원인이 될 수 없습니다. 만약 물로 세례를 받는 것이 사람을 거듭나게 하는 원인이 된다고하면, 세례가 없던 시절의 사람들은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그리고 믿음은 있지만 미처 세례를 받기 전에 죽게 되면 그들은 어떻게 구원을 받습니까? 또한 세례가 거듭남의 필수 과정이라면, 왜 예수님은 단 한 명에게도 물세례를 베풀지 않았을까요? 또한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서“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너희 중 아무에게도 내가 세례를 베풀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노니”(고전1:14)라고 말씀한 것 처럼, 세례가 거듭나게 하는필수 요건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세례는 거듭남의 보증수표가 아닙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는 세례는 단지 은혜 언약의 표요 인치심이라고 정의합니다. 세례 자체가 거듭남을 일으키는 원인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본문 5절에서“물과 성령으로”라고 할 때, ‘물’은 뭘 의미하는 것일까요? 가장 많이 지지 받는 해석은, 물 자체가 성령의 활동과 사역을 말씀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곧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라는 표현은 “성령으로 거듭난다”라는 표현으로 압축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더 핑크 같은 학자는 여기에서 “물”은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한다고 말합니다. 개인적으로나는 물이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하는 것이든, 아니면 물이 성령의 활동을 상징하는 것이든 비슷한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딤후 3:16)라는 말씀을 보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님의 활동으로 된 것이기에, 성령님의 사역의 영역 안에는 좁게는 하나님의 말씀의 운동력도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거듭남이 성령님께서 전인의 혁신적인 사건이라면, 참 신자에게는 실제적인 혁신, 즉 전인을 새롭게 하시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딛3:5, “우리를 구원하시되…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라는 말씀에서 그것을 증명해 줍니다. 몇 주전 설교를 통하여 칼빈의 5대 교리 중 맨 처음에 있는, “전적 부패”에 대해서 기억하실 겁니다. 그때 설교를 통하여 자연인 상태의 사람에게는 최소한 여섯 가지 영역의 부패가 있다고 말씀 드린 바 있습니다. 이해의 부패, 의지의 부패, 감정의 부패, 양심의 부패, 기억의 부패, 몸의 부패. 이중에 이해의 부패, 의지의 부패 두 가지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설교한 바가 있습니다. 성령께서 거듭나게 하실 때, 이 전적 부패의 여섯 가지 영역들이 새롭게 고쳐지게 됩니다. 오늘은 이 중에 “이해의 부패”가 성령님의 거듭나게 하심으로“이해의 새롭게 하심”으로 바뀌는 것에 대해서 말씀드립니다.
1. 거듭난 참 신자는 이해가 새롭게 됩니다. ‘이해’는 ‘총명’ 또는 ‘지각’이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이해력이 전적으로 부패한 자연인의 상태가 도무지 하지 못하는 영역이 있다면, ‘빛’에 대한 이해라고 말씀 드린 바 있습니다. 요 1:5,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여기서 빛은 그리스도를가리키고, 어두움은 자연인 상태의 모든 사람을 말합니다. 거듭나지 않은 자연인의 상태에서는 그리스도를 도무지 스스로 발견하지도 깨닫지도 못합니다. 롬 3:10-11,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 깨닫는 자도 없고”라고 말씀합니다. 빛이신 그리스도를 알래야 알 수 없는 인지 불능상태, 마치 두더지가 시력이 없어서 땅만 파고 어두움 속에서 어두운 줄 조차 모르고, 계속 그 어두움 속에서 사는 것 처럼, 죄 가운데 빠진 인생은 자신의 영적 시력이 완전한 어두움 속에 있음에도 그것 조차 깨달을 인지 능력 조차 없는 상태입니다.
①죄에 대한 지식이 크게 깨달아집니다. 롬 7:21,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 이로다” 이게 누구의 고백일까요? 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사도 바울이 거듭나고 난 이후에 깨달은 것은, “선을 행하기 원하지만 자신에게 여전히 악이 함께 있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거듭났고 사도직을 수행하고 있는 바울 조차도 자신의 죄악됨과 비참함을 매일매일 보고 있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거듭난 참 신자는 매일 매일 자신의 비참함을 봅니다. 사도 바울은 거듭난 후에 자신을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1:15)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괴수였다”라고 과거형으로 쓰지 않습니다. 헬라어 성경원어에 보면, “프로토스 에이미 에고”(πρῶτόςεἰμι ἐγώ), 현재형으로 쓰고 있습니다.영어성경 특히, KJV에서는 이것을 “I am chief”라고 썼습니다. “I was chief”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현재 자신의 상태가 “괴수”인 상태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자신이 거듭나고 난 이후, 사도의 직을 수행하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현재의 상태가 마치 “죄인 중에 우두머리”로 자신을 인식하고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은 신약시대 거듭난 신자 중 예수님의 성품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사람입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11:1)이 그것을 증명해 줍니다. 어떤 신자가 감히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으니, 너희는 나를 좀 본 받기 바란다”라고 말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렇게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는 분명히 그리스도의 거룩한 성품과 신앙의 삶을 거의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살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그가 “프로토스 에이미 에고” 나는 괴수다라고 자신을 현재형으로 고백하고 있다면, 그것은 그가 거듭난 이후에 계속적으로 자신의 비참함을 보고 있다는 강력한 증거입니다.
