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② : 생명으로 이끄시는 분(요6:41-46, 2017년1월15일)
오늘 본문은 소위 “오병이어”사건의뒷이야기를 다룬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 천명을 먹이신 사건은4복음서에서 모두 기록합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본문에는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는 없는 기록을 싣고 있는데, 그것이오늘 본문인데요.
오병이어 사건 이후에,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신 이야기를전해 듣고,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서 예수님을 찾아 옵니다. 이 사람들을보고 하신 예수님의 첫마디는,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요6:26). 정곡을 찌른 말씀이죠.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본능, 식욕을 그냥 공짜로 채워준다는데 마다할 사람이 없다는 것이죠.
먹을 것이 풍족하지 못하던 시대마다 교회가 차고 넘쳤던 이유 중에 하나는, 교회에 가면 그나마 먹을 것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교회가 세상보다 더 부유했기 때문에 그런것이 아니라, 그나마 교회는 각박한 세상인심보다 훨씬 후했다라는 것입니다. 제가 어릴 적 시골에 자랄 때, 주일마다 교회 주일학교가 크게 부흥했습니다. 조그만 교회당에 아침 9시만 되면, 예배당이 꽉 찼습니다.이런 현상은 거의 전국적인 현상이었습니다. 특히 여름 성경학교를 하게 되면 앉을자리가 없어서 예배당 입구 문짝을 떼내는 것은 기본이고, 마당에 천막을 치고 깔개를 깔고서도 자리가 모자라,교회 담벼락 바깥에서 서 있는 아이들도 많았습니다. 이유가 뭘까요?성령님의 인도하심이나 부흥이라는 관점을 떠나서 생각해 본다면, 그 이유는 먹을 것을주기 때문이었습니다. 못살던 시대에, 교회가 특히 부유해서가 아니라,그나마 교회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나누어 주는 일들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고 경제발전이 이루어지고, 사람들이 너도 나도 잘살게 되었습니다. 냉장고 안에 넣어 놓은 음식이 상해서 그냥 버리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굳이 교회를 가지 않아도 집에 널린 것이 음식이고, 편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런 현상은 후진국에서 개발도상국으로, 그리고 선진국으로 가면 갈수록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그래서 잘 사는 나라일수록 교회에 먹을 것을 기대하고 교회 출석하는 일은 없습니다.
오늘날 이런 시대에 오늘 본문의 41절 말씀처럼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다.”라는 사실이 어떻게 받아들여질까요?불신자들이나 심지어 신자들 중에도 이 말씀을 오해합니다. “예수님은 빵을 나누어주는 분이다.””예수를 믿으면 적어도 배를 굶지는 않는다.”이렇게 해석하게되면, 잘사는 나라의 사람들에게는 이 말씀이 그리 매력적이지 않습니다. 집에 이미 빵이 넘쳐나고, 못 먹어서 힘든 일이 없는데, 굳이 예수 믿어서 내가 먹을 것을 구해야 하나…이렇게 생각합니다. 한때 한국교회도 이런 소위 “번영주의 신학”이 판치고,그 영향으로 “예수 믿으면 잘 된다더라, 자식이성공한다더라”는 기복주의 신앙이 깊이 자리 잡게 되었고, 이것 때문에교회 개척만 하면 사람들이 구름 떼와 같이 몰려오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절대 그런 뜻이 아닙니다. 말 그대로입니다.“예수 = 떡, Jesus is the bread,”“예수 = 음식, Jesus is the food”이라는말입니다. 사람이 음식 없이는 생명을 유지할 수가 없지요. 그렇다면이 말씀의 참 의미는, “예수님이 음식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없이는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라는 말씀이 됩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예수님이하셨던 말씀을 기록하기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여기서 예수님 자신이 “생명”이라고 명시하십니다.예수님 자신이 떡 자체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없이는 영원한 생명, 즉 영생을 얻을 수 없다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생명이라고 말씀하실 때, 군중들의 반응을 보십시오.“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제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로서 내려왔다 하느냐”(42절). 말하자면 군중들이 “예수가 나고 자란 것을 우리가다 알고 있는데, 무슨 해괴한 소리를 하는가?”이 말입니다.군중들이 왜 수군거리면서 예수님을 믿지 못합니까? 아주 평범한 집 출신이라는 것,아니 어쩌면 비천한 집안 출신이라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군중들이 못 믿겠다고 하는 심리에 있어서 여러 가지 의미가 있을 수 있습니다. “좀 그럴싸 해야지 믿든지말든지 생각이나 해 볼 것을 너무 얼토당토하지 않느냐?”라는 심리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이면 뭔가 왕궁에서 태어나든지, 아니면 뭔가 초자연적이거나 신비한 출신적인배경이 있어야 되지 않는가? 라는 의문입니다. 또 다른 측면은 눈에보이는 것을 믿을 수 밖에 없다는 심리입니다.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하기에는평범할 뿐만 아니라, 그냥 완전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못 믿겠다는것이죠.
