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⑦: 불가항력적 은혜(“TULIP”의 “I”)(요6:37,44,65, 2017년2월19일)
오늘은 불가항력적 은혜에 대해서 말씀을 드립니다. 영어로는 Irresistible Grace 입니다. 직역하면 “저항할 수 없는 은혜” 또는 “억누를 수 없는 은혜” 또는 “압도적인 은혜”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의 뜻은 이렇습니다. 성령하나님이 한 죄인을 의롭게 하실 때, 그 죄인이 아무리 강력하게 저항하고 거부해도, 결국 그 영향력이 압도한다는 뜻입니다.
칼빈의 네 번째 중요교리인 “불가항력적 은혜”는 앞선 세가지 교리와 긴밀히 연관됩니다. 첫째, 전적 타락,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은 비참과 무능에 빠졌고, 구원의 자격조차 잃어버린 영적불구의 상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구원의 손길을 뻗지 않으시면 도무지 회생불능의 상태로 있다가 결국 멸망으로 갈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일방적인 하나님의 선택이 없으면, 스스로는 구원의 길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둘째, 무조건적 선택, 하나님의 주권적인 작정안에서 구원으로 이끄실 백성들을 선택해야만 했습니다. 구원하시기로 선택한 사람들이 구별되어 있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온 인류”를 위한 것 일수 없고, 당연히 구별되어 선택한 사람들을 위해 수여된 것입니다. 그래서셋째, 제한 속죄, 제한된 사람들에게만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주어졌으므로, 제한된 속죄가 됩니다. 그리고 이제 넷째, 하나님께서 정해진 사람들만을 위해서 십자가를 주셨다면, 그 십자가의 능력은 선택된 사람들에게 어떤 일이 있더라도, 기필코 효력이 나타나도록 하십니다. 그래서 선택되어 구원받기로 작정된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하나님의 은혜의 수여를 거부하지 못합니다.
여기에 중요한 신학적 질문이 생깁니다. “사람은 거부할 수 없는 성령님의 은혜의 역사를 거부할수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답부터 말하자면, “절대 거부할 수 없습니다.” 신자가 중생할 때에는 성령님의 주도적인 역사가 있습니다. 이때 신자는 그 누구도 성령님의 거듭나게 하시는 일을 거부하거나 막을 수 없습니다. 누구든지 굴복합니다. 본문 요6:37, “아버지께서 내게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이 말씀에서 약속하는 게 뭡니까?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무조건적으로 선택된 자들)”는 “다(하나도 빠짐 없이) 내게로 올 것이요(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효력 안에 들어 온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다”라는 의미는 절대성입니다. 반드시 유효한 구원으로 이끄신다는 의미입니다. 실패가 없다는 의미죠.
그렇다면 다시 이런 질문을 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성령님은 불가항력적인 은혜의 사역을 하실 때 그 대상이 고분고분하게 잘 따라 줄만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만을 골라서 역사하시는 것입니까?” 답은 “아니요"입니다. 자연인의상태에 있는 인간은 하나도 빠짐없이 하나님께 복종할 능력을 상실한 상태입니다. 뿐만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께 저항하는 상태입니다.
롬8:7-8은 자연인이 가지고 있는 세 가지 “저항의 상태”를 보여줍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첫째, 하나님과 원수 된 상태입니다.둘째,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하고 또한 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셋째,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1. 하나님과 원수 된 상태—이것은 거룩이 없는 상태입니다. 마귀의 자녀로서 거짓을 따르는 상태입니다. 요8:44은 마귀는 거짓의 아비이며, 처음부터 진리가 그 속에 없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자연인의 상태는 마귀의 자녀이며, 거짓만이 있습니다. 본성이 처음부터 끝까지 거짓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본성적으로 처음부터 참뿐입니다. 거룩하십니다. 그러니 마귀에게 사로잡힌 자연인은 본성적으로 하나님께 원수처럼 저항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불가항력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2.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도 할 수도 없는 상태—이것은 불법과 무법 상태입니다. 요일3:4,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자연인의 상태는 그 속에 하나님의 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늘 불법만을 행하면서, 하나님께 도전하고 저항합니다. 자연인은 하나님의 법이 그 마음에 없으니, 하나님의 법에 굴복할 수 없는것은 당연합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저항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자연인의 상태에 있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그리스도를 비방하고, 기독교를 폄하합니다. 왜냐하면 본성적으로 마귀의 법을 따르고 있고, 계속 성령님을 거스르고 저항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불가항력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3.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는 상태—이것은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는 선이 전무한 상태입니다. “악인의 제사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신다”(잠15:8)는 것은 선이 없는 상태로는 어떠한 경배도 경배가 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죄인은 스스로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불가항력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이것이 역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은, 그것 자체로 “은혜가 부어지지 않으면 안 되는 역설적 자격”이 되는 셈입니다.
