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나눔
요한복음 ⑩ : 중생, 거듭남의 신비2(요3:1-8, 2017년3월12일)

요한복음 ⑩ : 중생, 거듭남의 신비2(3:1-8, 2017312)

   지난 주 설교를 통해 전했던 중생에 대해서 잠시 요약하겠습니다중생은 성령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바람에 비유했습니다. "바람이 어디서 불며, 오디로 가는지 모르는 것처럼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다"는 본문 8절 말씀이 이를 뒷받침합니다. 중생은 그래서 신비합니다중생한 신자 자신도 언제 어떻게 거듭나게 되었는지 모르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것이 성령님의 임의적이고 주권적인 사역입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일어난 거듭남의 시간이나 장소를 모른다고 해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미국 시민권 받은 날짜를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서, 시민권이 취소되거나 의심받을 근거가 되지 못합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의 거듭난 시간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거듭남은 외형적인 사건이라기보다는 내면적인 혁신의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거듭남은 전인에 일어나는 혁신 사건입니다.

    성경에는 이 전인이 혁신되어 거듭남의 예가 많이 있습니다그 중에 누가복음 23장의 예를 들까 합니다. 누가복음 23장에는 예수님과 그 십자가 좌우편의 강도와의 대화가 나옵니다. 먼저 강도A가 조롱하듯이 예수님께 말합니다. “너는 그리스도가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여라”(23:39, 새번역). 이때 강도B가 예수님을 변론하면서 강도A에게 말합니다. “똑 같은 처형을 받고 있는 주제에, 너는 하나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우리야 우리가 저지른 일 때문에 그에 마땅한 벌을 받고 있으니 당연하지만, 이분은 아무것도 잘못한 일이 없다.”(23:40-41, 새번역). 그런 후 강도 B는 예수님께 이야기합니다. “예수님, 주님이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에나를 기억해 주십시오.”(23:42, 새번역). 그러자 예수님이 대답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낙원에 있으리라.”(23:43).

    성경이 이 중요한 십자가상의 사건에 예수님과 강도와의 대화를 기록해 놓은 이유가 뭘까요? 첫째, 흉악한 죄인 강도라 할지라도그가 구원받을 자격이 전혀 없고, 구원받을 만한 공로가 없지만,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자 하는 것입니다. 둘째, 강도는 그가 죽기 전에 이미 거듭난 인생임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이 강도는 죄인이지만, 이를 구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아무 죄도 없지만 십자가에 죄인을 위해서 못박히신다는 것을 대조적으로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한편 강도가 거듭났다는 것은 확실해졌습니다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낙원에 함께 있을 것을 선포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문제를 하나 내겠습니다. 예수님의 한편 강도는 언제 거듭났을까요? ①다른 한편 강도가 예수님을 비방할 때, 오히려 야단치며 예수님을 변호했을 때, 아니면 ②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말했을 때, 아니면 ③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시는 순간, 아니면 ④십자가에 달리기 이전에 이미. 정답은 알 수없다입니다. 성경이 그것에 대해서 침묵합니다.

    그러나 저는 거듭남의 본질적인 의미와 관련해서 개인적으로 짐작해 봅니다. 적어도 그 강도는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라는 말을 하기 전에 이미 거듭난 상태였을 것이라는 짐작입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거듭남은 행위에 근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뭔가 영적으로 고상하고 품격 있게 행동하는 것을 통해서 거듭남이 수여되거나 보장되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의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신 선언은 그 강도가 나를 기억하소서라는 말이나다른 한편 강도를 꾸짖으면서 예수님을 옹호했던 것에 근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가 그렇게 말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거듭났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과 행동이라고 보여집니다. 둘째그 강도가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라는 말에서 드러납니다. 강도는 하나님의 나라, 천국에 대한 실체를 믿고 있었고, 열망했다고 보여집니다. 이것은 거듭난 사람의 일반적인 증표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3절에,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이 말은 사람이 거듭나고 나서야, 하나님 나라를 보게 된다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없느니라고 말씀하지 않고, “볼 수 없느니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래서 영어 성경에서 다 see라는동사로 번역했습니다