이때 예수님이 심오한 말씀을 하십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44절). 약간의 동문서답을하고 계신 것처럼 보입니다. 군중들이 “우리가 당신이 태어난 집안도다 알고, 자란 배경도 다 아는데 당신이 어떻게 하늘에서 왔다고 말하느냐?”라는 정체성에 대한 의문을 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어떻게 대답하는 게 맞습니까?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설명을 하는 것 맞지 않습니까? “나는 사실 하나님의 아들이며,또한 내가 곧 하나님이다.””태초에 로고스가 계셨는데, 그 로고스가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로고스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1:1). “그 로고스가 바로 나다.”라고 자신의 정체성을밝히시면 될 것을 그렇게 하시지 않습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라고 하신 말씀의 저의는 이런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걸까요?믿음의 키는 너희가 쥐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쥐고 있다는 것이죠.
기독교 역사 2,000년 동안 복음이 힘이 있었던 이유가 뭘까요?그것은 복음이 사람들로부터 선택 받은 것이 아니라, 반대로 복음이 사람들을선택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사도행전을 한 번 읽어보십시오. 사도행전 1장에 예수님이 승천하시면서, 유언으로 “땅끝까지 내 증인이 되라”고 제자들에게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2장에는 성령님의 현현이 이루어집니다. 그리고그 성령의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각지로 흩어지고 복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그 복음이 흘러 흘러 소아시아와유럽으로 퍼져나가는 과정을 그립니다. 이게 사도행전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을잘 읽어보세요. 복음이 불려다녔나요? 아니지요. 성령님이 직접 복음의 로드맵을 정하시고, 그 복음을 전하는 사도인 바울과 바나바를 인도해 가지않습니까? 심지어 바울이 가고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려고 할 때, 성령이허락 지 않습니다(행16:7). 오히려 환상에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나타나서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복음을 전해 달라고 합니다. 그러고는 행16:10에서 이렇게 기록합니다.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이렇게 해서 유럽 최초로 교회가 마게도냐에 세워지고,그 교회가 빌립보교회이지요.
나는 오늘 우리교회 선교헌신 작정의 날을 맞이해서, 한주간 우리나라교회사 책을 다시 꺼내서 읽었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마음에 깊이 다가왔습니다. 이수정이라는 사람입니다. 이수정은 1882년 조선 신사유람단과함께 일본에 건너가서 여러 가지 문물을 배우면서 유학생활을 합니다. 그러다가 기독교를 받아들이고,세례까지 받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나서 가장 하고 싶은 것이 생겼는데,그것은 조선땅에 쪽복음을 번역하여 들고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선교사들이조선땅에 좀 와서 복음을 전했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미국 선교사편을 통해 미국에 편지를전달합니다. 그 편지가 미국 성공회 선교잡지인 Bible Society Record에 실리게 됩니다. 그 편지의 시작이 이렇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종 된 나 이수정은….” 마치 사도바울의 심정으로 세례 받은 지 1년도 채 되지 않는 상황에서 그런 편지를 띄웁니다. 그리고 Brunswick신학교에 다니는 한 선교사 지망생이 이 글을 접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해 1885년 4월 15일 인천 제물포 항으로 들어오게 됩니다.그가 바로 조선에 들어온 최초의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입니다.언더우드가 이수정의 글을 읽고, 조선 땅에 선교사로 가겠다는 결심을 한 후,미국북장로교단 선교회에 편지를 보낸 것이 Brunswick 신학교 도서관에 지금까지남아 있습니다. 그 내용이 이러합니다. “내가 이수정의 편지를 읽기전까지는 어느 땅으로 선교를 가야 하는지 결정하지 못했는데, 이 편지를 읽고 조선 땅으로 가야 되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나는 이 이수정이라는 사람이 마치 사도 바울에게 환상 중에 나타났던, 마게도냐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평행이론—각각 다른 시공간의사람에게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동일한 사건들— 같은 것이 실제 존재한다면, 이것이 바로 성령님께서 주도하시는 평행이론아닐까요? 2,000년 전에 바울에게 일하셨던 그 성령님의 주도하심이, 조선 땅에도 그대로 주도적으로 나타나게 하셨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이 편지를 읽은 사람 중에, 맥윌리엄즈라는 기업가는 조선 땅의선교를 위해서 5,000불을 헌금합니다. 그 당시 오 천불이 얼마나큰 돈인지 상상이 가지 않습니다. 신기하지 않습니까? 조선 땅에 선교사가들어가기도 전에 헌금이 먼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써서 뭐라고 합니까? 고후8장1-2절에 보면, 고린도교회가 마게도냐 교회가 행하는복음을 위한 헌금을 하는 것을 보고 좀 배워라는 도전을 던집니다.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마게도냐 교회가 극심한 가난이 있었지만,어떻게 연보가 넘치게 되었나요? 그것은 자신들이 복음안에서 받은 기쁨과 감격 때문에그랬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가난했지만 기쁨으로 자신의 것을 복음을 위해서 헌신하겠다고 내 놓은 것이지요.
성경이 왜 이것을 기록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마치 성령께서 일으키시는“평행이론”(이것은 신학 용어는 아닙니다) 같이, 오늘날 21세기 교회도 그렇게 하라는 도전입니다.그리고 주님 오실 때까지, 25세기, 30세기교회도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는 모범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