종합해 보면, 자연인의 상태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 끊임없이 저항하는 비참한 상태에 있습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그들은 진리 안에 있지 않기 때문이며, 마귀의 법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마치 물리학 법칙처럼 한 가지 법칙을 따르면, 또 다른 법칙을 거스르고 저항할 수 밖에 없는 원리입니다. 예를 들면, 비행기가 날기 위해서는 중력법칙을 이겨내야 합니다. 그래서 양력법칙의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만약 속도를 줄이면, 중력법칙의 지배를 받아서 땅으로 떨어집니다. 반대로 속도를 높이면 그때에는 양력법칙에 의해서 하늘을 날게 되는 것입니다. 자연인이 하나님께 지속적으로 저항할 수 밖에 없는 원리가 마치 그러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법을 따르든지, 아니면 마귀의 법을 따라야만 합니다. 그런데 그들의 본성은 원래 하나님의 법을 거스르고 저항합니다. 그러므로 저항할 수없도록 불가항력적 은혜로 그들을 덮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불가항력적인 은혜 교리를 배우면서 우리가 반드시 깨트려야할 착각이 하나 있습니다. “나는 비교적 괜찮은 사람이다”라는 암묵적인식입니다. 물론 신자는 고후 5:17말씀처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미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제법 괜찮은 사람이 된것은 틀림 없습니다. 그러나 신자가 자연인이었을 때 본래 어떤 비참의 상태에 있었던 사람인가를 잊지 말자는 것입니다. 엡2:1, 5에서 두 번 반복해서 이렇게 우리의 과거의 상태와 현재의 상태를 선언합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1절),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5절). 여기에서“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은 현재의 상태를 “산 상태”로 말씀하고, 그 이전의 상태를 “허물과 죄로 죽었던 상태”라고 설명합니다. 여러분, 허물과 죄로 죽었는데, 다시 살도록 생명을 부여 받은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어떤 마음으로 살아갈까요? 저는 확신하건대 분명히 그런 사람은 인생을 겸허하게 살아 갈 것입니다. 왜냐하면 육신의 생명이 끝나는 날이 다시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전에 죽음에 관한 TV 다큐멘터리를 본적이 있습니다. 근사체험(임사체험,near death experience)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사고를 당해 거의 죽음을 맛보았거나, 수술 도중 심정지가 와서 30분씩 거의 죽음 상태에 있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난 사람들의이야기였습니다.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근사체험이 당신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습니까? 그랬더니 공통적으로 그들은 “겸손하게 되었다”는 대답을 했습니다. 그리고 가족과 이웃에 대한 마음이 관대해 졌다고 말했습니다.
겸손은 소극적 의미에서, “잘 익은 벼가 고개를 숙인다”는 의미죠. 가진 것이 많지만 그것을 드러내지 않는 것 등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겸손의 의미는 적극적인 의미로 말씀합니다.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마음”입니다. 이것은 곧 사랑의 실천을 말하는 것이지요.
