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나눔
요한복음 ⑧ : 성도의 견인(“TULIP”의 “P”)(요10:27-29, 2017년2월26일)

요한복음⑧:성도의 견인(“TULIP”“P”)(10:27-29,2017226)

    오늘은 성도의 견인에 대해서 말씀 드립니다.영어로 하면, Perseverance of the Saints입니다. Perseverance라는 말이 견인이라고 번역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견인은 자동차 견인이 아니라, ‘굳을, ‘참을인을 써서, “굳게 인내한다라는 의미에서 견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한마디로 하면, “참 신자는 구원을 절대 잃어버리지 않고 끝까지 견딜 수 있다.”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28)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두 가지 관점의 의미가 있습니다첫째, 성도는 끝까지 구원을 잃지 않고, 굳게견딘다. 또한 둘째, 하나님은 성도가 신앙에서 탈락하지 않도록 끝까지보존하신다. 성도의 관점으로 보면, 구원을 이루도록 끝까지 잘 견디는것이고,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면, 구원에서 탈락하지 않도록 끝까지 확실히붙드신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가 하나 발생합니다. 구원을 끝까지 지키는 주체가 누구냐 하는 문제입니다.

    칼빈주의에서는 당연히 하나님께서 신자의 신앙을 끝까지 보존하시고, 절대 구원에서 탈락하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칼빈은 이를두고 이런 예를 듭니다. 배가 바다를 달립니다. 선원이 배에서 열심히 일하다가 갑판에서 넘어집니다. 그러나 금방 일어서서 다시 일합니다. 이것이 참 신자의 모습입니다. 참 신자는 갑판에서 일하다가 잠시 넘어져서 실족하는 경우는 있을지 몰라도, 절대 바다에 빠져서 그 배에 다시 타지 못하는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신자의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역사하시기 때문에 실패나 도중 탈락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개신교회에서는 이 사실을 믿지 않고 다른 교리를 믿고 있는 교회들이나 신자가 존재합니다. 참 신자도 언제든지 구원에서 중도 탈락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이것을 사실로 믿는 신자들은 어떻게 신앙생활 할까요? 굉장히 열심을 낼 것은 자명 한일입니다. 사실 열심을 내는 것은 성경적이고 좋은 것이지요. 성경에서도 죽도록 충성하라”(2:10)는 명령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신자가 내는 충성과 열심은 구원을 유지하기 위해서라거나 구원을 따내기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지요. 신자는 이미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그것에 감사해서 열심하는 것이지요

    예를 들면 빌 3:14, “우리가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쫓아가노라라는 말씀에서 열심히 쫓아 가는 것을, 구원에서 중도 탈락하지 않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아니지요. 그렇게 믿는 사람들은 부름의 상구원을 얻는 것이라고 해석해 버립니다그러나 그것은 틀린 해석입니다. 여기에서 부름의 상이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더욱 온전해 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그러므로 신자는 그리스도께 더욱 자라가고, 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충만해지기위해서 열심히 쫓아가는 것입니다.

      참 신자도 구원에서 중도 탈락할 수 있다고 믿는 사상은 알미니안주의에서 왔습니다. 알미니안주의는 17세기 제이콥 알미니우스라는 네덜란드 신학교의 교수로부터 시작된 잘못된 교리입니다. 알미니우스의 스승이 테오도르 베자라는 사람이고베자의 스승이 칼빈입니다. 그러니 알미니우스는 칼빈의 제자의 제자격입니다. 1610, 이 알미니우스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이 알미니우스의 가르침을 다섯 가지항목으로 정리한 것이 바로 알미니안주의 5대 항론이라는 것인데, 이것이 알미니안주의 교리의 핵심 사상이 됩니다.

    이들의 주요 다섯 가지 교리 중 성도의 견인의 교리에 반하는 교리가 있는데 이렇게 기록합니다. “참으로 중생한 신자가 신앙을 잃고 또 구원을 잃을 가능성이 있다.”이 명제 안에는 어떤 철학이 담겨 있을까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유지하는 것은 신자에게 달려 있다.”는 철학입니다. 다시 말하면, “구원이 인간 자신에게 달려있다.”라는 말이 됩니다.

