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①: 말씀이 육신이 됨(요1:1-2, 14, 2017년1월1일 주일)
사복음서는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체로 아우구스티누스가붙인 별명을 오늘날 많이 인용하는 편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사복음서의 별명을 붙일 때에는 계4:7의 하늘의 보좌에서 일어나는 예배를 묘사하는 데, 그때 하늘보좌를 둘러싸고 있는 “네 생물”이 있습니다. 그 이름을 본 따서 붙인 것인데, “사자,송아지, 사람얼굴을 한 생물, 독수리”가 등장합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은 “사자복음”이라고 부릅니다.마태복음이 그리스도의 왕 되심을 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은 “송아지복음”이라고 부릅니다. 마가복음이 그리스도의 섬기러오신 종 되심을 잘 묘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에서는 “곧”,“즉시”라는 단어가 유독 많이 등장하는 이유가 그만큼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사역하실때, 마치 종처럼 부지런히 움직이셨다는 것을 묘사한 것입니다. 막3장과 6장에는 복음서에서는 유일하게, 예수님이 “식사할 겨를도 없는지라”라고 기록할 정도로 그리스도께서 마치 종처럼 열심히 섬기셨다고 묘사합니다.누가복음은 “사람복음”이라고 부릅니다.누가복음이 그리스도의 인자되심을 잘 표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가는 유독예수님의 인간적인 모습, 예를 들면 열 두 살 된 소년의 예수님, 우시는예수님(눅19장), 배고파하시는예수님 같은 것을 기록합니다. 오늘 본문인 요한복음은 “독수리복음”이라고 별명을 붙였습니다. 이유는 요한복음이 그리스도를 묘사할 때, 신성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고 초월하시는 하나님으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초월적인 하나님이시면서 또한 하나님의 아들로서 오신 그리스도를 “말씀”이라는 단어로 부르는 유일한 성경이 요한복음입니다. 본문 1절 말씀에 보면, “말씀”이라는 단어를 세 번이나 반복합니다. 원어 성경에서는 “로고스”라는 단어를 세 번 사용합니다. 사도 요한이 왜그리스도를 표현 할 때, “로고스”라는 단어를 쓰고 있는지를 이해할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로고스”는 당시 사용되던일반적인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구약 히브리어 어법에서는 메시지나 법 규범 같은 것으로 통용되었습니다.또한 철학적으로는 우주를 지배하는 이성적 원리 또는 우주를 창조하는 힘, 에너지를가리켰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의 사고 속에는 우주를 창조한 어떤 근원 또는 원리가 있다는 믿음이있었습니다. 그게 뭔지는 정확하게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것을 사람들은 로고스라고 불렀습니다.
일전에 과학잡지를 보다 보니, 우주과학자들이 한결같이 말하길,우주에는 “암흑물질”이 존재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그 암흑물질이라는 것이 존재해야만 우주의 팽창과 가속, 은하의 생성과 소멸 등을설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암흑물질이라는 것이 반드시 존재하기는 하는데, 그 물질이 어떤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름을 붙이기를 “암흑물질”이라고 붙였습니다. “암흑물질”이 존재하기는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주를 움직이는 중요한 원리이며, 힘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뭔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마치 로고스가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우주를 생성하게 하고, 인간사를 움직이는 지배적인 절대법칙, 이성적 원리, 힘같은 것이 분명히 존재하는 데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사람들은 로고스라고 불렀습니다.이에 본문에서 사도 요한은 그 로고스가 바로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시다”라는 사실을 밝히는 것입니다. 왜 이 사실이 중요할까요? 보편적인 믿음을 성경적인 절대적 믿음으로 나아가게하는 것입니다. 로고스가 뭔지 모르는 추상적인 보편적인 믿음이라면, 이제 그 보편적인 믿음에서 나아가서 구체적이고 실체인 절대적 믿음으로 확정 지어 주는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많은 사람들은 역사적으로 쭉 종교성을 가지고 살아왔습니다.그래서 종교는 다를 지라도 공통적인 요소들이 있습니다. 이것을 “보편적인 믿음”이라고 저는 표현 하고 싶습니다. 예를들면, 우리나라는 오랫동안 “하늘님” 또는 “하느님”이라고 불리는 토속신앙이 있습니다.이것을 “일월성신님”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천지신명님”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또한 천도교에서는“한울님", 도교에서는 “옥황상제”라고 불렀습니다. 다 똑 같은 말입니다.“하늘에 있는 어떤 절대자에 대한 칭호”입니다. 그래서 어법적으로 “하늘님”에서 ‘ㄹ’탈락현상이 생겨서,“하느님”이라고 불렀습니다. 로마카톨릭도 200여년 전에 조선땅에들어와서, 오랜 세월 동안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주님이라는 뜻으로“천주님”이라고 성경번역을 했고, 그렇게 불렀습니다. 그러다가1971년 구교인 천주교와 개신교가 함께, “공동번역성경"이라는 이름으로 성경번역을 시도하는데, 그때 “하느님”이라고 표기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천주교나 한국성공회 성경에는 하나님을 “하느님”으로 번역표기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한국개신교는타종교와 구분을 두기 위해 유일신이신이라는 의미에서“하나님”으로 번역합니다.