    이 단어는ὁράω(호라오)라는 헬라어 단어입니다. 이것은 알고 지각하는 것을 통해 어떤 것을보는 것을 말합니다. 말하자면 어떤 물체를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어떤 것에 대한 통찰력을 가지고 보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아내가 남편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나의 어떤 면이 좋아서 나와 결혼했어요?”라고 물을 때, 남편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는 당신의 내면의 아름다움을 보고결혼했어요.” 여기에서 내면의 아름다움을 보고라고 했습니다내면의 아름다움이 눈에 보이는 물체가 아닙니다. 이것은 어떤 것을 경험적으로 통찰력을 가지고 받아들이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요. “호라오라는 단어가 마치 그와 같은 것입니다. 인격적으로 통찰력을 가지고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없느니라라고 할 때, “하나님 나라를 본다는 말은 거듭난 사람이 영적 통찰력과 인격적 지식을 가지고 보는 것을 말합니다.

    거듭난 사람이 이미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다는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신자가 아직 하나님 나라에 완전히 들어가지 않았더라도 이미 들어가 있는 상태인 이유는신자는 거듭나는 순간 이미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지식과 통찰력을 소유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그 강도는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언급한 것은, 이미 그에게 하나님의 나라의 실체에 대한 통찰력이 주어졌다는 증거입니다. 이 통찰력은 거듭난 사람에게만 생기는 것입니다그러므로 최소한 그 강도는 예수님과 그 이야기를 나누기 전에 이미 거듭나 있었다고 봐야 합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사실은 두 가지입니다첫째, 거듭남은 신자의 확신이나 어떤 행위에 근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거듭남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입니다. 만약 거듭남이 어떤 행위에 근거한다면 과연십자가형 언도를 받을 만큼 중죄를 범한 그 강도가 무슨 수로 자신의 공로나 선한 행위로 거듭날 수 있겠습니까? 이 강도는 자신의 흉악한 범죄에도 불구하고, 또한 그것을 덮을 만한 어떤 선한 행위도 할 시간이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로 거듭났고, 구원받았습니다그리고 당연히 그 강도는 자신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거듭나게 되었는지조차 모를 것입니다.

    둘째, 전인에 혁신적인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최고 악한 중범죄인들이 받던 십자가형을 받은 강도가 주님의 나라라는 말을 언급했다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그가 이미 주님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를 인격적인 통찰력을 가지고, “보고”(호라오) 있었다는 확연한 증거이며, 이것은 전인이 새로워지지 않고서는, 그 극한 죽음의순간에 그러한 영적인 말을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강도는 이미 십자가 상에서 예수님과 대화하기 전에 이미 거듭난 상태라고 볼 수 밖에 없고, 또한 그것은 성령 하나님의 전인을 새롭게 하시는 혁신이 일어난 결과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럼 거듭난 신자에게는 어떤 전인격적이 혁신이 일어난다는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첫째, 새로운 영적 생명의 원리가 심겨지는 사건입니다. 2: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라고 했습니다. 신자의 거듭남에 가장 큰 변화는 새로운 영적 생명의 원리가 우리 가운데 주어진것입니다. 안토니 후크마는 이것을 두고, “새로운 영적 생명의 이식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죄인가운데 이식되었고, 그래서 죽었던 영혼이 이식된 생명으로 되살아 난 사건이 중생입니다.

    이 그리스도로부터 이식된 생명을 가진 중생한 참 신자에게어떤 실제적인 변화가 생길까요? 안토니 후크마는 두가지로 이야기 합니다. ①하나님께대한 저항이 없어집니다.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지 않은 자연인의 상태에 머무는 사람의 가장 큰특징이 뭘까요? 8: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거듭나지 않은 자연인은 하나님의 말씀에 끝까지 저항합니다.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도 않고, 혹 듣는다고 해도 흘려 버립니다심지어 말씀을 조목조목 반박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말씀에 굴복하지 않습니다. 말씀에 적극적으로 대항합니다. 지속적으로 하나님 말씀에 대해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거듭난 사람의 가장 큰 특징은,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 한자 한자가 100퍼센트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으로 인식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삶을 말씀 앞에무릎 꿇게 합니다. 그러므로 누군가 말씀 앞에 굴복하지 않고 계속 자신의 생각을 따르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그 사람은 여전히 하나님께 저항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혹 참 신자도 잠시 그럴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지속적이고 계속 깊은 저항감에 빠져 있으면, 거듭난 신자가 아닐 가능성이 있습니다.