오늘날 개신교회의 신자들의 문제가 뭘까요? 죄책감에 많이 빠져 있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너무 죄책감이 없다는데 그 심각성이 큽니다. 자신의 비참함을 전혀 보지 않습니다. 자신의 죄악 됨에 너무너무 무딥니다. 이게 훨씬 큰 문제입니다. 오늘날 미국이나 한국의 교회들을 보세요. 영성 훈련이라는 이름으로 갖가지 프로그램들이 있습니다. 영성 집회, 영성 세미나, 영성 수련회 등의 이름으로 모여서, “죄책감에서 탈피하라. 죄책감을 버려라!”고 가르칩니다. 마치 죄책감을 버리기만 하면, 복음의 진수를 맛보고,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 수 있는 것처럼 떠듭니다. 그러면서 롬 8:1-2을 근거로 삼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신자가 죄로부터 이제 완전히 해방되었는데, 왜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느냐? 라고 합니다.
성경을 보세요. 성경은 “죄책감을 버려라, 죄책감에서 벗어나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죄를 버려라. 악을 끊어라. 악에서 벗어나라!”고 명령합니다. 죄책감의 문제는 해방된 복음을 누리지 못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죄가 있으면 자연스럽게 죄책감은 생기는 것입니다. 마치 죄책감을 버리면, 마음이 평안해지겠지요. 그러나 그것은 위장된 평안이며, 거짓 평안입니다.성경에서는 우리에게 죄책감을 버리는 것을 통해서 성령의 위로가 더해질 것이라고 전혀 가르치지 않습니다.
거듭난 사람은 자신의 죄에 대해서 굉장히 민감한 사람입니다. 청교도 신학자 존 오웬은 말합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점점 죄에 대해서 둔감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에 대해서 가면 갈수록 민감해진다.” 옳은 말입니다. 거듭난 참 신자는 성령님의 활동으로, 자신의 죄의 비참함을 더 적나라하게 깨닫게 됩니다. 지극히 정상적인 과정입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사람에게 자신의 비참을 보고, 고통 가운데 거하게 하시는 것은 거듭나게 하시는 과정에서 반드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그 예들이 조나단 에드워즈의 [부흥론]이라는 책에 가득 기록되어 있습니다. 18세기 노스햄턴이라는 조그만 마을에서 불기 시작한 성령님의 부흥의 바람은,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을 터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 거의 모두가 회심하게 되는 역사적 기록이 이 책에서 상세하게 나옵니다. 그 마을에 부흥의 바람이 불고 나서, 그들의 행동은 이전과 완전히 달랐습니다. 더 이상 술집에 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술집이 다 문을 닫습니다. 한때 술집에 북적거리던 사람들이 이제는 교회 목사관에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 들었다고 기록합니다. 젊은이들 밤을 지새우면서 놀고 희희낙락 거리는 모임이 사라집니다. 그리고 모이면 말씀을 상고하고, 신앙의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도 지속적으로 자신의 죄의 비참함에 대해서 깊이 숙고합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표현한 거듭남의 사건 이후의 사람들의 상태를 제가 표현하기에 너무 한계가 있어서, 그의 글을 그대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이불쾌하게 여기신다는 생각과 자기들이 처해 있는 저주의 위험을 아주 많이 깨달아서 밤에도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그런 형편에 잠을 잔다는 것이 그들에게는 너무 두렵게 여겨졌습니다. 그리고 잠든 중에도 공포에서 도무지 헤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기들 영에 여전히 머물러 있는 두려움, 부담감 그리고 고통 때문에 잠에서 깼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있는 깊이 박힌 염려가 육체에까지도 고통스러운 영향을 주는 일이 흔했습니다. 대부분 자신들이 구원에 가까워질수록 스스로가 얼마나 비참한지를더 깨닫고 두려워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마음이 은혜롭게 역사하고 은혜로운체험에 계속 잠겨 있으면서도 자신이 회심되었다고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그 반대라고 생각했습니다…회심 후에 사람들이 자신들의 상태를 두려워하고 의심하는 가장 큰 원인은 자기들 마음에 부패가 너무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부흥론].