수 천년 간 한국인의 조상들은 이미 하늘에 어떤 절대자를 “하느님”이라고 부르면서, 신봉하고 예배하는, “보편적인 믿음”이 있었습니다. 성경의 가르침이 뭡니까? 하늘의 절대자를믿고 있는 이런 사람들에게 그들이 믿고 있는 “하늘님”은 다른 분이아니라 반드시 바로 성경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셔야만 하고,또한 “그리스도”셔야 하며 그 외에는 “하늘님”이 될 수 없다라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 헬라철학에 젖어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마치 우리나라 조상대대로 내려오던 “하늘님”이라고 하는 것처럼, “로고스”라는 사상이 그들에게 자연스럽게 존재했습니다. 이제 그 “로고스 사상”에 자연스럽게 패러다임 전환을 가지게 하는 언급이 바로 오늘 본문1절입니다. 로고스가 어떤 우주의 기운이나, 우주를 창조한 어떤 추상적인 개념의 에너지나 원리로 거쳐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 로고스는 반드시 하나님일 수 밖에 없고, 또한 그 하나님이신 로고스는 바로 그리스도시다라고사도 요한이 요한복음 독자들에게 말하고 싶은 요지입니다. 그래서 사실 요한복음 전체는 1장 1절을 증명하고 해설하기 위해서 존재한다고 해도 별 무리가 아닙니다.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실 수 밖에 없는지, 또한 왜 그분이 이 땅에 오셔야만 했는지에대한 설명을 요한복음에서 쭉 일관성 있게 다룹니다.
오늘 말씀의 핵심은 뭘까요? 14절입니다. 로고스, 즉 말씀이신 하나님이 육신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소위 우리가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이라고 근거하는 구절이바로 이 구절입니다. 이 “성육신 사건”에서 중요한 단어가 “육신”이라는 단어 아닙니까? biblegateway.com이라는 곳에서 이 구절을 찾아보니, 총55개의 영어성경 버전으로 번역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 중 39개 버전에서 우리 한글 번역의 “육신”을flesh라는 단어로 번역을 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대부분은 a human being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The Word became a human being”이라고 번역하면 왠지 좀 고상한 표현이 되고, 그러나 “The Word became flesh”라고 하면 뭔가 좀 직설적인 느낌이 듭니다. 그런데 사도요한이 요한복음을 쓸 때 이 단어를 헬라어, “σάρξ”(사륵스 )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영어로 된 헬라어 사전에보면 이 단어를 몇 가지로 설명하는데, flesh, the body, a living creature이런뜻이 나옵니다. 그런데 또 어떤 뜻이 나오냐 하면, “the animal nature”라고 나옵니다. 굉장히 원색적입니다. 그런데 사실 사도요한은 본문에서“the animal nature”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Charles Swindoll이라는 목사님은 그의 책에서 “The Word became meat.” “말씀이 고기가 되어”라고 표현합니다.정말 사도 요한이 표현하려고 했던 것과 가장 가까이 있는 말씀이라고 생각됩니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렇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The Word became mammal.” “말씀이 포유류가 되어..”
