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③ : 예수님의 실체(요7:25-36,2017년 1월 22일 주일)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면서, 가는 곳 마다 사람들이 궁금한 것이 있었습니다. “도대체 예수라는 분은 누구인가?예수라는 분은 과연 어디서 왔는가?”라는 정체성과 기원에 관한 의문이었습니다.오늘 본문이 바로 그것에 관한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27절에 사람들이 그럽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아노라…” 그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안다고 말하는 것은 단순히 예수님이 어디서 태어났고, 자랐으며,누구의 집에서 태어났는지를 안다는 것이지요. 이에 예수님이 28절에서 대답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알고 내가 어디서 온 것도 알거니와”(28절). 이것은 “너희들이 알고 있는 사실까지가 틀린 것이 아니다.”라는 단순 긍정을 하시는 겁니다. “그러나 실제로 너희들은 나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라는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로라 나를 보내신 이는 참이시니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28절). 여기에 특별한 표현이 나타납니다. “나를 보내신이”라고 했습니다. 이 표현은 신약성경에 총 35번 나옵니다. 그런데 31번이 요한복음에 기록되었습니다.제가 요한복음 강해 첫 시간에, 요1:1절을강해하면서 “예수님이 로고스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이시며, 사도요한이 이 사실을 요한복음 끝장까지 계속 설명해 나가는 것”이라고 말씀 드린 적이 있습니다.사도 요한이 요한 복음을 기록하면서 끈질기게 놓지 않는 중요한 맥락이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부터 왔으며, 또한 그가 하나님이시다.”이 말씀을 포괄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이 필연적으로 표현할 수 밖에 없는 표현이 바로 “나를 보내신 이”입니다. 예수님이 이 표현을 쓰실 수밖에 없는 이유를 29절에서 설명합니다. “내가 그에게서 났기 때문이다”라는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의 관계성을 말하는 것이죠. 그리스도와 성부 하나님은 동일본질이다라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셨다”라는 말은 기독교 진리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잘 이해합시다. 먼저 이것을 해석할 때, 절대 수용하면 안 되는 두 가지 해석을 말씀 드립니다.첫째, “성부 하나님이 성자 하나님을 창조했다.”절대 아닙니다. 둘째, “성부 하나님이 성자 하나님을낳았다.” 이것 또한 절대 아닙니다. 이것은 위격을 말하는 것입니다.성부와 성자는 동일한 한 분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서로 위격이 달라서 하시는 일이다르다는 것입니다. 삼위일체죠.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한 분 하나님이시지만 세 위격을 가지십니다. 이것을 논리적으로 따져서 이해하려고 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절대 삼위일체 하나님을논리와 이성으로 납득 하려고 하지 마세요. 인간의 이성으로 절대 풀어내지 못합니다. 인간 이성의 영역 바깥에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역사상 가장 치열하게 논쟁했던 주제가 바로삼위일체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의 선조들은 이것을 여러 번에 걸쳐서 회의를 하고 정립을 합니다.그래서 결국 AD 451년경에 이 문제를 4가지 명제로 압축하여 결론을 짓습니다. 이 회의가 바로 칼게돈 회의인데요. 4가지 명제가 이렇습니다. 1. Without confusion 2. Without change 3. Without division 4. Without separation입니다. 성부,성자, 성령 하나님은 서로 혼동되지 않으시고, 서로 바뀌지도 않으시고, 서로 분리되지도, 서로 나뉘어지지도않으신다는 명제로 결론을 짓습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한 분 하나님이시면서세 위격을 가지신, 하나님은 서로 섞이지도 나뉘어지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무지 납득이 안 갑니다. 그래서 이것을 납득하려고 하면 안되고 그냥받아 들여야 하는 문제입니다. 믿음의 영역은 이성의 영역과 출발점이 다릅니다. 이성은 시간과 공간 안에서 제약을 받고, 그러나 믿음은 시간과 공간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그래서 이성을 가지고 이해하려고 하면 안됩니다. 이성의 한계가 뭡니까?“현재성”이라는 시간 안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우리가 스마트 폰을 씁니다. 서로 다른 나라에 있는 사람이라도 얼굴을 보고 대화를 합니다. 우리에게는 이것이 일상입니다.우리가 이 스마트 폰의 원리를 파헤쳐서 이해가 되지 않아도 이것이 그냥 믿어지는 것입니다. 이성의 영역을 넘어 선 것이지요. 그런데 여러분이 만약 100년 전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서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앞으로는 서로 다른 나라에 있어도 얼굴을 보면서 대화 할 수가 있어요”라고 한다면,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 할까요? 