    새 생명의 원리가 심어져 거듭난 참 신자는 또한 ②하나님을 미워하던 마음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변합니다.(안토니 후크마). 그 이유는 그리스도 밖에 있던 자연인이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중생한 사람은그리스도 안에 거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미워할 수 없습니다. 항상 하나님을사랑합니다. 1위격이신 성부하나님과 제2위격이신 성자 하나님은 서로 사랑의 관계 속에서 완전한한 분 하나님이 되십니다. 그런 완전한 사랑의 본체이신 그리스도 안에 들어와서 거듭난 신자는 그리스도와 사랑으로 연합되어졌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사랑 또한 신자에게 전가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밖에 없지요.

     그러면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하지 않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1 4: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이 말씀에 의하면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시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고 합니다. 거듭난 신자가 나는 거듭났는가?” 또는 나는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가?”라는 것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자가진단법이 뭘까요14:20말씀처럼, “나는 내 형제를 사랑하고 있는가? 나는 나의 주변 사람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해 보면 답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거듭날 때 나타나는 전인격적인 변화 두 번째성향이 거룩해 집니다. 사실 이 두 번째 변화는 첫 번째 변화, 새로운 영적 생명이 이식되는 것의 결과라고도 할 수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거듭난 신자는 신적이고 초월적이며영적인 빛이 마음에 비취면 마음의 성향에 효과적으로 영향을 주고결국 영혼의 본성이 변하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마음의 성향이 바뀌고 나면 나타나는가장 큰 변화는 세상을 사랑하던 것을 포기하고 천국에 시선을 둔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결국 거룩의 열매를 맺게 한다고 말합니다.

    거듭난 신자의 고민이 뭡니까? 나는 거듭났는데, 여전히 죄 가운데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거듭나서 성향이 거룩해졌다면, 더 이상 죄 가운데 있지 않아야 되는 것 아닙니까그런데 여전히 죄악 된 자신의 모습이 있습니다.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우선 중생 교리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먼저 바로 잡아야 여기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중생은 전인이 혁신적으로 새로워지는 것이지만그렇다고 해서 완전한 사람이 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또한 인간 본성전체가 바뀌어 다른 본성으로 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사람들은 오해합니다. 영적으로 거듭나면, 인간 본성 중, 특히 영혼 기능에 더해지거나 빼지는 것들이 생긴다고 믿는 오해입니다. 예를 들면 거듭나게 되면 감각기능인 감정 부분에 화를 내거나 미워하는 기능이 제거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라든지, 기억 기능에 있어서 기억하기 싫은 과거의 특정 순간이나 사건이 제거된다든지 하는 믿음은 오해입니다. 만약 중생의 결과로 인간의 오성에 완전한 기능이 부여된다면,신자는 이미 예수님처럼 변화되었다는 말이 됩니다.

    중생은 전인이 혁신적으로 새로워지는 것이 맞습니다그러나 그렇다고 우리가 당장 예수님처럼 완전한 성품을 갖게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신자는 거듭나면서 죄의 속박에서부터 즉시 해방됩니다. 그러나 여전히 죄의 간섭과 방해를 받고또한 죄를 짓고 삽니다. 이를 두고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죄의 법이 제거되었으나 그 흔적은 남아 있다.” 그러면 왜 죄의 법이 제거된 중생한 신자 안에 여전히 그 죄의 흔적이 남아 있을까요? 칼빈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것이 그들을 지배하지는 못하지만, 그들로 하여금 자기 자신의 연약함을 의식하게 하여 겸손하게 만든다.”

