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나눔
영적전쟁 ⑨: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Ⅱ(행27:9-44, 2016년12월4일)

영적전쟁⑨: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Ⅱ(27:9-44, 2016124)

    우리는 저번 시간에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가서로 충돌하지 않고, 신비롭게 조화된다고 배웠습니다. 오늘은 같은 본문을가지고 본론의 말씀을 드립니다. 한번 정리를 하고 넘어 가겠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가 충돌합니까?

    비행기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기장과 부기장이 각각 조종간을 잡고 있습니다. 기장은 자신의 주권으로 샌프란시스코로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부기장은 자유의지로 뉴욕으로 가려고 합니다. 샌프란시스코로 가면 기장의 주도권은 살고, 부기장의 자유의지는 죽는 것 처럼 보입니다.반대로 뉴욕으로 가면 부기장의 자유의지는 살지만, 기장이 본래 가지고 있는 주도권은손상을 입는 것 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의 관계를 주도권 다툼이라는 관점으로 가르치지 않습니다. 승자가있고, 패자가 있다는 논리로 이것을 말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과 선하신 뜻을 따라 하나님의 주권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주권을 세워나가신다고 가르칩니다.

    이제 본문의 이야기를 살펴봅시다. 39절에 보면 이제 유라굴로 광풍에 휩쓸려 14일 이상을 떠내려간 배는 어느 땅의 해안에 다다르게됩니다. 그리고 곧 배가 모래톱에 걸렸습니다. 41절에 보니 두 해류가만나는 곳이어서 물살이 세고 빨라 배가 깨지게 되었습니다. 빨리 탈출하지 않으면 사람들도 목숨이 위태한 지경입니다.이제 물에 뛰어내려서 조금만 헤엄쳐 나가면 살 수 있습니다. 이때 로마병사들이 생각하길이 틈을 타서 죄수들이 헤엄쳐서 뭍에 올라가면 도망가는 게 뻔하데, 다 죽여버리자고 의견을 냅니다.(42).

    문제가 뭡니까? 하나님은 이미 바울에게 배에 탄 276명이 한 사람도 다치지 않고, 다 살아서 나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주권,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뜻은 사람들이 다 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반드시 그 사람들을 살리실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병사들의 자유의지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시면 어떤 일이벌어질까요? 바울은 로마에 가보지 못하고 죽는 것입니다. 또한 이 사도행전을기록한 누가도 그 배에 타고 있었는데, 그는 죄수의 신분이 아니었기 때문에 병사들의 죽음의 칼을 모면해서혹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갔다 하더라도, 사도행전은 28장이 없이,27장으로 끝나버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이 로마 1차 투옥 이후에 쓰여졌을 것으로 보이는 디모데전후서와 디도서는 쓸 수도 없게 되버립니다. 그랬다면그 주옥과 같은 목회서신은 이 세상에 없었을 것입니다. 장로의 자격, 집사의 자격 같은 소중한 직분자에 대한 지침들은 성경에 기록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반드시 하나님의 뜻을 관철시켜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기독교 역사에 큰 손해를 끼칠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주권에 손상을 받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세요. 하나님이 병사들의 눈을 어둡게 했다든지, 칼을 물 속에 다 던져버리셨다든지 그런 방법을 쓰시지않습니다. 하나님은 마치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으시는 것 처럼 보이십니다. 단지 또 다른 한 사람의 자유의지만 발동됩니다. 43, “백부장이 바울을 구원하려 하여, 저희의 뜻을 막고…”라고했습니다. 죄인들의 호송군대의 총책임자인 백부장 율리오가 생각하길, 이러다간 부하들의 칼에 바울이 죽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부하들을 저지시키고,배에 탄 사람들을 하선 명령을 내립니다. 그래서 헤엄쳐서 뭍으로 재빨리 탈출하도록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마지막절은 이렇게 끝납니다. “…마침내 사람들이다 상륙하여 구원을 얻으니라”(44). 결국 하나님의 주권이 한 개인의자유의지의 행동으로 완성됩니다.  