아마도 여러분을 정신 이상자로 생각할지도 모릅니다.왜요? 그들의 이성으로는 도무지 상상이 안 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지금과 그때의 사람의 DNA는 같습니다. 뇌구조도 같구요. 그런데 그 당시 사람들의 이성과 오늘날 사람들의 이성이 왜 다르게 작동할까요?그것은 “현재성”이라는 시간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이성의 한계가 이것입니다. 오늘날에는 전혀 문제가 안 되는 일도, 과거에는 이성 안에서 해결할 수 없는 불가능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와 관련하여 고린도교회에게 쓴 편지에서이것과 관련하여 어느 정도 해답을 줍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13:12). 우리의 이성의 한계가 “현재성”이라는 시간 안에 갇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일하심에 대해서 다 이해할 수없습니다. 또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겪는 어려움이나 고통들의 이유를 우리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그리고 또한 성경을 읽으면서 아무리 바른 해석을 하고 이해를 하려고 해도 충분히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에는, 그 모든 불충분 한 것들이 채워지게 됩니다.알게 됩니다. 다 이해되게 됩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믿지 못하는 이유가 뭘까요?이성입니다. 오늘 나는 철학에 대해서 좀 설명하려 합니다. 철학은 몰라도 신앙과는 상관없으나, 알면 도움이 됩니다. 사실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요한복음은 4복음서 중에서 가장 “철학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태,마가, 누가 복음을 공관복음이라고 그러고, 요한복음은 따로 떼어놓습니다. 그 만큼 요한복음의 색채가 다른 복음서와는 차별 되기 때문입니다.그래서 “이성”과 관련하여 철학 이야기를 좀하겠습니다.
인류가 언제부터 이성에 눈을 뜨게 됩니까?이성주의, 또는 합리주의라고 부르는 사조가 들어오면서부터 입니다. 이 합리주의 사고는 17세기, 소위 근대 철학의 아버지라고부르는 데카르트라는 사람으로부터 출발합니다. 데카르트가 한 말 중에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이게 합리주의 핵심적인말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모든 것이 거짓이라도 내가 지금 생각하고있다는 사실 하나만큼은 사실이라는 것이죠. 그리고 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도 확실하다는 것이죠.”이 두 가지를 합쳐 놓으면, 생각+존재.자신의 존재는 결국 생각으로부터 증명해 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가장중요하게 생각하는 원리가 뭐냐 하면, “의심하라!””아무리 의심을 해도해도 도무지 더 이상 의심할 수 없을 때가지 절대 사실로 받아들이지 말라!”는 말입니다. 데카르트는 혹 자기를 낳아주신 어머니가 진짜 엄마인지부터 의심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그는 모든 것을 의심해보고, 생각하고, 그리고그 존재 증명을 해 보라는 것입니다. 책으로부터 얻은 지식, 학교로부터배운 지식, 부모로부터 전수받은 것, 경험에서 나온 것 등등 모든 것이의심의 대상입니다. 여기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이 누구입니까? “나”라는 존재입니다. 나는 존재하고 있고, 생각하고 있다면,그 외에 것은 결국 나를 잣대로 해서 증명해 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중심이“나”입니다. 그래서 “주체(subject)”라는 말이 여기서 나오죠. 나중에김일성이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북한의 실정에 맞게 공산주의 이론을 수정할 때, 썼던 말이 “주체”아닙니까?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며 모든 것을 결정한다.”공산주의 이론의 바탕이 유물론 아닙니까?물질이 존재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물질 중에 가장 고등한 물질로 보는 것이죠.그러니 공산당에게 무슨 신이 존재하겠습니까? 그래서 기독교는 공산당이 가장 먼저처단해야 할 대상 1호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산당이 일으킨 전쟁에는어김없이 교회가 폐쇄하고, 교인을 말살시켰습니다. 공산당과 기독교는함께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혹 “나는 공산주의자이면서 기독교입니다.나는 기독교인이면서 공산주의자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데카르트가 주체, 즉 “나”라는 존재를 가지고 생각하다 보니까,결국 신의 존재를 증명하게 됩니다. 논리가 이렇습니다. ①나는 어떻게 존재하는가 ?라는 질문을 합니다. ②만약나라는 존재가 내 스스로 왔다면, 나는 더 이상 의심하고 고민할 필요가 없겠지만, 지금 계속 의심하고 뭔가 찾고 있다는 것 자체가 나는 나로부터 출발하지 않는다. ③나라는 존재가나로부터 출발할 수 없다면, 다른 무언가로부터 왔을 것이다. ④그 다른무언가는 나보다 큰 존재일 것이 분명하며, 그 존재의 생각은 분명히 완벽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완벽하지 않다면, 그도 또한 누군가로부터 와야만 하기 때문이다. ⑤누군가로부터 오지 않고 스스로 완벽하게 존재하는 것은 신 밖에 없다. 그러므로 신은 존재한다.
