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⑨: 중생, 거듭남의 신비1(요3:1-8, 2017년3월 5일)
오늘부터몇 주간에 걸쳐서 중생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의 핵심 주제는,“거듭남”입니다. 이 말은 한자로 “중생”이라고 표현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거듭남은 육신적인 거듭남이 아니라, 영적인 거듭남을 말합니다. 그래서 6절,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중생이 영적인 거듭남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생각하길 눈에 보이지 않는 영혼에서 일어나는 부분적인 약간의 변화 정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중생은 전인의 혁신적인 변화를 말하는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에서 “거듭남”이란 성령님에 의한 변화입니다.. 본문은 이 성령님의 작용을 “바람”에 비유합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8절).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는 성령님의 활동을 바람에 비유한 이유는, 본문이 “임의로 불매”라고 설명하듯이, 거듭남은 하나님의 임의적인 주권 행사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신비로울 수 밖에 없습니다. 마치 바람이 어디에서 시작해서 어디로 불어가는지 알 수 없는 것처럼, 사람이 거듭나는 것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일어나는 지 아무도 예상치 못하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이기 때문에 신비로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언제 어떻게 해서 거듭났는지 모르겠다라고 말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사람의 중생이신비로운 이유는, 중생이 전적으로 수동적이라는 데 있습니다. 아기로태어나는 것이 아기 자신의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닌 것처럼, 영적으로 다시 태어난 것 또한 스스로 선택할 수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영어로 아기가 태어나는 것을 “give birth”라고 합니다. 이때 give라는 동사를 씁니다.“수여하다, 주다”라는 뜻입니다.직역하면, “출생을 수여하다”라는 뜻이 됩니다. 태어나는 것은 그저 수여 받는 것입니다. 아기가 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그래서 take birth라는 말을 쓰지 않습니다. 마치 거듭남도 그와 같은 것입니다. 이것은 한 개인에게 “수동적 사건”이면서 또한 “발생해 버린 사건”이라고 해야 맞는 개념입니다. 이처럼 “발생하는 사건”,즉 영혼의 거듭남의 문제가 한 개인이 취사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 분명하다면, 거듭난 신자는 자신이 거듭난 것에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는 단순한 진리에 이르게 됩니다. 이 사실은 칼빈의 5대 교리 중, “불가항력적 은혜”교리와 일맥상통하는 사실입니다. 요6:44, “…아버지께서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이 말씀은 “아버지 하나님께서이끄시면 반드시 구원 얻는다”라는 사실을 내포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한 개인에게 임할 때, 아무도 그것을 거부할 수 없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한 개인이 아무리 구원을 원하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이끌어 주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그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지금 기독교신자들 중 많은 사람들이 중생의 의미를 잘 못 이해하고 있거나, 거짓 가르침에 빠져 있습니다.그 잘못된 가르침 중 핵심적인 것은, 거듭남에 사람의 노력이나 결정이 관여할 수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이게 알미니안주의에서 왔지요. 사람들은 알미니안주의를신학적으로 배운 적이 없다고 하더라도, 이상하게도 성경을 해석하거나 믿음에 적용할 때, 너무도 쉽게 알미니안주의의 사상을 가지고 합니다. 그만큼 잘못된 사상과 교리는 무서운 것입니다.기독교 신자들 속에는 어느 사이엔가 그런 무서운 사상이 파고들어서, 생각을 지배하고믿음에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예를 들면이런 것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16:31)는 말씀은, “주 예수를 믿는”행위의 주체가 자기 자신이라고 너무도 쉽게 믿어버립니다. 그래서 예를 믿는 선택권이인간 자신에게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하나님의 은혜는 거부당할수 있다.”라는 알미니안주의의 4번째 항목을 결부시킵니다.그러면 어떤 문제가 발생할까요? “예수를 믿을 수도 있고, 믿지 않을 수도 있는 결정권이 나 자신에게 있으므로, 만약 내가 믿기로 결정하면 그것은 하나님의은혜이고, 내가 믿지 않기로 결정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한 것이다”라는 믿음입니다. 만약 이렇게 하면 하나님의 은혜는 시장에 내다 놓은 값싼 물건과 다를 바가없습니다. 필요하면 취하고, 필요 없으면 버릴 수 있는 싸구려 물건과다르지 않는 것이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 편에서 취하거나 요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그저 우리의 공로와 상관없이 주어진 것이지요.