성경에는 예수님을 제외하고 죽었다가 살아난 인물이 대략 7명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약에 2명, 신약에 5명인데요. 성경은 그들이 다시 살아난 이후의 삶을 거의 기록하지는 않습니다. 그 이유는 성경은 영생에 관한 책이지, 육신의 삶의 관한 것을 알려주는 생활 지혜서가 아닙니다. 나는 상상해 봅니다. 그들이 다시 주어진 제2의 인생에 어떤 마음으로 살았을까? 분명히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고,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삶을 살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한번 죽어 봤기 때문에, 죽음 앞에서 얼마나 자신이 미약한 존재인 것인지를 체험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좀더 자신의 삶에 충실하게 되고, 또한 자신에게 생명을 주신 분에게 집중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신자는 영적인 면에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성령님은 그에게 겸손하도록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신자는 마음속으로, “나는 최소한 저 사람보다는 나아”라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됩니다. 갈라디아서 5장에 나오는 성령의 열매에는 사랑이 있습니다. 아홉 가지 열매 중에, 사랑이 가장 먼저 나오고 이어서 여덟 개가 따라 나옵니다.나는 이 순서가 우연이 아니라고 믿습니다. 나머지 여덟 개의 열매는 사랑의 열매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나머지 여덟 개의 열매가 사랑의 열매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이것은 신학적 해석은 아닙니다. 개인적인 적용입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냐 하면, 누군가에게 “당신을 사랑합니다”고 말하는 사람은, “당신을 기뻐(희락)합니다”라고 말할 수 밖에 없고, 또한 “당신과 화평하고 싶습니다.” “당신을 오래 참고 기다리겠습니다.” “당신에게 자비를 베풀겠습니다.” “당신에게 선한 일을 하고 싶습니다.” “당신만을 충성하겠습니다.” “당신에게 온유하게 대하겠습니다.” “당신을 가장 아끼고 절제하겠습니다.”라고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평화를 깨트리고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이율배반적인 사람이지요. 그런데 더 이율배반적인 사람이 어떤 사람인 줄 아세요?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용서받았습니다.”라고 말하는 그 사람이 용서하지 못할 때 그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이율배반적인 사람이 됩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빚,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빚을 진 사람이, 그것보다 비교도 안될 정도로 작은 빚을 탕감해 주지 못하는 것처럼 이율배반이 어디 있습니까?
마지막으로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할 중요한 질문이 하나있습니다. “불가항력적인 은혜는 말 그대로 불가항력적이기에 강압적인가?”라는 질문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불가항력적 은혜는 절대로 강압적인 의미가 아닙니다. 단지 절대적이며 주권적이라는 뜻에서 불가항력적이라는 말입니다.
사실 “불가항력적은혜”라는 단어가 가지는 오해가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요6:44)라는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마치 하나님께서 우리를 강압적으로 끌고 가시는 것으로 생각할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그래서 개혁신학가들 중 일부는 “불가항력적 은혜”라는 단어 대신에, “효력있는 부르심”으로 대체해서 쓰자라고 하기도 합니다. 소교리문답 제 30문에서 “효력있는 부르심”을 설명할 때 이런 문구가 있습니다. “성령님이…우리안에 신앙을 일으키시고…”우리의 신앙을 일으키시는 주체가 성령님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소교리문답 제31문에서 “효력있는 부르심”의 정의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효력있는 부르심은 하나님의 영의 사역으로 우리의 죄와 비참을 깨닫게 하시고, 또 우리의 마음을 밝게 하셔서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고, 우리의 의지를 새롭게 하시고, 우리를 권하사 복음 안에서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성령님께서 한 자연인을 신자로 영접하게 하시는 과정을 한 번 보십시오.1. 죄와 비참을 깨닫게 하십니다. 2. 마음을 밝게 하십니다.3. 의지를 새롭게 하십니다. 4. 권면하십니다. 그러고 난 다음 5.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게 하십니다. 얼마나 인격적입니까? 여기에서 강압적이고 비인격적인 분위기가 느껴집니까? 아니지요. 성령님께서는 죄인의 마음을 깨닫게 하시고, 마음을 밝히시며, 의지를 새롭게 하시고, 권면하셔서 결국 자발성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정확하게 성경적인 “불가항력적 은혜”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절대적이며 주권적으로 은혜를 수여하시지만, 절대로 그것이 “질질 끌고”가는 형식이 아니라, 인격적인 모습으로 모든 일들을 수행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사실 이 단어를 “효력 있는 부르심”이라고 불러도 무방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한 사람에게 거부할 수 없는 압도적인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이, 정말 “강압적이면서 인격과 소통하지 않는 방식”으로 신앙을 일으키십니까? 