데카르트의 합리적인 사고가 신의 존재를 증명합니다.그런데 문제는 뭡니까?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는데, 그 출발이 “나”라는 것입니다. 주체는 나고, 하나님은 객체가 되어버립니다. 이게 문제입니다.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했지만, 하나님을 믿지 못합니다. 동시대 기독교 철학자 파스칼이 이렇게 말합니다. “데카르트는 신 없이 지내기 위해서 최선을다했다.”문제는 이것입니다. 데카르트가 합리주의, 이성주의로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했지만, 결국 그는 하나님 없이 지냈습니다. 아는 것과 믿는 것이 하나 되지 못했지요.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것과 믿음의 세계는 다른 것입니다.그 이유는 이성은 “나” 로부터 출발하고,믿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입니다.그래서 이성적으로 시작한 믿음은 성경적 믿음이 아닙니다. 그래서 결국 구원에 이르지못합니다. 금방 허물어집니다. 오늘 본문을 보세요. 바로 그런 사람들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무리 중에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말하되…”(31절)이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그런데 이어서 그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이 뭐라고 말하는지 보세요. “그리스도께서오실 찌라도 그 행하실 표적이 이 사람의 행한 것보다 더 많으랴..”(31절). 이 문장은 잘 읽지 않으면 헷갈립니다. 여기서 “그리스도께서오실 찌라도”에서 그리스도는 예수님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혹시 앞으로메시야가 오시게 되면…이라는 뜻에서 그리스도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예수님을 칭찬하듯이 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혹 메시야가 오시더라도 이 예수보다 표징을 더 많이 나타내지는못할 것이다.”이 말입니다. 여기에서 모순 점이 뭡니까?성경은 분명히 그들이 “예수를 믿고 말하되”라고 하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자기 입으로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를 그리스도로는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믿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런 것입니다.“나는 예수님을 믿기는 믿는데, 그가 그리스도는 아니다.”이게 말이 됩니까? 기독교 신앙의 믿음이 아니죠.
오늘 본문은 오늘날 이성과 합리주의에 물든 사람들,심지어 기독교인들에게 뭘 말씀하고 있는 걸까요? “믿는다고 말하는 것과 믿음을 소유하는것과는 별개의 문제다”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의 믿음에 문제에모순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님을 믿습니다.”라고 말하면그게 진짜 믿는 것이어야 되는데, 그런데 실제로는 믿음이 없더라는 것입니다. 모순이죠. 본인은 믿는다고 말하는데, 알고 보면 믿음을소유한 적이 없습니다. 모순입니다.
어떤 마을에 이발사 한 명이 있었습니다.이발소 앞에 이렇게 써 붙여 놓았습니다. “스스로 이발하지 않는 모든 사람을 이발해줍니다”그런데 누군가 만약 “이발사 머리는 누가 깎아요?”라고 묻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모순이 생깁니다. “이발을스스로 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머리를 스스로 깎아야 합니다. 그런데자신의 머리를 스스로 깎는다면, 스스로 깎지 말아야 합니다.” 이 이야기는20세기 수학자이자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이 “세비야의 이야기”라는 것으로 “역설”을 설명할 때 한 이야기입니다.
기독교 진리의 믿음에 있어서 모순이 뭔지 아세요?“나는 스스로 하나님을 믿습니다”입니다. 왜이게 모순일까요? 첫째, 나는 스스로 믿으면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 없는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 없는 사람은 결국 구원에 이르지못합니다. 그러고 나면 결국 어떤 모순이 발생합니까? “믿는데 구원에이르지 못합니다” 믿음이 있다고 말하는데,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이것을 예수님께서 정확하게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를 들어서 설명하시지요. 말하자면그런 것입니다. 외형상으로는 알곡도 믿음이 있고, 가라지도 믿음이 있습니다.그러나 본질적으로 다른 믿음입니다. 알곡은 구원으로 이어지는 믿음이지만,가라지는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믿음입니다. 자기 스스로 이성적인 판단에 의해서 쟁취한믿음은, 기독교의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자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참 힘들어 하는 것이 뭐냐하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애를 써도 안되고, 노력해도 안 된다”고 말합니다. 답을 말씀 드리면, “그게 정답입니다.”기독교 신앙에서 “믿음”은 “애를 써도 안되고, 노력해도 안 되는 것”에 핵심이 있습니다.믿음은 “나는 무용지물이구나”를 매 순간 순간마다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면 “자기 부인”이 일어나고, 그러고 나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따라 가게 됩니다.”믿음은 자기 확신에 차서 믿는 게 아니라, 매일매일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 앞에 숨 고르기를 하면서 나아가는 것입니다. 순간 순간 나는 하나님의 은혜가아니면, 안 되며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나를 붙들지 않으면, 내가 고백하는모든 신앙고백은 헛것이라는 것이 전제된 확신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의 확신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마저도하나님의 은혜로 성령 안에서 나를 붙들어 주셔서 가능한 확신입니다.