    중생은 영혼을 지배하는 성향에 근본적인 일대 혁신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것은 거룩한 성품이 지배적인 성향으로 자리 잡았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직 완전하지는 않은 상태입니다. 성향에 일대 혁신이 일어났다는 말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없던 능력이 새로 생겼다거나, 있던 능력이 없어지는 변화를 가리키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성향이 거룩해진다는 말의 실천적 의미는 뭘까요가치체계의 혁신을 말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사도 바울입니다. 그가 사울이던 시절의 가치체계와 거듭나고 난 후의 가치체계는 완전히 다릅니다. 거듭나기 전의사울의 가치는 그리스도를 핍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거듭난 후에는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으로 바뀝니다이것은 바뀐 가치체계는 바울의 내면의 성향에 일대 혁신이 일어난 증거입니다. 성향에 일대 혁신이 일어나면, 그의 가치는 변해도 그가 가지고 있던 능력이나 열정, 실력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전에 사랑하던 가치에 쏟던 자신의 실력을, 거듭나고 난 이후에 생긴 새로운 가치에도 여전히 자신의 실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9:1,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게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라고 했습니다. 사울은 거듭나기 전 그의 성향은 거룩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가지고 있는 자신의 바탕, “실력”, 예를들면 용기, 담대함, 자신의 주관, 추진력, 지식체계 같은 것들이 악한 성향에 의해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데 사용합니다.9:2,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잡아오려 함이라거듭나기 전 바울은 자신의 신념, 가치체계를 지키기위해서 편도150마일도 넘는 거리인, 예루살렘과 다메섹을 오가는 것에힘들어 할 줄 몰랐습니다. 2,000년전 자신이 신봉하는 가치를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 왕복300마일을 넘는 거리를 오간다는 것은, 어지간한 열심이 아니면 흉내조차 내기 힘든일입니다. 그가 가진 바탕체계, 즉 그의 실력은 악한 성향에 의해서 악하게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그가 거듭나고 나서는 그의 성향이 거룩하게 변합니다.그리고 그가 가진 실력은 거룩한 일에 주님의 나라를 위해서 쓰여지게 됩니다. 예를들어 그는 세 번의 전도여행 동안 13,000마일이 넘는 거리를 배와 도보로 다니는 열심을 보입니다.그리고 고린도후서 11장에 기록된 것을 보면, 그가 전도여행을 하면서 겪은 고생은 인간이 겪을 수 있는 모든 극한 상황을 다 경험할 정도로 헌신합니다. 이처럼 거듭나고 나면 성향에 일대 혁신이 일어나서, 자신이 지향하던 옛 습성을 버리고,새로운 습관을 받아 들입니다. 그래서 그 새로운 가치를 위해서 예전의 열심과 능력과실력을 그대로, 또는 그 이상 발휘하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거듭남은 전인의 혁신적인 변화를 말하는 것입니다.그렇다고 해서 사람이 거듭나면 예수님처럼 완전함에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죄의 흔적들이 군데 군데 남아있어서, 여전히 신자를 괴롭히고 갈등하게 합니다. 그러나 신자는 예전처럼 죄의 완전한 지배 속에 있지는 않습니다. 거듭난 신자는 더 이상 죄가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지배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는 거룩한성향이 그에게 심겨져서, 이전의 잘 못된 세상 가치를 더 이상 좇지 않습니다. 이제 새로운 가치인 그리스도를 향하여 시선을 돌리고, 그것을 위해서 자신의 가진 열정과 실력을발휘합니다. 성향이 변한 것입니다. 가치체계에 혁신이 일어난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거듭난 참 신자라면, 여러분은 더 이상 죄의 법 아래 있지 않습니다. 6:14,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중생한 자는 자신을 지배하는 지배권이 변했습니다. 이전에는 죄의 법이 자신을 지배했다면,이제는 은혜가 자신을 지배합니다. 그래서 더 이상 과거의 옛 습성에 오랫동안 빠져있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만약 지속적이고, 악의적인 죄의 습관을 의도적으로기쁨으로 계속 즐기고 있다면 여러분은 심각하게 자기 자신의 믿음에 대해서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성령의 거듭나게 하심은 전인을 포함합니다.지성, 의지, 감정 모두에 일대 변화를 가져옵니다. 그래서 때로 낙망하고 죄 가운데 있을 지는 몰라도, 대부분하나님을 갈망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려는 성향이 훨씬 강합니다. 왜냐하면 거듭난 사람은 성령님의 주도권 아래에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신자이지만 여전히 죄악 가운데 있다면,여러분은 두렵고 떨림으로 성령님께 여러분을 맡기셔야 합니다. 여러분의 의지와 힘으로는죄의 법을 이길 수도 상대할 수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오직 성령님의 주도 아래 여러분의 의지를 내려 놓고그분의 행하심에 순종하며 따라가야 합니다

3/12/2017 6:25:00 PM

There is no comment yet...
의견 등록을 하시려면 로그인 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