그러면 사도 요한이 왜 이토록 적나라한 표현을 쓰고 싶었을까요? 그것은당시 철학자들이나 이단들의 엉터리 주장 때문에 그랬을 것입니다. 그래서 좀 원색적인 단어를 써서라도 엉터리주장을 하는 그들의 심기를 건드려 놓고 싶은 것입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두고, 하나님이 실제 온전한 사람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환영”일 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육신은 실제가 아니며, 그저 그렇게 보이도록 하나님이 환상으로 나타났다고 주장합니다. 인간의 몸은 그저 일시적인 “탈”을 쓴 것 일뿐 진짜 육신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을두고 가현설, 또는 도케티즘이라고 부릅니다. 주로 물질 세계가 영적인깨달음에 의해서 자유롭게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영지주의 이단이 이런 주장을 했습니다. 이런 주장들의 가장 큰 불신앙이 뭘까요? 그리스도를 추상적인 존재로 전락시켜 버립니다.관념화죠. 즉 화석화된 신앙입니다. 실제는없고 늘 생각의 사고 속에만 존재합니다.
오늘 본문 14절에서 사도 요한이 뭐라고 말씀합니까?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기독교 진리가천상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지구상에 내려오셔서 구체화되고 실제가 되셨다는 것입니다.여기에 “거하시며”라는 단어는 원어성경에 σκηνόω(스케노오)라는 단어인데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한가지는 “거주하다”또 하나는 tabernacle,“장막, 성막,성전”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구약 히브리어성경에서는 “쉐키나”라고 불렀던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단어와 오늘 본문의 “스케노오”라는 헬라어 단어와 어원이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발음도 비슷하지 않습니까?“스케노오” “쉐키나”. 구약의 백성들이 하나님의성막에서 그리고 성전에서 머무르는 하나님의 영광을 우레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의 형태로서만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신약시대에는 그것보다 훨씬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살아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신 하나님, 인간의 몸으로 직접 볼 수도 있고, 만질 수도 있고, 함께 우리 가운데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시다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14절에서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지요.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영광을 본다고 말씀합니다. 구약시대에는 어땠습니까? 출33장에 보면, 모세가 회막(스케노오)에 들어갈 때 하나님이 임재하십니다. 이때 모세가 하나님께 청합니다.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출33:18). 그런데 하나님이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20절). 그래서 결국 하나님의 영광이 지나가실 때에, 모세를하나님의 손으로 잠시 덮었다가 그 영광을 보지 못하게 하고 지나가십니다. 여기서 영광은 말하자면,“하나님의 얼굴”과 같은 것을 보여달라는 간청이지요. 그런데 구약에서는 하나님은 아무에게도 그 하나님의 영광을 가까이서 대면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그런데 지금 사도 요한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뭘까요?구약과 신약을 절묘하게 대비시키는 것이지요. “스케노오”(장막, 또는 거하신다)라는 신약적 헬라어 단어와 “독사”(영광)이라는 단어를 써서 구약의 “쉐키나”(영광)이라는 단어를 절묘하게 연상되도록 하신것입니다. 결국 장막위에 임재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고자 하면서, 이제 더 이상 구약 시대가 아니며, 신약시대에 그 만질수도 볼수도 없었던 하나님의 영광이 만질수있고 볼수 있는 실체가 되셔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라는 사실을 설파하는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그가 기록한 다른 성경, 요한1서1:1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이라고 하면서 “말씀” 여기서도 “로고스"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어 말합니다.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그러면 왜 사도 요한은 이와 같이 로고스가 육신이 되셔야만했다고 설명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성육신”사건이 하나님의 구원계획의 “선결조건”이라는 것을 말씀하고싶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핵심에 “십자가 사건”이 있는데, 그것을 이루시기 위해서는 반드시 선행조건이 필요한데 그것이 성육신이라는 것입니다.왜요? 십자가는 이미 지상에 존재하는 실체거든요. 그것도 역사상 가장 잔인하고 고통스런 현존하는 사형제도였거든요. 