    알미니안주의에서 무슨 근거로 이렇게 가르치는 것일까요많은 구절들이 있지만, 그들은 핵심적으로 히6:4-6절을 근거로 듭니다.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여기에서 마치 중생한 신자에게 나타나는 은혜의 표지들 네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①한번 빛을 받고, ②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③성령에 참여한바 되고,④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이 네 가지를 경험하고도 타락한자들이 있다고 기록합니다. 그런데 그 타락은 칼빈이 예로 든, “갑판에서 넘어졌다가 일어서는일시적인 넘어짐이 아니라, “물에 빠져서 죽어버리는” 다시는 배에 오를 수 없는 배교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 구절을 단순하게 보면분명히 중생한 자처럼 보이는 사람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배교자가 되어버리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알미니안주의자들이 바로 이점을 참 신자도 언제든지 구원에서 탈락 할 수 있다.”라고 주장하는 근거로 삼습니다. 굉장히 일리 있어 보입니다. 그 어떤 구절보다 이 구절을 가지고 그렇게 설명하면 시원하게 반박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나는 이 구절을 이해하기 위해서 여러 학자들의 의견을 참고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참고한 것 중에는 아더 핑크의 설명이 가장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참고로 아더 핑크는 20세기 최고의 청교도 신학자이자, 개혁신학가라고 평가 받습니다. 아더 핑크는 히64-6절의 말씀을 성령의 이중적 사역이라는 말로 풀이를합니다. 이 말은 성령님은 구원으로 선택된 사람에게도 역사하시고, 선택받지 못한 사람에게도 역사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령님께서 선택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얼마든지①한 번빛을 받고, ②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③성령에 참여한바 되고,④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성령님의 역사는 택자들에게 역사하는 방식과 비택자들에게 역사하는 방식에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첫째 성령님이 택자나 비택자나 할 것 없이 역사하는 공통된 방식은, “성령님이 어디에 역사하시는가?”라는 질문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말하자면 성령님이 인간에 작용하시고 역사하시는 좌소가 택자나 비택자나 같다는 것입니다. 3가지입니다.성령님은 모든 사람들의 ①총명(이해, understanding), ②의지(will), ③감정(affection)에 역사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개혁신학가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부분입니다. 칼빈도 기독교강요에서, 영혼의 기능은 지성과 의지에서 나타난다 라고 말한 것을 볼 때, 굉장히 성경적인 의견입니다.

    그런데 성령님은 택자나 비택자에게나 같은 인간 내부의 기능에 작용하지만, 그 작용의 방식(방향)이나 정도에 차이가 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인간의총명(이해력)에 성령님이 역사하실 때, 3:5, “우리를 구원하시되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하심으로 하셨나니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성령님은 택자들에게는 말 그대로총명을 새롭게하시는 방식으로 역사하지만, 비택자들에게는 밝게 조명하기만 한다는 것입니다.말하자면 성령님께서 진리의 말씀을 그들 속에 비추어주기만 할 뿐, 완전히 그들의심령을 새롭게 변화시키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까지는 구원의 진리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그래서 비택자들도 ①한 번 빛을 받고, ②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③성령에 참여한바 되고, ④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예를 들면, 1:21에 보면,불의로 진리를 막는 자들도 하나님을 알되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타락한 자연인의 사람들도 하나님을 지식적으로는 얼마든지 알 수 있다는것입니다. 그것은 성령님이 그들의 총명(이해)에 새롭게 하시는 정도는 아니지만, 빛을 비추시는 정도로 역사하셔서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이것이 아더 핑크의 설명입니다.

    이제 한번 중간 정리를 해 봅시다. 6:4-6절이 참신자의 도중 탈락 가능성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처음부터 참 신자가 아님을 말하는 것일까요? 분명히 이 본문에서 말하는 바는, 처음부터 참 신자가 아니었던 사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이중적 사역에 의해서비택자에게도 약간의 조명하심을 통해서, 은혜의 표지가 나타나는 것처럼 보였을 뿐입니다예수님께서도 마 7장에서 마지막 심판 날에 일어날 일들을 말씀하시면서 이런 사람이 있다고 가르치십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고,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22) 라고 했을 때, 예수님의 대답은 이렇습니다.“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23). 이 말씀이 무슨 뜻일까요? 1. “내가 원래 알았지만, 지금은 모른다.” 아니면, 2. “내가 처음부터 몰랐다.” 답은 2번입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그들을 부른 적도 없고, 그래서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애초부터 택자로서 부름 받은 신자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만약 성령님이 사람의 총명에도 역사하신다면아더 핑크의 말대로 택자나 비택자나 상관없이 다 그들의 감정에도 동일하게 역사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하는 장소는 같다 할지라도 방식과 정도는 다를것입니다. 그래서 비택자들에게도 깊은 신앙적인 체험과 감정의 상태를 보이는 경우가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이에 대해, 조나단 에드워즈의 설명을 인용할까 합니다. 참고로 로이드 존스는, “청교도들을 알프스산에 비유하고, 루터와 칼빈을 히말라야에 비유한다면, 조나단 에드워즈는 에베레스트산에 비유하고 싶다.”는 말을 했을 정도로 조나단 에드워즈가 가지고 있는 신학적 견해가 얼마나 높은 위치에 있는가를 말해 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에드워즈가 쓴 신앙감정론, Religious Affections”라는 책에 보면 이렇게 써 놓았습니다. “신앙은 대부분 감정 안에 있다. 따라서 거룩한 감정이 없이는 참된 신앙이란 없다그리고 마음 속에 거룩한 감정으로 드러나지 않는 어떠한 진리의 빛도 선하지 않다.” 이 말은 성령님께서 사람의 감정에 역사하셔서 신앙을 불러 일으키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에드워즈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사람에게 어떤 신앙의 감정이 생기는 것들이 다 진정으로 거룩하고 영적인 것들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이것을 그는 신앙의 소극적 표지라고 일컫습니다이 소극적 표지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어떤 은혜가 임할 때 사람의 감정의 유형에서여러 가지 형태로 표출되는 데, 그것이 어떤 경우에는 정말 하나님의 선한 은혜로 온 것이기도 하지만그렇지 않을 경우도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어떤 신자의 감정을 통해 나타나는 신앙의 양상이 무조건 다 선한 은혜로부터 온 것이라고 단정지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갑자기 성경 구절이 떠오릅니다. 그런데 이런 감정 자체가 다 선한 은혜로부터 출발한다고 볼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단에게 소리나 글자를 사람들의 마음 속에 떠오르게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사단에게는 그런 일을 하기에 충분한 전능에 가까운 능력이 있다그렇다면 성경에 있는 말씀도 떠올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또 사랑을 예로 듭니다. “사랑에는 모조품이 많은데, 어떤 것이 탁월하면 탁월할수록 그것의 모조품은 더욱 많다. 철이나 동보다 금이나 은의 모조품들이더 많다. 그런데 어떤 것들이 탁월하면 탁월할수록, 그 본질과 내적성질을 닮은 모조품을 만들어 내는 것은 더욱 어렵다.”라고 설명합니다. 24:12-13,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구원을 얻으리라.” 마지막 날에 결국 진짜 사랑과 모조품 사랑이 판가름 날 것이라는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이처럼 주님을 사랑하는 감정이 가짜로 판명나서 결국 구원과 상관없는 사람임이 드러나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드워즈는 거짓된 믿음은 매우 다양한 거짓 감정들을 합하면 은혜로운 감정과 닮은 것이 될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은혜로운 모든 감정에는 가짜가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형제들에 대한 사랑도 모조품이 있다. 경건한 슬픔에도 가짜가 있다. 여호와를 경외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우상들을 섬겼던 사마리아인들에게서처럼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에도 모조품이 있다. 세례 요한의 설교를 들었던 많은 사람들에게서처럼 영적인 기쁨에도 모조품이 있다. 예후와 회심하기 전의 바울이나 믿지 않은 유대인들처럼 열심에도 가짜가 있다.”라고 설명합니다.

