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전쟁⑩: 믿음과행함의 관계(갈3:11, 약2:24, 2016년12월18일 주일)
성경을 읽다 보면, 중요한 교리가 서로 충돌하는 것처럼 보이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구절이 바로,오늘 본문 갈라디아서 3장11절과 야고보서2장 24절입니다. 갈3:11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오직 믿음을 말씀합니다. 그런데 약2:24은,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오직 믿음이 아니라 행함도 있어야 한다 라고 가르칩니다. 바울의 가르침과 야고보의 가르침이서로 충돌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자칫 야고보의 가르침을 잘 못 이해하면,“행위 구원”을 가르치는 것 아니냐 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경계하는 교리가 바로 이것 아닙니까? “내가 구원을 위해서 뭔가 할 수있다!” 중세 교회에 교황주의자들이 교회를 타락시킨 가장 큰 원인이 이것 아닙니까? 내가 구원을 위해서 뭔가 할 수 있다”라는 사상을 넘어서서 “내가 나의 구원을 위해서 뭔가 해야만 한다.”라는 거짓진리가 진리처럼 행세했기 때문 아닙니까?그래서 성경의 진리인, “오직 믿음”,“이신칭의”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라는 명제가 중요한 화두가 되었더랬습니다. 그러고 나서 생긴 문제가 뭡니까? 믿음의 본질이 왜곡되기 시작했습니다. 믿음의 본질을 살리려고 강조했던 “칭의”가 칭의로만 끝나버리게 된 것입니다. 나는 아무공로 없고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공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의인으로 칭한 바 되었고 그래서나는 구원받았기에, 시작도 하나님이 하셨고, 끝도 하나님이 하실 것이기에나는 결국 은혜로만 살아간다 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틀린 말이 아닌데도, 문제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소위 “믿음 수월주의”—“easybelievism”이 그것입니다. 믿기만 하면 된다 라는 것입니다.얼마나 쉽습니까? 게다가 내가 할게 없다는 것입니다. 그저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는 아무것도 할 것도 없고,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상입니다. 이런 사상이 야고보가 목회하던 시절에도 있었습니다.그래서 참된 믿음이 뭔지 바로잡기 위해서 야고보서를 썼습니다. 이 문제는 기독교역사 2,000년간 계속 되어 왔던 이슈입니다.
그러면 바울과 야고보가 믿음에 대해서 정말 말하고 싶은공통된 관심이 뭘까요?
1. 참된 믿음은 오직 그리스도로만 가능하고, 그리스도는 신자가 참된믿음을 갖도록 반드시 이끄신다. 기독교의 믿음이라는 것이 가지는 신비가뭡니까? “나의 문제를 그리스도께서 해결하신다”입니다.“인간의 문제를 하나님께서 책임지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인간은 자신을 도무지 책임질 수 없다”라는 것을 내포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사건 하나만으로, 인간의 죄의 문제가 해결됩니다. 얼마나 대단합니까?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을 오해하는 부분이 뭐냐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이 죽음은 우리의 죄때문에 그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다는 것입니다.이게 역사적 사실이니, 이제 너희가 이것을 믿어라. 그러면 구원 얻는다.” 라는 식입니다. 이 교리적 명제가틀린 게 아닙니다. 그런데 뭐가 문제입니까?
“역사 속에 갇혀버린 예수님”이게 문제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믿음의 본질이 마치 역사 속에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한 분,예수님을 사실로 믿고 받아들이면,나는 신자가 된다 라고 만 생각해 버리면, 이것은 유아적인 믿음입니다.
믿음이 오해되고 왜곡되는 부분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사실을 역사적으로 믿는다. 그것은 실제였고,나는 그것을 믿어! 그러니 나는 이제 구원받았어!”이 얼마나 유아적인 신앙인가요? 이것은 기독교 신앙의 믿음이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의 믿음은 어떤 역사적 진실에 대해 동의하거나 인정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제가 목사라는 사실을 어떻게 믿습니까?제가 우리교회에 부임할 때 이력서 한 장 쓰지도 않았고, 목사 안수증 같은 것도제출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저를 목사로 믿고 따른단 말이죠. 아무것도 제가 목사라는 사실을 증명한 적이 없는데, 믿습니다. 그런데 제가 사실은 2003년 4월 8일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 서부산노회에서 안수를 받았거든요.명백히 사실이거든요. 그런데 그 현장에 여러분에 아무도 계시지 않았거든요.그렇다면 어떻게 제가 제 입으로 사실이라고 말하는 것이 진짜라고 믿나요? 근거가있나요? 없죠? 그런데 그냥 자동적으로 형성된 믿음 아닙니까?그런데 제가 목사라는 사실은 믿던 안 믿던 역사적 사실입니다. 이것은 변하지 않습니다.이 역사적 사실을 믿는다는 것은 그저 지식적 믿음이지요. 진짜 믿음은 뭡니까?김태길 목사가 실제로 지금 목사로서 질그릇교회를 목회한다는 것 아닙니까? 설교하고,가르치고, 상담하고…이 모든 목회 활동 자체가역사적 사실인 김태길이라는 목사가 증명되는 것 아닙니까? 무슨 말이냐 하면, 믿음이라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라는 지식 안에 행함이 들어가 있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2,000년전에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는 사실은 저와 여러분이 그 현장에 없었지만, 그것을 사실로 믿습니다. 이것은 믿음에 있어서 가장 기본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게 믿음의 다가 아닙니다. 진짜 믿음은 뭘까요? 그리스도께서지금 나의 삶에 여전히 영향을 끼치고 있고, 그 분께서 일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측면에서, 양들의 목자가 되십니다. 여전히 목자로서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실체입니다. 이 사실을 요10장에서 정확하게풀어놓고 있습니다.