그러나 이런믿음을 가지게 되면 이런 문제가 발생합니다. “부르심은 하나님께 있고, 반응은 인간에게 달려있다.”라는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은결국 다음과 같은 알미니안주의 명제로 귀결됩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아무에게도 믿음의 선물을 보장하지 않았으므로,누구의 구원도 보장하지 않았다.”여기에서 발생하는 가장 큰 문제는 뭘까요?하나님의 은혜가 도박 게임으로 전락할 위험이 발생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수혜자가특정되지 않았기에, 누구든지 수혜자가 될 수도 있고, 또한 아무도 수혜자가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중생은 처음부터수동적 의미입니다. 내가 관여할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부르심은 하나님께 있고, 그 부르심에 반응하는 것은 나의 몫이다”라는 것은 성경적 가르침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어떤 이들은 그렇게 믿고 가르치기 까지 합니다.“일단 예수님을 영접하면, 처음에는 잘 안 믿어져도 차차 믿어지게 된다.”나는 신앙생활 하면서 이런 류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적인 가르침이아닙니다. 사람들은 “영접”이라는단어에서 느끼는 어감이 마치, “사람이 자신이 영접하면 된다.”라고믿어 버립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의 본래 목적이 아닙니다. 요1:12,“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하는 말씀의 “영접”이라는 단어를 그렇게 해석해버립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영접”이라는 단어의 주체는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영접할 수 있는 의지와 결단력마저도 하나님이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두고 마치 인간 자신이 구원을 위해서 뭔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는 것으로 오해하면안됩니다.
거듭남은하나님의 효력있는 부르심으로만 일어나는 특별 은혜의 사역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중생은 하나님의 단독 사역이지, 인간과 협력하는 사역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내가 영접기도를 따라 한 것과 중생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또한 중고등부 시절여름 수련회 집회를 통해서 은혜를 받고, 내가 그리스도를 영접하겠다고 한 사실과 별개의 문제입니다.그것이 왜 별개의 문제인지 설명하겠습니다.
우리는 “효력있는 부르심”과 “은혜의 보편적인 수여”를 구분해야 합니다. 쉬운 말로 다시 설명하면, “내적부르심”과 “외적 부르심”이 있다는것입니다. 우리가 “거듭남”즉,중생을 이해하는데, 왜 “부르심”에 대해서 살펴봐야 할까요? 그 이유는 부르심과 중생이 논리적 순서에 가장 가까이 있기 때문입니다.소위 “구원의 서정”이라고 하는,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논리적 순서가 있습니다.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이 “부르심”입니다. 롬8:30에 보면,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라고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예정한 사람에게 가장 먼저 행하시는 활동은 “부르심”입니다. 그리고 곧 이어서 나오는 것이 “중생”입니다. 그 다음이 “회심, 연합, 칭의, 양자, 성화, 확신, 견인, 영화”의 순서로 이어집니다. 이것은 구원의 논리적인 순서인데요. 이 순서는 시간적 순서가 아니라, 앞에 것이 전제되지 않으면 뒤에 것이 따라 올 수 없다는 순서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회심 사건은 앞에 있는 “중생”이 없으면 절대일어나지 않습니다. 회심을 인간 자신이 회개하고 돌이킬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회심했다면 그 사람은 반드시 거듭난 사람입니다. 만약 그 사람이 거듭나지 않았다면회심이란 없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거듭나지 않는 사람은 구원에 이르는 회개를 절대 할 수 없습니다.그러므로 거듭나야 회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중생의 전제가 뭔가요?“부르심”입니다. 하나님이 불러 주시지 않으면,거듭남이란 없습니다. 누구든지 중생한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의 효력있는 부르심이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중생의 시작은 인간 편에서 시작할수 없는 수동적인 것입니다.
외적인 부르심은말씀이 전해지는 것입니다. 설교라든지, 복음전도라든지 이 모든 것을외적 부르심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만약 누구로부터 전도를 받고 그 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다면,그것은 외적 부르심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이 외적 부르심이 효력있는 부르심,즉 내적 부르심으로 확정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복음 설교를 들었다고해서, 모두가 다 믿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를 두고 고전1:18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또한 본인이 믿겠다고 의지를 가지고 결정을 했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효력있는부르심의 증거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이를 두고 고전 1:21은,“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라고 했습니다. 어떤 복음 전도나 설교를 듣고, 그 자리에서 영접을 하겠다고 결심한 것이 만약 성령님의 강력한인도하심이라면, 그 사람에게는 “효력있는 부르심”즉, 내적 부르심이 일어난 것이고, 곧 그 순간이 거듭남의순간이 됩니다. 그러나 만약 외적인 부르심의 현장에서 자신이 영접기도를 했다고 하더라도, 성령님의 효력있는 부르심의 역사가 없다면 중생한 것이 아닙니다. 거듭나게 하시는 효력있는 부르심은인간의 영접기도에 의해서 좌우 되지 않습니다.
기독교 역사를그것을 보여줍니다. 지난 몇 세기 동안 수많은 영적대부흥들이 있었습니다. 성령님이 역사하셔서, 사람들이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오고, 거듭나는 역사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역사들이 효력있는 부르심의 현장은 아니었습니다.예를 들어서 유명한 부흥설교자가 수천 수만 명을 불러놓고 설교를 한 후, 새로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할 사람들에게 영접 기도를 하게 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역사적으로 영적대각성집회에서 그렇게외적 부르심에 응답했습니다. 그러나 연구에 의하면 그 중에 대부분은 계속적인 신앙생활로 이어지지 않았다고합니다. 정말 그 영접기도를 통해서 효력있는, 내적 부르심으로 이어졌다면,계속 예배하고 신앙생활을 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은,영접 기도 자체가 그 사람을 변화시키거나 거듭나게 하는 원인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저 수많은 거듭남의 도구 중에 하나일 뿐이지요.