거듭난 신자라도 지속적으로 자신 가운데 일어났던 두려움은,“나는 어쩌면 회심하지 않은 사람일지도 모른다”라는 생각이었습니다.그 이유는 여전히 자신 가운데 남아 있는 마음의 부패성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면 왜 이들이 이토록 거듭난 이후에도 힘들어 했을까요?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요1서 3:9)라고 성경이 말씀하기 때문입니다.거듭난 사람, 즉 하나님께로부터 난 사람은 죄를 짓지 않습니다. 이 말씀이 의미하는 것은, 전혀 죄를 짓지 않는 완벽한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참 신자도 죄의 법은 제거되었지만, 여전히 죄의 흔적이 남아 있기에 여전히 죄를 짓기 마련입니다. 그러면 이 구절의 뜻은 뭘까요?
안토니 후크마는 이렇게 해석합니다. “방자하게 계속적으로죄를 행함으로, 죄를 즐기지 말라” 즉, “중생한 사람은 즐거운 마음으로 계속적으로 죄를 지을수 없다.” 요약하면 그는 두 가지를 지적합니다. ①즐거운 마음으로 ②지속적으로. 중생한 참 신자라면, 죄를 즐기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또한 거듭난 참 신자는 절대로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청교도 신학자들도거의 비슷하게 해석합니다. 에스겔 홉킨스(Ezekiel Hopkins)는 “마귀의 자식이 그러는 것처럼 악의적인 방법으로 죄를 짓지 않는다는 뜻이다. 곧 죄와 거래하지 않고, 지속적인 죄의 습관을 허용하는 삶을 살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개혁 신학가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참으로 거듭난 신자는 ①즐거운마음으로, ②지속적으로, ③악의적인 방법으로, 죄를 짓지 않는다”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신자이면서도 이 세 가지의 특징을 가지고, 죄 가운데 빠져 있다면 여러분은 정말 하나님 앞에 진정으로 회개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매일 매일 또는 죄를 만끽하고 있거나, 악의적인 방법으로 지속적으로 죄악에 빠져 있다면 여러분은 빨리 그것으로부터 돌이켜야 합니다.
이제 이런 우리의 연약함과 비참함을 매일 보게 될 때, 성령하나님은 그냥 그렇게 내버려 두시지 않고, 한 단계 더 지식이 새로워지는 단계로 나아가게 하십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에 대한 것입니다.
②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하는 지식이 새롭게 됩니다.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4). 그리스도를 지식적으로 아는 것에 머무는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알기는 알지만 가슴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가슴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능력과 은혜를 맛보지 못한 사람들이기에, 그리스도께 자신을 맡기지 않습니다. 지식적으로 그리스도에 대해서 아무리 좋은 생각, 좋은 느낌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결국 자신을 전적으로 그리스도께 의탁하지 않습니다.
이에 대해 17, 18세기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위대한 신학자 토머스 보스턴(Thomas Boston, 1676-1732)은 [인간 본성의 4중 상태]라는 책에서 멋진 예를 듭니다. 길을 가다가 어떤 낯선 사람을 만납니다. 서로 얘기를 나누다 보니, 상대방이 굉장히 예의 바르고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그에 대해서 호감을 갖게 되고, 좋은 느낌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그 낯선 사람에게 아무리 좋은 호감을 갖게 되었다고 해도, 그에게 자신의 재산을 맡길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에게 지식적으로 아무리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더라도, 여전히 그는 낯선 사람이고 그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그리스도에 대해서 좋은 생각을 가질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결코 자신을 그분에게 맡기 않을 것이다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만약 여러분이 성령께서 전인격적으로 혁신을 일으키시고, 여러분을 거듭나게 하신 것이 사실이라면, 여러분은 그리스도께 호감을 가지고 좋게 생각하는 정도의 지식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을 실제로 그리스도께 맡기기를 갈망할 것입니다. 그것이 성령님께서 전인을 새롭게 하실 때, 함께 주시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마음 밭을 혁신시키면서, 그리스도를 그저 지식적인 분으로 알게 하지않으실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받아들이게 하십니다. 또한 그분이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분이라는 것을 깊이 그리고 진심으로 받아들이게 합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의 의가 아니면 나는 멸망할 수 밖에 없으며, 여전히 나의 죄의 비참함으로 영원한 형벌에 이르게 된다는 사실을 직시하게 됩니다. 거듭난 사람은 자신의 죄의 비참함을 보면서도, 또한 동시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가 아니면 안 된다는 “절망 속에서 소망”을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