1. 요10:11,“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느니라”
예수님께서 선한 목자가 되신다고말씀합니다. 이것은 역사적 사실이면서, 지금도 목자로서 일하신다는 의미입니다.당시 이스라엘은 정치적 살아있는 영도자, 왕을 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기 위해서 오신 왕이십니다. 이 사실을 다음 구절에서 더 풀어놓습니다.
2. 요10:14-15,“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목숨을 버리는 이유를 “안다”라는 것과 연결시키십니다. 지식적인 아는 것에 머무르지않습니다. 양의 형편을 아신다는 것이죠. 양들이 자신의 능력으로는 도무지의로 나아가지 못하는 전적 무능과 비참의 상태를 아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상태를 아시고 그냥 계신 것이아니라, 그 양들을 위해서 뭔가 했다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자신이“양”이 되시기로 결정한 사건입니다. 이것이 “유월절 어린양”입니다. 목자가 양이 된 사건입니다. 그래야만 무능에 빠져 있는 양들을 위해서 십자가를 질 수 있기때문입니다. 아는 것이 그냥 지식에 머무르지 않고 어떤 행동을 하게 만든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실체이지요. 믿음의 대상이자 주체자 되신 분은 그 믿음의 시작을 어떤 지식에머물러 있는 “안다”는 사실로 끝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그 믿음의 시작을 일으키신 분이 실제로 그 믿음을 시작하시기 위해서는 십자가를 지셔야만 됐습니다. 좀 철학적인 말인데요. 믿음의 출발이 어떤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끝내버리는 사변적믿음이 아니라, 실제 어떤 행함이 포함되어 있는 믿음으로 출발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이를 키워보셨을 것입니다. 새벽에 아이가 웁니다. 그러면 둘 중 하나입니다. 젖을달라, 아니면 기저귀를 갈아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울음 소리를들은 엄마는 이 아이에게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아는 지식”이 생겼습니다.그러면 그 지식에서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서 뭔가 합니다.기저귀를 갈아주기 위해 냄새를 맡아 확인을 하고, 아니면 배가 고픈 것을 확인해서젖을 줍니다. 지식에 머물러서 그냥 아는 것으로 끝나지 않지요. 어떤행함으로 옮겨집니다. 그래야 엄마니까요. 그리고 그 아이는 엄마를 진정한엄마로 받아들이죠. 믿음은 어떤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행함이 포함되는 것이지요. 그러고 나면 그것이 서로에게 믿음의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믿음이라는 말 안에는 행함이 당연히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3. 요10:26,“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 하는 도다”
믿음의 출발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믿음을 누가 출발시켰는가? 목자라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이유가 양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만약 양이면믿는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순서를 유심히 보세요. “믿기 때문에내 양이 되는 것이 아니라, 양이기 때문에 내 양이 된다”라는 논리입니다.
믿음의 출발은 양이 어떤 것을 선택하면서 출발하는 것이아니라, 목자 되신 주님이 먼저 양으로 삼아 주셨기 때문에 시작된 것입니다. 이 말씀이 왜 중요할까요? 믿음은 시작하신 분이 행하신다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믿음안에 행함이 나타나는 문제는 주님이 행하시는 문제라는 사실입니다. 내가 뭘 해드리는것이 아니라, 주님이 시작하셨기 때문에 주님이 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빌1:6,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믿음을 시작하신 주님이 끝까지(재림의 날까지) 이끌고 가신다는 사실입니다.
4. 요10:27,“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여기에 중요한 두 가지 양의 의무가 나옵니다.믿음의 서정에서 주님께서 시작하시고, 주님께서 이끌어 가시지만, 양이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 목자의 음성을 듣는것입니다. 둘째, 목자를 따르는 것입니다. 쉽게 말씀하면 목자의 음성, 즉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그리고 따르는 것, 즉 순종입니다. 믿음이라는 신자의경주에서 반드시 나타나야 할 것은, 말씀에 대한 순종입니다. 그리고그 에 합당한 순종과 회개의 열매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를 두고 예수님은 마16:24,“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여기에서 “따른다”라는 단어가ἀκολουθέω(아코루떼오)인데요. 요10:27의 “따른다”라는 단어와 같은 단어입니다.결국 목자 되신 주님을 따르는 것이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자기부인으로 반드시 나타나야 합니다.
믿음 안에 행함이 반드시 포함된다라는 의미가 뭘까요?그것은 내가 뭔가 양으로서 목자를 위해 해 드린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것은 그저나를 부인하는 행함, 그리고 더 나아가서 목자의 음성인, 하나님의 말씀에귀 기울이고, 순종하면서 묵묵히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 부인이나타나게 됩니다. 어떻게요? 자신이 정말 주님을 따를 수 없는 무능하고비참한 인생이라는 것을 매 순간 느끼게 되지요. 그렇기 때문에 사실은 믿음과 행함은 내 안에서 내가 행하는것이 아니라, 믿음을 시작하신 주체자 되신 분,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의영으로 우리 안에 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끝까지 그 믿음을 일궈내시기 위해서 쉬지 않고 행하시죠.그래서, 역사 속에 한 인물로서의 예수님이 아니라, 지금도 역사하시고, 지금도 나를 끝까지 구원으로 이끌고 가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실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