    혹자들은 이 장면을 두고, 하나님께서 율리오의 마음에 특별한 감동을 주셔서 그렇게 했다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일리가 있습니다.그러나 성경을 읽다 보면,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감동시키다라는 문장이 많이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체적으로직접 제1차 원인이 되셔서 개입하시는 장면을 성경은 일일이 기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만큼은 전혀 그렇게 기록하지 않습니다. 왜 일까요? 그것은 율리오가 자신의 자유의지로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하나님의 뜻이 율리오의행동에 좌지우지 된 것일까요? 율리오가 만약 거기에서 부하들의 의견을 존중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낫겠다라고 판단했다면, 바울도 그 자리에서 죽고 하나님의 본래 계획은 물거품이되어버리는 것 아닙니까? 만약 인간의 자유의지를 존중해주면, 하나님의뜻은 그야말로 바람에 떠내려가는 돛단배로 전락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율리오의 행동이 배에 탄사람들을 구원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으로 떳떳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유가 뭘까요? 인간의 자유의지로 어떤 결정을 내리더라도 하나님의 주권은 절대로 손상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자유의지가 신비롭게 하나님의 주권을 손상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주권을나타냅니다.

    1. 인간의 자유의지는 하나님의 뜻을 절대로 훼손할 수없습니다. 이게 왜 중요할까요? 인간의 어떤 행동도 하나님의 구원계획을흔들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의 어떤 악한 행동도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차질을 발생시키기 못하고, 또한 인간의 어떤 선한 행동도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기여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하나님의주권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자유의지를 부여하셨습니다.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여 행동할 수 있는 의지 말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열매를 따 먹을 수도 있고, 먹지 않을 수도 있는 의지입니다. 그러나완전한 선함만 있는 상태였습니다. 선을 선택할 지, 악을 선택할 지에대한 능력을 부여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악을 창조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아담은 불순종하기로 마음먹고 자유의지로 악을 선택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구원계획은아담의 불순종 때문에 세워진 계획이 아니라, 아담이 불순종하기도 전에 이미 세우신 계획입니다.

    구원계획이 아담의 불순종보다 앞섭니다. 이것을 두고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전지성으로 설명하려고 합니다. 미래를 미리 다 내다보셨다라는것입니다. 그래서 이미 다 인간의 자유의지로 어떤 길을 선택할 지를 아셨기 때문에, 그것을 기초로 해서 구원계획을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주권은 큰 손상을 입습니다.“하나님의 의지는 어디 있느냐? 라는 것입니다.하나님은 일기예보 하듯이, 그 어떤 수퍼 컴퓨터보다 뛰어난 능력으로 미래를 예측하시기때문에, 비도 내리시고, 햇빛도 주시고, 번개와 바람도 일으키시는 것이라면, 도대체 하나님의 의지는 어디 있느냐? 라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겠다고 자유의지로 고백하고, 받아들일 것을 아셨기 때문에 구원 받을 자로 예정하신 것이라면, 도대체 하나님의 구원의 의지는어디에 있느냐? 라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구원의 의지가 하나님의주권에서 출발하지 않고,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해서 판가름 난다면 하나님은 911 소방대원이죠. 불이 났으니 끄러 다녀야 됩니다. 소방대원은불이 나지 않게 할 능력이 없죠. 하나님이 만약 소방대원과 같이 인간의 자유의지로 저질러 놓은 일들을 수습하러다니고, 자신이 능동적으로 어떠한 것도 행하실 의지도 없다면, 하나님의주권은 도대체 어디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911 소방대원이십니까? 인간의 자유의지로 예수님을 나의 구원자로, 인생의 주님으로 모시겠다고 선택하고 결정하여 받아들이는 순간 구원이 확정된다면, 소방대원과다를 바 없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근거하지 않습니다. 1:4-5,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여기에서 2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려줍니다. 첫째,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는 사실, 둘째,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의 작정이며,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의지는 누군가의 자유의지에 의해서 좌지우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본래 그 기쁘신 뜻대로 하셨다는것입니다. 이것을 두고 우리는 은혜라고 부릅니다.