    이 모든 것을 정리 해 보면 이렇습니다참 신자가 아니면서도 얼마든지 신자처럼 행세할 수 있고, 참 진리 안에 거하지 않으면서도 얼마든지 진리 안에 있는 것처럼 모조품으로 신앙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아더 핑크의 말처럼성령님께서는 비택자들에게도 어느 정도 총명과 감정에 역사하시기는 하지만, 그들을 완전하게 새롭게 하시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결국 에드워즈의 말처럼 모조품에 머무를 수 밖에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알미니안주의가 주장하는 히6:4-6절은 참 신자의 타락 가능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조품 신자의 배교를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 구절을 알미니안주의자들이 자신들이 주장하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유지하는 것은신자에게 달려 있다.”를 뒷받침하는 데 역시나 사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구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수 없나니”(6). 만약 그들의 주장대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유지하는 것이 신자 자신에게 달려 있다고 한다면, 타락한 자들이 다시 새롭게 회개할 수 있어야 되는 것 아닙니까? 그래야 신자의 경건의 노력을 통해서 구원을 받지요. 그러나 이 말씀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할 수 없다고 신자의 노력자체를 원천봉쇄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알미니안주의자들이 이 구절을 성도의 견인교리를 반박하는 데 사용하는것 자체가 맞지 않다는 것입니다.

    성도의 견인 교리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의미는 뭘까요? “하나님의 택하신 참 신자라면 절대 한번 받은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고, 끝까지 보장받는다라는 확신과 안전보장의 의미가 있습니다.이것이 진리입니다. 또 한가지 측면은 두렵고 떨림으로 자신의 구원을 점검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나아가야 하는 복종의 삶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교리를 잘 못 남용하면 치명적인 약점을가진 교리로 전락해 버리게 됩니다. “신자는 한번 구원을 보장받았으므로 어떤 삶을 살던 상관없이 결국 구원받는다.”라는 남용입니다. 이 교리는 신자를 뻔뻔하게 죄 속에 거하면서도 한번 주어진 은혜는 보장받는다는보증서가 아닙니다. 성도의 견인 교리는 신자가 정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신의 구원을 살피고 그래서 더욱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안 된다는 경외심을 가지게 하는 것에 있습니다. 은혜로 구원은 받았지만 여전히 죄가운데 있고, 여전히 비참한 지경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면서, 결국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가 아니면 나는 살수 없는 존재구나 하는 고백을 매일매일 하며 살아가도록 하는 교리입니다. 순간순간 성령님의 붙들림을 받지 않으면 불신자보다 더 형편없는 삶을 살 수도 있는 인간의 비참함을 보게 합니다. 그래서 더욱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위대해지고, 인생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아니면 나 같은 인생은 완전한 멸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었음을 인식하게 합니다. 동시에 나 같은 인생도 건져주셔서 구원 백성삼아 주신 하나님의 은혜만을 바라며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2/26/2017 9:30:00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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