아닙니다. 성령님은 강압적으로 은혜를 주입하는 방식이나, 일방적으로 수여하는 것이 아니라, 설득하고 원하는 마음을 주시면서 인격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들이게 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인간의 공로가 들어갈 수 있는 여지를 주셨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성령님께서 모든 것을 “주도하시지만 죄인의 마음 밭이 여전히 완강히 저항하는 상태로 내버려 둔 채, 강압적으로 은혜를 주입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사실 “불가항력적 은혜가 불가항력적이면서도 강제가 아니다”라는 논리적으로 이해 불가의 영역입니다. 논리상으로 보면, “믿음을 거부할 수 없도록 역사하는 성령님을 신자가 맘대로 거부할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이라면, 그것은 강요당한 것이다.”라는 명제가 맞아 보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믿음을 신자가 거부할 수 있다면, 성령님의 사역은 언제든지 실패할 수 있다. 그러므로 무조건적 선택은 함께 실패한다.”는 논리가 됩니다.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만약 신자가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거부할 수 없었다면, 자발적이 아니므로 인격적인 믿음이 아니라 프로그래밍 된 믿음이다.”라는 논리가 나오는데, 이것이 맞습니까? 나는 개인적으로 이것을 “강요당한 자발성”이냐 아니면,“설득 당한 자발성”이라는 단어로 정리하고 싶습니다. 이것은 신학적으로 일반화된 표현은 아닙니다. 그냥 개인적으로 그렇게 표현하고 싶은 것입니다. 다만 이 표현을 뒷받침 해 줄만한 저명한 신학자의 글이 있어서 소개합니다. 존 파인버그(John S. Feinberg)라는 신학자인데요. 시카고의 트리니티 복음주의 신학교에 교수입니다. 그가 “예정과 자유의지”라는 비교신학 책에서 이런 예를 듭니다.
교실이 있습니다. 누군가 교실에서 한 학생을 밖으로 내보내기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 경우에 최소한 세 가지방법이 있다는 것입니다. 첫째, 힘을 사용해서 한 학생을 들어서 교실밖으로 내 보내는 방법입니다. 이 방법은 학생의 의지가 전혀 들어가지 않은 강압적인 방법입니다. 둘째, 학생의 머리에 총을 들이대고 나가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학생은 죽지 않기 위해서 나갑니다. 이 경우에는 강압적이긴 하지만, 교실 밖으로 나가는 것은 본인의 판단과 의지가 발휘 됩니다. 이것을 나는 “강요 당한 자발성”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셋째,설득입니다. 예를 들면, 교실 밖에 나가면 돈을 나눠준다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 자신에게 유익이 된다고 판단한 학생은, 강압이 아닌 자발적이면서도, 자신의 의지로 나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나는 “설득 당한 자발성”이라고 부르려고 합니다.
물론 이 예는 하나님의 예정이 결정론이라는 전제가, 개인의 자율성을 무시하지 않은채 어떻게 양립할 수 있는가? 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한 사람이 중생하도록 무조건적으로 선택하시고, 또한 불가항력적 은혜로 어떠한 경우에도 성령님의 역사를 거부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절대 강압적이지않을 수 있다는 예로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성령님이 강림하시기 약 600년 전에 다음과 같이 성령님의 역사에 대해 표현합니다: “…그 속에 새 영을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겔11:19). 이 구절은 “강요당한 자발성”이 아니라, “설득 당한 자발성”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성령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 가운데 들어오십니다. 그리고 신자의 마음 가운데 일어난 변화는, “돌 같은 마음”이 사라진 것입니다. 대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으로 대체됩니다.이것은 우리 가운데 영적 소프트웨어가 예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이전에는 절대 받아들여지지 않던 복음이, 어느새 자원하여 받아들여질 수 있는 상태로 변화 된 것입니다. 그러고 나면 회심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의 서정 10단계에서 중생이 회심보다 논리적 순서로 앞서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마음의 밭이 좋은 땅으로 개관되지 않고서는, 복음의 씨앗이 열매 맺지 못하기 때문에, 성령님은 씨를 뿌리기 전에 먼저 마음의 밭에 혁신을 일으키시는 일부터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면 복음 안에서 회심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절대 교회와는담쌓고 살아가던 사람들이나, 심지어 기독교에 대해서 심한 반발을 하던 사람들 조차 어느 날 언제 그랬느냐는듯이 깊은 신앙을 가지는 이유가 바로 성령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먼저 중생의 씻음으로 새롭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3:5).
결론적으로 불가항력적 은혜는 하나님의 강압적인 인도가아니라, 성령님의 새롭게 하심으로 우리 가운데 새 영을 주시고, 이미 새로운 마음으로 변화된 사람이 기쁘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복음 안에서 값없이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하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