그 실체적인 사형방법에 인류를위해 대신 죽으실 대속자를 찾으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십자가를 질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것입니다. 자격요건에 들어갈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일한 분그리스도만이 그 자격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 반드시 이 십자가를 지셔야하며, 그가 아니면 자격을 가진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약간의 논리적인 진술들이 필요합니다. 믿음의 세계가 논리로 설명이 되지는 않지만,우리의 믿음을 돕기 위해서는 논리적 이해와 설명들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10단계정도로 된, 이 선결조건, “성육신”사건이 있을 수 밖에 없는 사실을 짚어 보고싶습니다.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위한 십자가를 질 수 있는 자격은첫째, 육신을 가져야만 합니다. 몸이 없는 영적인 존재는 십자가를 지지못합니다. 둘째, 육신을 가지면서 또한 죄가 하나도 없으셔야만 합니다.셋째, 이 땅에는 육신을 가진 사람은 모두 죄인입니다. 넷째, 이 땅에 육신을 가진 사람이 다 죄인이라면, 하늘에죄가 없는 자격자를 찾아야만 합니다. 다섯째, 천상의 천사들이 죄가없습니다. 여섯째, 만약 천사 중 한 명을 이 땅에 보내서 육신을 입고십자가를 지라고 했다면, 질 수는 있겠지만 그 천사의 죽음이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할 만큼 능력이 있느냐?라고 묻는다면, “아니오”라고 말 할 수 밖에없습니다. 천사 또한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제사 때 어린양의피를 드리는 일시적인 죄사함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일곱째, 그렇다면천상에서 피조물이 아니면서 죄가 없으신 분은, 하나님 자신 밖에는 없습니다. 여덟째,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은 몸이 없으시므로 십자가를 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피 흘림이 없은 즉 사함이 없느니라”의 말씀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자신만이 자격이 되는데, 몸이 없어서 십자가를 지지 못하고, 곧 죄사함의 피를 흘릴 수 없다면 자신이 온전한 몸을 가질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홉째,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이 인간의 살을입으시기로 결정하십니다. 열번째, 하나님께서 인간의 살을 입고 오실때, “반신반인”이 아니라, 그는100퍼센트 하나님이시면서, 또한 동시에 100퍼센트 인간이셔야만 했습니다. 그래야만 십자가를 질 수 있을 뿐더러, 그 십자가가 단번에 드려지는 화목제물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을 만족시키기 위해서,“선행조건”이 바로 “성육신”사건입니다.
그럼 이제 이 성육신 사건이 갖는 더 큰 의의는 무엇일까요?그것은 부활소망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첫째, 지금 하늘에 계시는 그리스도는 “육신”을 입으신 상태로계시다라는 사실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성육신 하기 이전의 원래성자 하나님의 모습으로 돌아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육신의 몸을 포기하거나 내 팽개쳐버리지 않고,그 몸을 입고 계시다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부활의 몸, 이제 온전하고 신령한 몸을 입고 계시지요. 이 사실이 왜 중요합니까? 신자가 앞으로 예수님의 몸으로 될 것이라는 소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정리를 해 보면이렇습니다. 1. 성육신: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처럼 되었다.”2. 부활: “사람이 그리스도의 몸처럼 된다” 이 두가지 진술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처음에는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셨다면,이제 종말에는 결국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처럼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고전15장에서 이 사실을, “육체(육신)”(사륵스)라는 단어와 “영광”(독사(헬라어), 쉐키나(히브리어))라는 단어를 여러 번에 걸쳐서 사용합니다.
고전15:36-43,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결국 지금 신자의 육신은 잠시의 영광이지만,후에 우리의 육신은 완전한 영광속으로 들어가게 될 것인데, 그 영광스러운 몸은 그리스도의몸과 같아질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망을 가져야 하며, 우리는몸의 한계와 질병이나 고통 때문에 낙심할 필요가 없다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성육신사건은 하나님의 영광이 육신이 된 사건이며, 또한 이 성육신 사건은 십자가 구원의 선결조건이며,이것이 결국 신자의 몸이 영광스럽게 될 것을 기대하고 소망하게 되는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