합리주의, 이성주의에빠진 사람들이 왜 믿지 못할까요? “증명해 봐라!”는 것입니다.그러면 절대 믿을 수 없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증명해서 믿는 것이 아닙니다.증명이 안되기 때문에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을 가지면 증명할 필요가 없어져버립니다. 데카르트가 “의심해 봐라”라고 할 때, 큰 오류가 뭘까요? “단계의 오류”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초보의 단계”를 생략해 버린 것입니다. 어린 아이가 학교에 입학합니다. 그리고 수학시간에 아라비아 숫자를 배웁니다. 그리고 구구단도 배웁니다. 이런 초보 단계에 있는 아이들에게, “의심해 봐라”는명제는 통하지 않습니다. 왜요? 1,2,3를 배우는 것은 의심의 문제가아니라, 인류가 약속한 것을 받아들이고 외워야 하는 문제입니다. 그래서1을 1로 쓰지 않고, 혼자 의심해 보면서,1를 2로 쓰고, 2를 1로 쓰면 혼자 바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1,2,3를 그냥 믿고 받아들여야 믿음이 시작되는 것이지요. 그것을 따지고 있으면믿음 자체가 출발이 안됩니다. 사도 바울이 왜 고린도교회에게 “내가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고전3:2)라고 말씀했을까요?“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고전3:3)라고 설명합니다. 믿음의 ABC도 모르는 육신에 속한사람에게, 필요한 게 뭡니까? 복음 아닙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오셨고, 그 분이 곧 하나님이시며, 그는 스스로 십자가에 오르사 모든 죄인의 죄를 위해 대속물로 자기 목숨을 주신 분이다”라는사실을 가르치고, 그 사실이 믿음으로 받아 들여져야 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데, 교회에서 충성하고 헌신하고, 봉사하는 것이 무슨 소용 있습니까?
복음은 애당초 처음부터 이해되지 않는 것입니다.자신이 아무리 이해하려고 노력해도 안됩니다. 36절에서 사람들이 뭐라고 합니까?“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한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니라”여기에 예수님이 “나 있는 곳”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이 표현은 헬라어 단어 3개로 이루어진 말인데요. 한번 들어보세요. “나 있는 곳(호푸 에이미 에고, ὅπου εἰμὶ ἐγὼ, where Iam)”입니다. 시제가 어떻게 되느냐 하면,현재형입니다. 영어성경에는 “where I am”현재 시제로 번역했습니다. 예수님이 지금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지금 현재 어디에 있습니까?갈릴리에 있습니다. GPS좌표로 따지면, 북위32도, 동경 35도 정도의 위치에 예수님이계십니다.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과 함께 있습니다.그런데 뭐라고 말씀하나요? “너희들은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예수님은 “나 있었던 곳”이나 “내가 앞으로 있을 곳”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지금현재 같이 있는 사람들 앞에서 “지금 나 있는 곳”에 못 온다고 말씀하십니다.이해가 됩니까? 신비로운 말 아닙니까?
예수님의 정체성, 실체에 대해서 결론을 찍는 말씀입니다. “나는 나를 보내신 이로부터 왔고, 나는 또한 나를 보내신 이에게 돌아갈 것이다.그러나 동시에 나는 그분이 계신 곳에 있다.”는 말입니다. 의미가 뭘까요? 나는 육신적으로 여기에 있지만, 지금이순간도 여전히 하나님과 함께 하는 로고스이며, 그 로고스는 곧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나의 있었던 곳, 나의 현재 있는 곳, 나의 앞으로 있을곳”이라는 지상의 시간과 상관없이 항상 언제나 나는 하나님이다.”이말씀입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뒤에 요14장에서 이렇게 기록하죠.“예수께서 가라사대….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14:9). 너희가 눈으로 보고 있으면 곧 아버지를 보는 것이므로, 나는 하나님과 동일하며, 너희들이 지금 서 있는 땅에 나도 서 있지만 내가 있는 곳은 동시에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과 다름 없다. 왜냐하면 내가 곧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믿음의 세계는 인간의 이성으로 판단하여 시작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인간이성으로는 절대로 이해해서 스스로 받아 들일 수 없습니다. 신비의 영역이고, 비밀의 영역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나”가 주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체가 되셔야합니다. 그래서 믿음의 시작도 하나님이 하시고, 믿음의 과정과 결말도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그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