그러면 유효한(효력있는) 부르심, 즉 내적 부르심은 어떤 것일까요?성령님의 활동입니다. 외적인 부르심, 즉 하나님의말씀을 전해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것 자체가 거듭남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군중이 예수님의 설교의 현장에 있었지만, 그들이 똑같이 거듭나지는 않았던 것이 그것을증명해 줍니다.
효력있는부르심은 성령님의 주권적인 역사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 역사를 “신적이고 영적인 빛을 하나님이 부여하시는 것”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사람이 중생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직접 신적이고 영적인 빛을 우리 가운데 비추시고,새롭게 하시는 역사가 일어난 결과입니다. 이것이 내적 부르심입니다.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외적 부르심이 사람을 거듭나게 하는 제1차 원인이 아닙니다.제 1차 원인은 오직 성령님의 내적인 활동입니다. 그래서 에드워즈는 그의 책, [신적이며 영적인 빛, A Divine andSupernatural Light]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참으로 사람은말씀 없이는 빛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말씀이 빛을 만드는 원인이라는 주장은 아닙니다.만일 어떤 교리가 먼저 마음 속에서 깨달아지지 않으면 마음은 그 교리의 탁월함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비록 교리나 명제 자체는 말씀으로 전달되지만 그 교리의 탁월함을 보는 것은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말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신적이고 영적인 빛의 내용은 설교를 통해서 지성에 전달될 수 있습니다.이것이 외적 부르심입니다. 그런데 이 신적이고 영적인 빛이 설교를 통해서 전달 될때, 이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은혜로 깨닫게 되는 마음의 감각은 성령님께서 직접 행하시는 것입니다.
지성에 아무리많은 진리의 명제와 성경의 정보를 많이 전달해도, 그것이 그 사람의 지성을 건드릴 수 있을 지는 몰라도,영적으로 거듭나게는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분명한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수많은 설교를 듣고, 수많은 성경공부를 하고, 수많은 예배를 드리면서 지성적으로 깨닫고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 마저도, 그 사실 자체가그 사람을 거듭나게 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사람을 거듭나게 하는 것은, 성령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강권적인 역사라야 됩니다. 그 역사는 인간의 노력이나 결단이 끼어 들 틈이 조금도 없습니다.
이런 설교를하게 되면 신자는 항상 고민합니다. “그러면 나는 학생시절 수련회 때 은혜 받은 그날이 나의 거듭난 날이라고철썩 같이 믿고 있었는데, 그게 아닌가? 그러면 난 아직 거듭나지 않았나?”라고 생각하는 신자가 있습니다. 그러나 고민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본문 8절을 보세요.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이 말씀을 보면,신자가 자신의 거듭남의 사건에 대해서 인지할 정도는 되지만, 그것이 정확히 언제,어디서, 어떻게 발생했는지 모른다고 알려줍니다. 그리고 그것이 성령님의 사역이라고 가르칩니다. 만약 누군가 여러분에게, “당신은 언제 거듭났소? 그 시간과 장소가 어디요?”라고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하십시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여러분은 누군가로부터중생의 순간에 대해서 묘사해보라고 묻는다면, 전혀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뭔가 찌릿찌릿한 전기 충격 같은 현상이 몸에 일어났다든지, 몸이 불덩이가 되는 느낌을 받았다든지,아니면 하얀 소복을 입은 예수님이 눈 앞에 나타났다든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든지하는 어떤 현상이 거듭남의 증거라고 생각하는 비성경적인 생각을 던져 버리십시오. 그래서 왠지 그런 류의 답변을하지 못하면, 거듭나지 않은 사람처럼 스스로 자괴감이 들고, 나는 거듭나지않은 사람이 아니면 어쩌지? 별로 뜨거운 체험도 없는데, 그러면 나는구원받지 못하는 것 아닌가? 라는 생각을 절대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무슨 사도 바울이라도 되야 하는 것처럼, 특별한 체험이나 거듭남의 순간들이 외형적으로 일어나야 한다는 강박관념을버리십시오.
여러분 그어떤 종류의 “뜨거운” 체험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성령님이 직접 행하시는 효력있는 부르심이 아니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성령님의 역사가 없이는 그 어떤 여러분의 개인적인 체험도 그냥 주관적인 경험에 불과한 것입니다. 거듭남은 우리의 지성이나 감성으로 느껴지는 신비한 체험 같은 것이 아닙니다. 또한 거듭남은어떤 특정한 시점에 개인에게 일어나는 소용돌이 치는 듯한 감정의 변화도 아닙니다. 거듭남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후 4:6)라는 말씀처럼, 신적이고 초자연적이며 영적인빛을 성령님의 활동으로 직접 조명되는 것이며, 동시에 전인이 변화되는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경험과 현상을 여러분의 거듭남의 표지로 삼지 말고, 그 어떤 특별한 체험이 없었다고하더라도, 이미 여러분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에게 구주시며, 영생을 주시는 분으로 굳게 믿어진다면 이미 여러분은 거듭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