    구원의 가치가 뭡니까? 내가 구원을 얻는데 선택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는데 있습니다. 구원에 내가 뭔가 선택할수 있는게 있었다면, 구원이라는 단어를 쓸수가 없습니다. 물에 빠져서내가 헤엄쳐서 나갈 수 있는 것을 구원받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헤엄은 자신이 선택해서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그러나 물에 빠져서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그저 죽게 생겼을 때 누군가 건져주어야만될 때 그때 구원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감기가 걸려서 약을 먹으면 며칠만에 감기가 낫습니다.혹 약을 먹지 않아도 며칠이 지나면 자연적으로 낫습니다. 감기약을 먹는 것은 자신의자유의지로 선택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일주일 걸려 나을 것을 5일만에나았다면, 그것은 자신이 자유의지로 선택해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누가이 선택을 잘해서 감기가 나았다고, 평생 기뻐하며 감격해 하면서 살아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만약 여러분이 말기암 환자라고 합시다.의사가 3개월 사형선고를 내렸습니다. 의술로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로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기적같이 나았습니다. 이때 우리는 구원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있겠지요.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고후1:8-9,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선고를 받은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사도 바울은 구원은 사형선고를 받은 우리가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는 가운데서, 오직하나님만이 주권적으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전에 죽은 자였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절망가운데 있는 비참한 인생이었습니다. 도무지 우리의 자유의지를 발휘하여서그 어떤 선택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은혜를 받고 난 이후 이미 구원받은 신자가가지는 고민이 뭡니까? 여전히 우리는 은혜에 가운데서 신앙생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당한 말입니다. 우리는 은혜 가운데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 말에 함정이 있습니다. 은혜로 살아야 된다는 것이 우리의 자유의지가 묵살되어도 된다거나,아무것도 할 수 없다거나 마냥 기다려야만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구원받기까지는어떤 자유의지를 발휘해서 기여할 수 없었지만, 이제 신자는 자신의 자유의지를 발휘해서 어떤 선택도,어떤 일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오래 전에 교회에서 청년들이 이런 질문을 자주 합니다.“목사님 제가 지금 사귀고 있는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하나님 뜻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나요?”그러면 대게 쉽게 조언해 주는 말이, “기도해 봐라그래도안되면 금식기도 해 봐라이런 조언은 비성경적인 조언입니다.왜요? 기도는 하나님의 의견을 물으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나 자신을 순복시키겠다고고백하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결혼 배우자를 놓고 기도하는 청년들에게 이렇게 조언합니다.“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먼저 자신이 좋은 사람을 결정하고 결혼해라.그리고 결혼 하고 나면 평생 배우자를 위해 기도해주라!” 오늘날 신자들이 하는 신앙의오류가 뭡니까? 결혼 하기 전에는 좋은 배우자를 만나게 해 달라고 그렇게 많이 기도합니다. 그런데 정작 결혼하고 나면 배우자를 위해서 기도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기복주의입니다.

    저는 십대 두 딸아이가 있습니다. 얘들이 시집을 가려면 최소한 10년이 더 지나야 될 것인데, 수년 전부터 제게 묻는 말이 있습니다. “아빠는 제가 어떤 사람하고 결혼하면 좋겠어요?” 저는 딱 한가지만 말했습니다.“True Christian”이면 된다. 이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하나는 반드시 크리스천이어야 된다는 것, 또 하나는 썬데이 크리스천이 아닌 진짜신실한 크리스천이어야 된다라는 두 가지 의미입니다. 요새는 제 딸들에게 하나 더 추가를 해야 되겠다 싶어요.신실한 남자크리스천이어야 된다.요새는 신실한 동성애 커플 크리스천도 있다고 믿는 시대가 되어버렸으니까요.

    자신의 자유의지로 배우자를 택할 수 있습니다.아니 그렇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도하면 음성을 들려주시거나, 꿈속에 나타나서 김씨하고 결혼하지 말고, 박씨하고 하라 이렇게 하시지 않습니다.또는 성경을 꺼내 읽는데 이런 말씀이 나와요. 왕하24:1, “여호야김이 삼 년간 섬기다가 돌아서 그를 배반하였더니여호야 이 하나님을 삼년만에 배반했네김씨하고 결혼하면 3년만에 배반하겠구먼그러니 김씨는안되겠구먼, 그런데 그 다음 성경을 폈는데, 4:6,“…요나가 박 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였더니””…”넝쿨때문에 크게 기뻐했다니…” “박씨하고 결혼하라는하나님의 뜻이구나!”이런 식으로 하나님이 자신의 뜻을 나타내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생각할 때 성경이 가르치는 명령의 범위 안에서 누구와도 결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성경의 범위 안에서 허락한 어떤 사람을 선택하든지 그 결정은 하나님의 뜻과 위배되지 않습니다. 내가 좋아서 선택을 했는데, 살다 보니 정말 성격도 잘 맞고 모든 면에서 서로 화합되는 부부가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내가 좋아서 선택을 했는데, 살다보니 정말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도 다른 성격의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는 게 너무 힘겹습니다.그렇다고 아 이 사람하고 결혼한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가 보다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왜요? 어차피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다 살핀 후에 확신한 끝에 어떤 결정을 내리고,행동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항상 부족하고, 항상 깨닫지 못하고, 항상 미련한 결정을 하고 그것 때문에 후회하면서, 자책하면서 삽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니라 늘 제대로 된 결정을 내리고, 늘 하나님의 기준에 도달해 있는 사람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그 사람에게는 필요가 없겠지요

12/5/2016 12:13:00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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